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파이더맨: 마일즈 모랄레스는 누구인가? 리뷰
제 블로그를 오래 구독하신 분들이라면 모두 아실 거예요. 제가 스파이더맨을, 거미 파생캐를, 특히 마일즈 모랄레스를 무척이나 사랑한다는 사실을요! 어느덧 다음주에 인섬니악 게임즈의 PS5 <스파이더맨: 마일즈 모랄레스> 게임이 발매를 앞두고 있어서 각종 티저와 트레일러들이 쏟아지고 있는 덕분에 SNS 타임라인이 마일즈로 가득해 무척 행복한 때를 보내고 있습니다. 마침 또 물 들어올 때 노 저어야지, 마일즈에 대해 제 생각을 몇 글자 적어볼까 마음을 먹었어요.
아니 그런데, 제가 블로그에 마일즈의 오리진을 주제로 상세히 적은 글이 없더군요?! 이거이거 말로만 좋아한다 사랑한다 떠들었지, 순 헛거였어요. 슈퍼히어로 장르에서 캐릭터를 논할 때 가장 중요한 오리진을 다루지 않다니요! 그러니 오늘은 게임 출시에 앞서 초심으로 돌아가서 마일즈의 데뷔에 대해 얘기하고자 합니다. 마침 시공사가 <스파이더맨: 마일즈 모랄레스는 누구인가?>를 써프라이즈 깜짝 정발로 내주기도 했으니 금상첨화지요. (정발작 리뷰를 많이 해보려고 노력 중인 요즘이에요.)
이 책은 마일즈의 최초 등장 이슈인 <얼티밋 폴아웃> #4의 일부와 함께, 피터의 마지막 싸움을 다룬 <얼티밋 스파이더맨> #160 그리고 마일즈의 첫 솔타인 <얼티밋 코믹스 스파이더맨(2011)>의 첫 스토리아크를 수록했어요. 마일즈의 오리진 스토리는 아주 정직하게, 마일즈가 거미에 물린 뒤에 피터의 죽음이라는 사건을 겪고 2대 스파이더맨으로 거듭나는 과정을 다루었습니다. Vol.1이라고 넘버링을 붙이기보다 "마일즈 모랄레스는 누구인가?"라는 부제를 붙인 건 이 책이 '한 권으로 뽀개는 오리진 스토리' 라는 점을 강조하려는 의도겠지요. <얼티밋 스파이더맨> #160이 수록돼있는 점이 저는 정말 행복해요. 얼티밋 피터도 정말 싹싹하고 귀여운 녀석인데 국내 독자분들께 이렇게 소개가 되었네요.
"마일즈 모랄레스는 누구인가?" 그래요, 이렇게 질문이 던져졌으니 그에 대한 답이 있는 게 인지상정 아니겠어요. 이번 글에서는 제 나름의 대답을 적어볼까 합니다.
여기서 잠깐, 시간을 조금 더 거슬러 올라가 봅시다. 때는 2010년 9월 23일. 인기 시트콤 <커뮤니티> 시즌2가 첫 방영하는 날이었습니다. 당시까지만해도 마블코믹스 70년 역사 동안 주요 영웅들은 때가 되면 다양한 인종의 동료와 친구에게 자신의 자리를 물려주고 바톤터치하는 일이 비일비재했지만, 스파이더맨만큼은 절대 그런 일이 없었어요. 스파이더맨은 피터 파커였고, 피터 파커는 유대계 백인 남성이었습니다. 그걸로 끝이었죠. 그런데 이 별것 아닌 이 장면이, 흑인 배우 도널드 글로버가 스파이더맨 잠옷을 입고 침대를 빠져나오는 이 장면이, 이 생경한 이미지가, 많은 사람들에게 충격을 줍니다. "성인 흑인 남성이 스파이더맨 옷을 입고 있는" 장면 자체가 TV에 나올 일이 사실상 전무했기 때문이었겠지요. 스파이더맨은 피터 파커였고, 피터 파커는 백인이었으니까요.
