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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만의 비밀장소

알몸으로 마주한 하늘

by 더웨이

알몸으로 마주한 하늘

월문 온천 2층 옥외 노천탕 평상에 알몸으로 누워 세상을 봤다. 측백나무 초록 사이로 파란 하늘이 펼쳐지고, 말풍선 구름이 두둥실 떠간다. 하늘에 비행기가 미끄러지듯 지나간다. 250여 명의 인생이 실린 물체는 각자의 사연과 목적지를 안고 날고 있었다. 평균 나이가 마흔이라면, 저 비행기 속에는 일만 년의 세월이 담겨 있는 셈이다.


그 장면이 내 삶을 되돌아보게 됐다. 성과에 쫓겨 숨 가쁘게 달려왔고, 업무에 파묻혀 제대로 쉴 수 없는 날들이었다. 가족의 바람을 외면하고, 불의에 침묵하며 행동하지 못헸던 나약함도 있었다. 성급함으로 소중한 관계가 깨졌던 기억들, 교만했던 순간들이 안개처럼 피어올랐다. 빈손으로 와서 빈손으로 가는 인생, 알몸을 하늘에 내보이며, 나는 내려놓음을 생각했다.


시간의 강물과 비밀 장소

은퇴 전, 나는 언제나 여유를 갖지 못했다. 온천도 마찬가지였다. 온천을 서둘러 마치고 밖에서 아내를 기다리곤 했다. 그러나 은퇴 후, 그 장면은 완전히 뒤집혔다. 이제는 아내가 먼저 나오고, 내가 뒤늦게 나온다. 일의 목표와 스케줄이 없으니 시간이 여유로웠다. 온천탕에서 느긋하게 생각의 날개를 펼칠 수 있었다.

그 여유 속에서 나는 예전에는 보지 못했던 것들을 보기 시작했다.


고은 시인의 시구가 내 마음에 와닿았다.

“내려올 때 보았네/올라갈 때 보지 못한 꽃을.”


바로 그랬다. 같은 노천탕에서 측백나무의 향내를 맡았고, 구름이 흐르는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솔개가 원을 그리니 내 마음도 따라 도는 듯했다.


불현듯이 포레스트 카터의 소설 "내 영혼이 따뜻했던 날들"속 인디언 체로키 소년 ‘작은 나무’의 비밀 장소가 생각났다. 소년에게 사향고무나무가 굽어보는 작은 풀밭이 있었고, 그곳이 그의 비밀 장소였다.


할머니는 손자에게 이렇게 말했다. “누구든지 자기만의 비밀 장소를 가져야 한다. 그곳은 영혼이 숨 쉬고, 사람을 성장시키는 자리다.” “사람에게는 두 개의 마음이 있다. 몸을 꾸려 가는 마음과 영혼의 마음이다. 몸을 꾸려 가는 마음이 욕심과 교활함으로 가득 차면, 영혼의 마음은 밤톨처럼 작아진다. 그러나 영혼의 마음은 근육과 같아서 쓸수록 더 커지고 강해진다.”


나는 오랫동안 몸을 꾸려 가는 마음에만 매달려 왔다. 그러나 이제 은퇴 후에 더욱 영혼의 마음을 꾸려야 한다. 이제 내게도 비밀 장소들이 생겼다. 빗속이 나만의 비밀 장소요, 동네 작은 동산의 벤치가 나의 비밀 장소다. 그곳이 내 삶을 되돌아보는 비밀 장소다.


성찰의 장소들

빗속은 내 비밀 장소다. 비가 내리면 몸이 먼저 반응한다. 우산을 쓰지 않고 걸어 나가고 싶고, 빗방울을 느끼고 싶다. 세상을 씻는 자연의 샤워장이 나를 기다리고 있을 것 같다. 오래된 노랫말도 내 마음에 들린다


꽃가지에 내리는 가는 빗소리

가만히 귀 기울이고 들어보세요
너희들도 이 꽃처럼 맘이 고와라


그 노랫말은 내 마음을 씻어내는 마법 같았다. 세상에 가득한 혐오와 차별, 시기와 질투, 거짓과 탐욕을 씻어 내라는 것 같았다. 빗속은 영혼의 샤워장이었고, 그곳은 내가 정화되는 곳이었다.


또 하나의 비밀 장소는 동네 야산 벤치였다. 해발 94m의 낮은 동산, 벤치 앞 나무 밑에는 나의 반려견 ‘미래’의 뼈가 묻혀 있다. “미래”는 출장에서 지친 몸으로 현관을 열면 제일 먼저 나를 맞이했다. 꼬리는 흔들며 품에 뛰어드는 순간 모든 피로는 눈 녹듯 사라졌다.


“미래”의 벤치에 앉으면 도시의 빌딩들이 멀리 보였다. 빌딩 속에서 생로병사, 희로애락, 사랑과 이별의 연극이 공연되고 있다. 그 나무는 나에게 물었다. “너는 어디서 와서, 무엇을 하다, 어디로 가느냐?” 그 물음은 언제나 숙연 하게 만든다. 작지만 소중한 것들과 함께 나의 길, 그 길을 걸어야 한다.


내려놓음의 자유

은퇴 후 에야 행복은 소소한 것을 알았다. 측백나무 네 그루, 알몸으로 올려다본 파란 하늘, 죽은 담쟁이덩굴, 비행기 속 인생, 솔개의 날갯짓. 그것들이 내 하루를 따뜻하게 만들었다. 비밀 장소에서 비로소 그런 것들이 눈에 들어왔다.


세 곳의 비밀 장소는 모두 하나로 연결되어 있다. 노천탕에서 나는 자연의 일부가 되었고, 빗속에서 나를 씻어 내며, 동산의 벤치에서 겸손한 순례자가 되었다. 비밀의 장소들은 내 마음의 근육을 단련하고, 내 영혼을 비추는 거울이었다.


은퇴는 끝이 아니었다. 새로운 시선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출발점이었다. 혼자 질주하는 삶이 아니라, 함께 천천히 음미하는 삶이었다. 늘 그 자리에 있었지만 보지 못했던 것들을 보는 것이었다. 나는 비밀의 장소에서 내려놓음을 깨달았고, 느림 속에서 삶의 본질을 찾을 수 있었다. 이제 하늘 아래 알몸의 마음으로 인생후반전 그 길을 걸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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