#8. 그를 잊어요, 죽이지 말고, 제발! - 타락천사
'낯선 여자에게서 내 남자의 향기가 났다'는 도발적 카피로 유명했던 화장품 cf를 기억하는가. '삼순이'의 배우 김선아가 이 cf로 데뷔하였다는 사실은 어떤가. 이 cf가 왕가위의 영화 『타락천사』에서 킬러 여명을 조종하는 파트너 이가흔이, 여명의 새 여자 막문위와 지하도에서 만나는 장면에서 내뱉은 강렬한 대사였다는 사실은 또 어떤가.
『타락천사』는 『중경삼림』의 속편으로 알려져 있는 영화로, 공간이나 상황의 많은 부분에서 중첩되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하지만 왕가위의 영화 가운데, 가장 홀로 특이한 작품이기도 하다.
『중경삼림』과 연결되는 가장 큰 요소는 배우 금성무다. 경찰관 223 이름으로 등장했던 전편 대신, 목소리를 잃은 천방지축 젊은이, 하지무라는 인물로 나오지만 장애를 얻게 된 이유마저도 '파인애플 통조림을 너무 많이 먹어서'일 정도로 『중경삼림』의 바로 그 사람이라는 암시를 준다. 『중경삼림』에서 왕페이가 아르바이트를 하며 짝사랑을 키워 가던, 영화 마지막에 경찰관 양조위가 인수했던 패스트푸드점, Midnight Express는 『타락천사』 후반부에 금성무가 일하는 곳으로 등장한다. 주가령과 왕페이가 번갈아 가며 승무원 유니폼을 입고 서 있던 Midnight Express 입구에는 다시 승무원 유니폼을 입은 양채니가 서서 남자친구를 기다린다. 임청하가 동전을 넣고 음악을 듣던 바의 주크박스에는 여명이, 또는 이가흔이 동전을 넣는다. 『중경삼림』에서 임청하는 금발의 가발을 쓰고 마약밀매 업무를 수행한다. 『타락천사』의 막문위는 만났던 남자들이 자신을 잊지 못하게 하기 위해 노란 곱슬머리로 염색하였음을 말한다. 양채니는 남자친구 조니를 '금발 머리의 아령'에게 빼앗겼다 믿고 연적을 찾아 나서며, 양채니에게 반해 이를 돕는 금성무도 어느새 금발로 염색해 있다. 관심 있는 이성의 방을 정리하고 쓰레기를 뒤지는 것은 『중경삼림』의 왕페이가 『타락천사』의 이가흔에게 전수한 내용이다. 핑크 고무장갑을 끼고 명랑, 활달 그 자체로 어항의 물을 갈아주는 왕페이와, 앞머리를 눈까지 가리고 담배를 피워 문 채 침대 시트를 갈다가 그물 스타킹이 찢어질 듯 상대를 생각하며 긴 자위를 하는 우울한 이가흔이 다르지만 말이다.
『타락천사』가 『중경삼림』뿐 아니라 또 다른 왕가위 작품들과 가장 상이한 요소는 등장인물이다. 80년대 후반부터 90년대 초반까지 왕가위 군단으로 등장한 유덕화, 장만옥, 장국영, 장학우, 유가령, 양조위 대신 여명, 이가흔, 막문위가 나왔다. 4대천왕의 한 사람으로 당시 홍콩 연예계의 대표적 인물이었던 여명은 왕가위 감독과 『타락천사』 단 한 작품만 함께 하였다. 여명은 아주 정석대로, 대졸 공채 신입사원처럼 훤칠하고 밋밋하게 잘생긴 얼굴인데, 이 영화에서 나른하면서도 안쓰럽고, 부드러우면서도 퇴폐적인 멋을 뿜어내는 살인청부업자 역할을 제대로 했다. 여명 영화 인생상 봐줄 만한 영화는(개인적인 기준) 『타락천사』와 『첨밀밀』이 유일한데, 『타락천사』에서의 역할은 마치 김영하 작가의 초기작 남주인공을 보는 듯 손발이 오그라들면서도 매력적인 이미지를 풍긴다. 미스 홍콩 출신으로 예뻐도 너무 예쁜 이가흔은 종잇장처럼 마른 몸매와 낮은 목소리로 살인청부업자의 파트너 역할을 했다. 이 영화로 홍콩금상장영화제 여우조연상을 받은 막문위는 자유분방하고 파격적인 연기로 그 누구보다도 깊은 인상을 주었다.