마침 샘 레이미 감독의 <스파이더맨> 3부작이 마무리되고 마크 웹 감독의 <어메이징 스파이더맨> 영화 리부트가 결정된 시기였습니다. 이 장면을 계기로 트위터에서는 흑인 배우인 도널드 글로버에게 스파이더맨 새 배우 오디션의 기회를 달라는 해시태그 운동(#donald4spiderman)이 시작됩니다. 도널드 글로버는 유쾌하고 능청 맞으며 피터 파커 캐릭터를 훌륭하게 소화해낼 수 있는 배우라고 말이에요. 농담 반 진담 반으로 시작되었던 운동이 정말로 나비효과를 일으킬 거라곤 아무도 몰랐을 거예요.
사실 그 전부터 마블 코믹스 편집부에서는 극중 주요 무대의 자매 세계관인 '얼티밋 유니버스'에서 기존의 주인공 고등학생 피터 파커를 죽여 퇴장시킬 계획을 꾸미고 있었습니다. <얼티밋 스파이더맨>의 시작은 2000년입니다. 밀레니얼을 맞아 20세기를 배경으로 하는 케케묵은 오리진 스토리를 21세기 버전으로 새로이 업데이트하는 취지에서 새롭게 론칭한 시리즈였는데요. 천정부지로 높이 쌓인 수십 년 분량의 코믹스들을 진입 장벽으로 느끼는 신규 독자들에게는 더할나위 없이 좋은 스타팅 포인트였지요. <얼티밋 스파이더맨>은 예상대로 큰 성공을 거뒀지만... 어느덧 연재 10년 차. 진입장벽을 해소하기 위해 시작했던 시리즈의 연재분이 제법 쌓여서 그 자체로 진입장벽이 돼버리는 아이러니. 슬슬 이 친구의 기나긴 이야기에 방점을 찍을 때가 온 거예요.
<얼티밋 스파이더맨>의 작가 브라이언 마이클 벤디스는 도널드 글로버 해시태그 운동을 보면서 괜찮은 아이디어라고, 나도 도널드 글로버가 스파이더맨 하는 걸 보고 싶다고 느꼈다며 인터뷰한 바 있어요. <스파이더맨: 뉴 유니버스 아트북> 서문에서 벤디스는 마일즈의 창작을 회고하며, 본인의 가정부터가 다문화 다인종 구성이며 '내 아이들이 직접 읽고 자라며 귀감이 되어줄 수 있는' 책을 쓰기를 바랐다고 밝혔습니다. 마침 또 이게, 벤디스 정도의 네임밸류가 있는 작가라면 "이보쇼, 출판사 양반. 난 흑인 스파이더맨을 봐야만 쓰겠소." 라고 적극적으로 편집부와 협의할 수 있는 자리이기도 하잖아요. 작가가 적극적으로 일을 추진했고, 편집부 역시 이에 찬동했습니다. 그렇게 해서 2011년, 마일즈 모랄레스는 세상의 빛을 보게 됩니다. 펜슬러 사라 피첼리의 눈부신 아트와 함께 말이에요.
제 스파이더맨 입덕은 2014년 중순이었기 때문에 2011년 마일즈의 데뷔 당시를 직접 경험해보진 못했어요. (그때만 하더라도 슈퍼히어로의 ㅅ도 관심이 없었거든요.) 하지만 그맘때 작성된 기사와 칼럼, 커뮤니티 댓글들을 대강만 둘러보아도, 화산 폭발처럼 뜨거운 분위기였다는 걸 쉽게 알 수 있었어요. 워싱턴 포스트에 코믹스와 팝컬쳐에 관한 칼럼을 쓰는 저널리스트 데이비드 베탕쿠르는 평생의 삼 분지 이 동안 코믹스를 읽어오면서 마일즈의 첫 등장을 직접 읽게 된 순간이 가장 행복했다고 서술합니다. 이분은 마일즈와 동일한 푸에르토리칸계 아프로라티노라서, 그 전까지는 머릿속에 떠올릴 수 없었던 "스파이더맨은 나랑 비슷해!" 라는 생각을 갖게 되어 가슴이 벅차오른다고 말하고 있어요. 소수자에 속한 코믹스 팬들은 마일즈의 등장 이후 이렇게 말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나도 스파이더맨이 될 수 있어." 라고 말이에요.
애틀랜틱의 이 기사는 마일즈를 사이에 둔 치열한 인터넷 공방전을 간략하게 요약해놓았는데요. 과거 마블코믹스 편집자 톰 드팔코는 이런 말을 남긴 적이 있습니다.
코믹스 팬덤은 변화를 요구한다곤 하지만 정작 정말로 변화가 찾아오면 좀처럼 받아들이지 않는 경향이 있다.
