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이 분다, 웃어야겠다
노인의 웃는 얼굴에 딸이 있었다
나이가 든다는 것은 삶을 완성하는 과정이다. 젊음의 열정은 식지만 성숙의 단계가 온다. 육신은 쇠약해지고 내면의 성찰은 더 깊어져 간다. 순간의 기억은 가고 본질의 통찰이 온다. 흔히 사람은 자식을 통해 세대를 이어간다. 내 모습에 자식이 있다. 이것이 자식을 낳은 사람이 얻는 생명의 연속성이다.
죽음을 넘어서는 두 가지 길
나는 무엇을 남기는가? 나에게는 외동딸이 있다. 어머니는 생전에 아들 하나 더 낳기를 원하셨다. 그러나 그렇지 못했다. 대신 딸 하나 열 아들 부럽지 않게 키우라 하셨다. 그 딸은 17년 전 유학을 떠났다. 이제 외국에서 가정을 이루고 살고 있다. 한국에 돌아올 기약은 없다. 늦게 얻은 손녀가 너무 귀엽다. 멀리 있어 늘 보고 싶다.
움베르토 에코는 장미의 이름에서 "지난날의 장미는 이제 그 이름뿐, 우리에게 남은 것은 그 덧없는 이름뿐"이라고 했다. 그는 인간이 죽음을 넘어서는 길은 두 가지뿐이라고 했다. 하나는 자식을 낳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책을 쓰는 것이다. 좋은 자식을 낳거나 좋은 책을 쓰는 사람은 죽지 않는다. 그런 사람들은 죽음을 넘어선다고 했다. 나는 어떠한 모습으로 살아가는가 스스로에게 묻는다.
한약국에서 들은 한마디
어제 딸의 후배가 운영하는 한약국을 갔다. 아내가 벌써부터 가자고 재촉했으나 차일피일 미루다 이제야 갔다. 나는 심장질환으로 약을 복용하며 정기적인 검사를 받는다. 그런데 요즘 기운이 없고 감기에 걸려도 잘 낫지 않는다. 기력 회복이 필요했다.
문진을 했다. 한의학에 의한 내장기관 증상과 일상생활의 루틴을 물었다. 나의 미세한 행동을 원장은 이미 파악하고 있었다. 인바디 체크로 근육과 지방의 분포를 확인했다. 노년의 식생활과 운동에 대하여 상세하게 설명해 줬다.
문진을 마치고 개인적인 얘기를 했다. 그 원장은 딸과 대학 같은 과 후배였다. 그들의 대학교 학과는 선후배 관계가 특별하게 끈끈하다고 했다. 그 후배는 약학을 더 공부하고 한약국을 운영한다. 2년간의 해외 활동과 경험이 전공을 바꾸게 되었다고 했다.
20여 년 전 그들의 학창 시절 얘기를 했다. 선배들이 참 좋았다고 했다. 캠프에서 책을 싸들고 와서 너희들은 종일 책만 읽어라, 밥을 해주고 모르는 것 있으면 물어보라 했다고 했다. 그때가 가장 행복했던 시절이라고 했다. 그들이 그런 선후배 관계였다는 것을 처음 알았다.
그 원장은 딸의 개인적인 얘기를 많이 했다. 딸과의 추억을 많이 얘기했다. 그런 말미에 그가 말했다. "아버님 웃는 모습에 **언니 모습이 있네요." 나는 그 소리를 듣고 내심 깜짝 놀랐다. 그리고 기분이 좋았다. 그야말로 이미 한약 효과가 내 몸에 흐르고 있는 것 같았다. 노인의 웃는 얼굴에 딸의 모습이 있다는 말. 그 말은 이미 나의 심신을 치유하고 있었다.
딸은 이국 땅에서 학위를 받고 안정된 직업을 갖느라 고생을 했다. 늦게 손녀도 가졌지만 부모로서 가까이서 도와주지 못한 것이 많다. 외국에서 전문직업을 갖고 어린 손녀 육아를 한다는 것이 쉽지 않다. 시간 관리가 철저한 조직 사회를 살아가는 것은 쉽지 않다. 필요한 때 도움을 주지 못해 가슴이 아프다.
원장과 짧은 대화 속에 많은 내용을 알게 되었다. 그들의 학과는 각별한 선후배 관계였다. 특별하게 서로를 돕고 나누었다고 했다. 그때가 행복한 때라고 했다. 40대 중반 요즘도 밥은 먹고 사느냐고 서로 안부를 하며 연락한다고 한다. 그런 딸을 후배는 기억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딸의 아버지를 만나 딸의 얼굴을 발견했다. 노인이 된 아버지의 웃는 얼굴에서 젊은 날의 선배를 발견했던 것이다.
나는 거울을 본다. 반백의 노인 얼굴에 세월의 흔적이 있다. 거울 속에서 젊은 날을 회상하며 이 웃어 본다. 시간은 미래로만 흐르지 않는다. 자식을 통해 시간은 거슬러 올라갔다.
그 원장의 눈에는 노인의 웃는 얼굴에 딸의 모습이 있다고 했다. 나는 이 말을 되새겼다. 17년을 떨어져 살아도 딸은 내 얼굴에 있었다. 그리움이 얼굴에 나타난 거 같았다. 나는 그들과 같이 살 것도 생각해 봤다. 그것은 여러 가지 어려움이 있고 커다란 도전이다. 그래서 우리는 이렇게 여기 살고 그리움 속에 살 것이다.
바람이 분다, 웃어야겠다
그 한약국을 나왔다. 바람이 불었다. 창문을 열어야겠다. 그리고 글을 써야겠다. 요즘은 글을 쓰려해도 집중이 잘 안 된다. 대처 능력이 전만 못하다. 이것도 나이가 들어 황혼에 드는 과정이다. 그래도 감사하다. 글을 쓰는 것이 얼마나 고마운 일인가!
움베르토 에코가 말했다. 자식을 낳는 것과 책을 쓰는 것, 이 두 가지가 죽음을 넘어서는 길이라고. 이제 그 두 길은 따로 있지 않다. 사람들은 내 웃음에서 딸의 모습을 본다. 딸은 내 얼굴에 남아 있고, 나는 그 얼굴로 인생을 산다. 웃는 얼굴로 쓴 글이 좋은 글이다. 그것이 죽음을 넘어서는 길이다.
폴 발레리의 시 《해변의 묘지》에 "바람이 분다! 살아야겠다!"라는 시구가 있다. 철학자 강신주는 이를 "바람이 분다. 글을 써야겠다."로 바꿔 썼다. 나도 여기에 한 마디를 더한다.
바람이 분다. 웃어야겠다.
바람이 분다. 사랑해야겠다.
바람이 분다. 나도 글을 써야겠다.
한약은 며칠 후에 택배로 온다. 그러나 "아버님 웃는 모습에 **언니 모습이 있네요"라는 그 한마디가 이미 나를 힘나게 했다. 웃으면 딸이 내 얼굴에 있다. 노인의 웃는 얼굴에 자식이 있다. 올바로 살아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