『타락천사』의 등장인물들은 모두 전혀 일상적이지 않다. 홍콩 영화에서 조직 폭력배는 드물지 않은 캐릭터지만 그들은 대개 서열의 문제, 타 조직과의 힘겨루기, 범죄 행위의 갈등과 같은 현실적인 서사를 가지고 있는 데 반해, 살인청부업자로 나오는 여명은 매우 예외적인 인물이다. 앞뒤 사정없는 조용한 킬러다. 검정 상하의와 검정 선글라스를 걸친 채 리볼버 두 자루를 쥐고 사람들을 마구잡이로 쏴 죽인다. 그와 155주간 동업을 하며 얼굴 한번 보지 않고 업무 지시만 내리다, 여명이 청부업을 중단할 의사를 밝히고, 지하도를 스치던 다른 여자에게서 그의 향기를 맡자 여명을 죽여버린 이가흔은 더욱 특이하다. 다섯 살 때 말을 잃은 지체장애인 금성무 역시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캐릭터다. 밤이 되면 닫힌 남의 가게에 들어가서 장사를 하고, 싫다는 사람들에게 이발을 해주거나 아이스크림을 억지로 먹인다. 금발 여자에게 남자친구를 빼앗겼다는 이유로 금발 등신 인형을 패대기치며 벙어리 금성무와 짝패처럼 돌아다니다, 몇 달만에 갑자기 조신한 스튜어디스가 되어 그를 모른 척하는 양채니도 참으로 희한하다. 모두 별나다. 『타락천사』라고 불릴 정도로.
이 영화는 상당히 야하다. 개봉 당시 영화관에서 커다란 스크린으로 이가흔의 두 차례 자위 장면을 볼 때는 꽤 낯이 뜨거웠다. 미스 홍콩, 나중에 홍콩 최고의 재벌이자 셀럽인 허진형과 결혼하게 된 이가흔이, 침대 위에 누워 그물 스타킹을 신고 여성의 성기 부분이 보일 정도의 카메라 각도에서 기나긴 자위를 하는 장면이 충격적이었다. 영화 『케빈에 대하여』에서 케빈 역의 에즈라 밀러가 엄마 에바 역의 틸다 스윈슨이 방문을 열었는데도 삐딱하게 웃으며 자위를 계속하던 장면이나, 박찬욱 감독의 할리우드 진출작 『스토커』에서 여주인공 미아 바시코프스카가 폭력적 본능을 따라 첫 살인을 저지른 후 샤워실에서 자위하는 장면만큼이나 충격적이었다. 여명과 막문위의 키스 신도 95년 당시 다른 홍콩영화보다 훨씬 사실적이었다. 영화 전체의 관능미나 퇴폐미에 힘을 실어준다.
『중경삼림』을 관통하는 두 곡, <California Dream'in>과 <몽중인>에 대응하듯, 이 영화에는 중화권 최고 가수 등려군의 원곡을 홍콩 여가수 관숙이가 광둥어로 다시 부른 <忘記他>와 중국 가수 제진의 <思慕的人>이 등장한다. <忘記他>의 몽환적인 분위기는 킬러와 파트너, 여명과 이가흔의 어두운 관계를 그대로 반영한다. 자신을 잊어달라는 여명, 그를 잊느니 차라리 목숨을 빼앗는 이가흔. <思慕的人>은 이 영화 유일의 흐뭇한 관계인 금성무 부자의 장면을 내내 담당한다. 왕조현의 전 남친이었던 제진 외에도, 많은 대만 가수들이 이 노래를 자기만의 색깔로 불렀다. 푸른 강물을 거슬러 오르는 연어가 고향을 그리는 노래와도 같은 이 곡이 있어, 어둡고 우울한 『타락천사』에도 희망이 조금이라도 엿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