정확하게 그런 모양새로, 마일즈의 등장을 부정적인 시각으로 바라봤던 사람들도 굉장히 많았다고 해요. 나름의 이유가 있습니다. 편집부장 악셀 알론소가 "마일즈는 (그 당시 대통령이었던) 버락 오바마를 본따 만든 캐릭터다" 라고 발언한 바 있기에, 너무 대놓고 시대에 편승해서 정치인에게 싸바싸바하는 모양새가 아니꼽다는 지적이 있었습니다. 피터와 마일즈를 쌍두마차 식으로 굴리는 게 아니라, 멀쩡하게 활동하던 기존의 주인공을 죽이고 그 대체역으로 새로 등장시키는 방식이기 때문에 팬으로서 매우 불쾌하게 여기는 경우도 있었고요. 조금 더 근본적으로 인종적 다양성을 회사의 기치로 앞세워 장사꾼 노릇을 하는 것을 마땅치 않게 생각하는 POC 당사자의 의견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베탕쿠르의 절절한 증언에서 알 수 있듯이, 미디어에서 다양한 군상을 묘사하는 것은 무척이나 중요합니다. 아이들이 인생의 롤모델로 삼고 스스로 성장해나갈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해줄 수 있는 슈퍼히어로 매체라면 더더욱 그렇지요. 마일즈의 등장은 시대의 변화와 요구에 발맞춰 시기 적절하게 부응한 결과물이었다고 생각해요.
"내가 보는 만화에서 기존 주인공이 죽고 그 빈 자리를 새로운 주인공이 대체한대" 라고, 마블에 관심 없는 가족이나 친구에게 말해보면 어떤 반응이 돌아올까요? 일단은 일반적이지 않은 전개니까 놀라지 않을까요. 그런 대담한 선택을 하다니, 작가가 무척 자신이 있나본데? 라고 웃을지도 모르겠네요. 확실한건, 기존 주인공이 성공적이었을 수록 그리고 인기가 많았을 수록 새로운 주인공에 대한 기대감이 클 거란 거예요. 다른 누구도 아니고 그것도 마블의 큰 기둥인 스파이더맨 피터 파커라면, 독자의 기대를 따라잡으려면 웬만한 걸로는 성에 차지 않겠네요. 또한 당연히, 후임 주인공은 전임자와의 비교를 받으며 모든 행동과 모든 업적을 평가 받을 거예요.
마일즈의 이야기에서 가장 큰 골자 중 하나는 그런 비교에서 당당히 살아남아 독자적인 히어로 정체성을 입증하고 인정 받는 데에 있습니다. 마일즈는 처음 히어로가 되기로 결심한 그 순간부터 끊임없이 대중에게, 언론에게, 동료 히어로들에게, 부모님에게 차근차근 "너는 어엿한 히어로구나"라고 인정을 받아나갑니다. 마일즈가 따로 인정욕구가 있는 것은 아니에요. 다만 주변의 다양한 캐릭터들이 마일즈를 스파이더맨으로 받아들이는 과정을 반복해나가요. 영원한 죽음이 존재하지 않는 코믹스 세계에서 마일즈는 전임자 피터 파커 당사자에게 무려 세 차례나 인정과 축복을 받는데요. 첫째로는 극초반에 만난 '피터 파커의 여성형 복제인간' 제시카 드류. 둘째로는 평행세계에 넘어온 오리지널 원조맛집 '616 메인 유니버스' 피터 파커. 셋째로는 죽음에서 부활한 '1610 얼티밋 유니버스' 피터 파커입니다.
개인적으로는 아쉬운 부분이에요. 제인 토르가 애뉴얼 단편에서 "나는 내가 자격있음을 입증할 필요가 없다. 묠니르도 나도 내가 자격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라고 말했듯이, <캡틴 마블> 영화에서 캐롤 댄버스가 옛 스승을 시원하게 뻥 날리며 "내가 너에게 증명할 건 아무것도 없다"라고 말했듯이, 마일즈도 이러한 평가내림을 인지하고 스스로의 목소리를 찾아가는 모습을 보였다면 좋았을 텐데요. 이 부분은 이후에 다시 언급하겠습니다.
어쨌거나 비교 분석은 정말 흥미로운 작업이에요. 각기 비슷한 점과 다른 점을 짚다보면 그 속에서 새로운 의의가 피어나기 마련이니까요. 각각 다른 이유로 새로이 애정할 이유가 생겨서 좋지요. 이게 바로 오리지널을 재해석한 파생캐의 가장 큰 매력 아닐까요. 그런 의미에서 모두가 잘 아는 메인 유니버스 주인공 피터 파커의 오리진과 마일즈의 오리진을 비교해보면 어떨까 하고 표를 만들어왔답니다.
오리지널 피터 파커의 오리진 스토리는 다들 많이 아시지요? 이번 포스팅을 계기로 1962년 스파이더맨의 데뷔이슈 <어메이징 판타지> #15를 다시 읽었는데요. (역시 정말 명작은 명작인 이유가 있어요. 너무 좋아요. 아직 안 읽으신 분들은 꼭 직접 읽어보시길 바라요.) 여기서 15세 피터 파커를 소개하는 첫 마디는 "놀 줄도 모르는 미드타운 고교의 유일한 전문 샌님"입니다. 하지만 흔히 이미지로 떠오르는 쑥쓰럼 많은 '찌질이'는 아니에요. 쑥맥이라 서툴긴 해도 포기하지 않고 나름대로 적극적으로 급우 여자애한테 거듭 데이트 신청을 할 줄 아는 친구거든요. 다만 번번이 매몰차게 거절당하고, 인기짱 일진깡패 플래시 톰슨에게 잔인하게 조롱당하기 일쑤지만요. 사회적으로 고립되어 외롭고 쓸쓸한 피터는 눈물을 훔치며 "모두가 후회하게 만들어주겠다"고 이를 갑니다. 스탠 리와 스티브 딧코가 그려내는 초창기 피터 파커는 독기가 가득 찬 청소년이에요. 세상에게 너무나 당한 것이 많아서, 그 분노가 가득 차올라 어찌할 바를 모르는 평범한 아이죠. 나 자신과 사랑하는 숙모 삼촌만 빼면 이 세상에 그 누구도 신경쓰지 않겠다는, 다소 이기적인 모습을 보이기도 하고요. '힘이 있던 내가 행동에 나서지 않았다'는 이유로 일어난 삼촌의 죽음을 겪으며 피터는 죄책감, 책임감을 갖게 되지요.
반면 마일즈의 경우는 조금 달라요. 마일즈는 13살. 아직은 '어린이'라고 불러도 이상하지 않을 어린 나이입니다. 초반부 마일즈는 엄마 아빠 손에 이끌려 명문학교 브루클린 비전 아카데미에 입학할 사람들을 뽑는 추첨식에 갑니다. 딱히 마일즈 본인이 적극적으로 이 학교에 가고 싶다거나 하는 모습은 보이지 않아요. 그저 엄마 아빠가 하자는 대로 따라 하는, 이 나잇대 아이들이라면 응당 그럴만한 수용적이고 수동적인 모습을 보이지요. 정작 자신의 번호(운명의 숫자 42)가 뽑혔을 때도 그리 기뻐하는 표정이 아닙니다. 마일즈의 눈에는 "추첨에 뽑히지 않은 또래 아이들"의 슬퍼하는 얼굴이 비춰지고, 소외된 아이들을 걱정해주는 상냥한 마음씨를 보여줍니다. 그래요, 마일즈는 참 다정하고 상냥한 아이예요.
글쎄, 마일즈가 초능력을 갖게 됐다는 걸 깨닫고 가장 먼저 의식적으로 행동에 나선 일이 뭔줄 아세요? 소방차가 빵빵대며 지나가는 걸 보고는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곧장 현장으로 뛰어가서, 절친 강케의 응원을 받으며 불 난 건물로 뛰어들어가 사람을 구하는 거였어요. 원조 피터 파커는 돈을 벌기 위해 레슬링 시합에 나가는 거였죠. 마일즈가 직감적으로 '착한' 사람이라는 걸 말해주고 있어요. 피터와는 달리 환경적으로 어려움에 처해있지 않고 몸과 마음 둘다 건강하게 자란 아이라서 그런 거겠지요.
초능력을 갖게 된 피터 파커의 원동력이 분노였다면 마일즈의 경우는 두려움과 혼란입니다. 아직 나이가 너무 어리니까 갑작스럽게 찾아온 변화에 당황하고 겁을 먹어요. 슈퍼히어로나 슈퍼빌런의 초능력 행태에 부정적인 시각을 갖고 있는 아버지 밑에서 자란 영향이 분명히 있어요. 뮤턴트를 두려워하고 꺼리는 사회 풍조도 있고 말이에요. 결국 마일즈는 힘을 갖고도 아무 일도 하지 않기로 결정합니다. 그렇게 원하는대로 평범하게 예정대로 브루클린 비전 아카데미에 입학해 평범한 남학생의 일과를 보내는 마일즈에게, 뜻밖의 소식이 들려옵니다.
스토리아크 정중앙 이슈 3편 마지막 페이지에 위치한 장면인데요, 이게 아주 일품입니다. 아메코믹스는 보통 발매 2~3달 전부터 발매 계획이 발표되며 작품 프로모션 작업이 이루어집니다. 그러니까 이 이슈가 발매되기 몇 달 전부터 팬들은 얼티밋 피터 파커가 사망한다는 사실을, 마일즈가 새로운 스파이더맨이 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던 겁니다.
피터와 마일즈가 겪는 사건들을 시간 순서대로 일직선상에 나열해본다면 이런 그래프가 나올 거예요. 피터가 아직 살아서 활동하고 있을 때 처음 거미에 물린 마일즈. 그대로 일상을 보내다가 피터 파커의 죽음이라는 사건이 벌어지고, 이 순간 이야기는 독자가 머릿속으로 인지하고 있는 시간대까지 따라잡습니다. [지금부터가 중요해요 여러분! 모두 주목해요!]이라고 네온사인이 번쩍번쩍 빛나는 것만 같은 느낌을 받아요. 피터 파커와는 별개로 진행되던 마일즈의 서사가 스파이더맨이라는 층위로 올라가 서사를 이어받게 되는, 모두가 기다려왔던 순간이지요. 독자가 인식하는 "현재" 시간대에 도달하는 순간이 매우 드라마틱하고 리얼하게 쓰여져 있다고 평해요. 스파이더맨이 총에 맞았대. 총알 세례를 그렇게 받아도 매번 날쌔게 피하던 슈퍼히어로가 총에 맞았대. 미국에서 매일매일 비일비재하게 들려오는 사건사고이기 때문에 더더욱 위기감은 실감나게 다가오죠.
13살 마일즈에게는 두려움에 기인해 일상의 평범함을 누리고자 하는 나이브함이 있었는데, 그 두려움을 넘어서서 행동에 나서게 하는 계기가 바로 죄책감이에요. 그리고 피터 파커의 장례식날 그웬 스테이시의 입을 통해 간접적으로 피터 파커가 왜 스파이더맨 활동을 했는지 그 이유를 전해들어요. "큰 힘에는 큰 책임감이 따른다"라는 좌우명도 듣게되지요. 벤 삼촌의 죽음과 죄책감이 피터의 동기가 되어주었듯이, 얼티밋 피터의 죽음과 죄책감이 마일즈의 동기가 되어줍니다.
비교하자면요, 피터 파커의 오리진은 정말 다신 없을 정도로 아름답고 시적이라서 마일즈의 오리진은 그에 미치진 못하는 것 같아요. 죅금은 아쉬워요. 아무래도 (피터는 벤 삼촌의 죽음에 그랬던 반면) 마일즈는 피터의 죽음에 직간접적으로 관여한 것도 아니고, 이미 벌어진 일을 뒤늦게 목격한 것뿐인걸요. 하지만 마일즈가 2대 스파이더맨이 되는 데에는 전혀 지장 없는, 충분한 정도의 접점이라고 생각합니다. 정말 아쉬운 건 그거죠. 작가 벤디스의 스토리텔링 방식에 대한 불만이 있어요.
앞서 언급했던 워싱턴 포스트의 데이비드 베탕쿠르는 마일즈가 아프로라티노 스파이더맨이라는 것을 듣자마자 머릿속에 가장 먼저 떠오른 질문이 이거였다고 합니다. "이 녀석 스페인어는 할 줄 알까? 그랬으면 좋겠는데!" 솔직히 저 같아도 당연히 그런 생각 할만 하죠. 한국인 슈퍼히어로 '화이트 폭스'가 정식으로 솔로 코믹스 단편이 나왔을 때 "눈 코 뜰 새 없이 바쁘다"라는 한국어 표현이 영어로 직역해서 나온 걸 보고 얼마나 기뻤는데요. 내가 속한 집단의 문화가 내가 좋아하는 매체에 실려서 표현된다는 건 크나큰 즐거움이에요. 이야기에는 파급력이 있으니까요.
그런데 벤디스는 다소 마일즈의 모든 걸 피상적으로 그려내는 편입니다. 이 이야기에서 마일즈라는 사람을 다른 그 어떤 캐릭터와 치환해도 달리 문제가 없을 것 같을 정도니까 말 다했죠. 왜 이렇게 느꼈느냐. 마일즈가 스페인어를 구사하는 장면을 넣기는 커녕, 마일즈의 민족적/인종적 유산을 반영한 장면이 전무하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정체성은 그를 둘러싼 환경과 집단과의 관계를 빼놓고 논할 수 없는데, 마일즈의 캐릭터라이제이션은 그런 부분이 쏙 빠진듯 해서 어딘가 공허해요. 뭐 대단한 걸 해달라고 하는 게 아니에요. 갑자기 조국을 향한 애국심에 심취해 푸에르토리칸의 국가를 불러야 된다 이런 거 말고요. 음료수 하나를 마셔도 아프로라티노 가정에서 흔히 마시는 음료 브랜드를 마시는 장면을 넣을 수도 있겠고요. 그런 거예요. "공감"을 불러일으킬 수 있는 장면이 필요했다고 생각해요.
저는 무슨 생각까지 했냐면, 마치 마일즈를 향한 백래쉬(위에서 언급했지요?)를 의식한듯이, 정치적으로 읽어낼 수 있는 모든 여지를 제거한 것 같더라고요. 혹은 유대계 백인인 작가 본인이 POC의 이야기를 쓰기엔 당사자성과 진정성(authenticity)이 부족해서 겁을 먹은 걸까 싶네요. 왜냐면 제가 거의 유일하게 읽은 엑스맨 타이틀에서 벤디스가 키티 프라이드의 입을 빌려 유대인 정체성에 대한 당당하고 자신있는 연설을 써놓은 걸 굉장히, 굉장히 인상 깊게 기억하고 있거든요. 그러니까 "이런 걸 못하는 작가가 아닌데! 못한 게 아니라 안 한 거다!" 라는 겁니다.
심지어는 제시카가 닉 퓨리가 만들어준 쫄쫄이 수트를 건네줄 때 하는 말조차 대충 얼버무리는 거 아니겠어요. 왜 마일즈가 흑인 커뮤니티와 라티노 커뮤니티를 대표한다는 말을 하질 못하는 거야! 왜 마일즈의 대표성을 묘사하기조차 무서워하는 거냐고! 답답.
마일즈의 문화적 공동을 영리하게, 유의미하게, 상징적으로 맛깔나게 채워넣은 결과물이 바로 2018년 영화 <스파이더맨: 뉴 유니버스> 되시겠습니다. 제가 예전에 영화 리뷰를 써놓으면서 자세히 써두었어요. 영화와 원작이 어떤 유사점과 차이점을 갖고 있는지 살펴보는 것도 재밌는 독서방법이랍니다.
꼭 아쉽기만 했던 것은 절대 아니에요. 제가 벤디스의 스타일 중에 가장 좋아하는 점은, 페이지 곳곳에 위치한 대화들이 어느 미국 가정의 홈비디오에서 들려나오는 대화라고 해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로 아주 생생하고 리얼하게 잘 쓴다는 점이에요. 그리고 (원서서의 경우) 단어 수준도 상당히 쉽고 문장이 무척이나 잘 읽힙니다. 외국인 독자로서는 이거만큼 고마운 특색이 또 없어요. <스파이더맨: 마일즈 모랄레스는 누구인가?>는 그러한 장점이 정말로 돋보이는 작품이에요.
정말 PS5 게임 발매가 얼마 남지 않았네요. 지금 시점에 마일즈의 책을 사서 오리진을 미리 예습해둔다면 게임을 200퍼센트 즐길 수 있을 거라고 단언합니다! 저는 영화를 그런식으로 500% 즐겼으니까요 ^^ 저는 게임기는 없지만 게임기가 있는 친구에게 게임패키지를 선물해서 내용을 들어볼 예정입니다. 과연 코믹스와 영화를 어떻게 레퍼런싱 삼아서 재해석해놨을지 기대되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