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상파 화가들의 전시가 열리고 있었다. 세잔의 정물화를 보러 전시장을 찾았다. 풍경화가 다였다. 아쉬움을 감출 수 없이 허탈했다. 세잔의 사과, 나는 그것을 봐야만 했다.
시각디자인과 전공 수업을 들은 적 있다. 일러스트레이션 수업이었는데, 교수님은 한 가지 물체를 수십 번 그려보라고 했다. 물체를 단순히 보는 게 아닌 집요하게 관찰해 그 본질을 파악하라는 거였다. 교수님이 말하는 본질이란 원기둥과 구, 육면체, 월뿔 등 물체가 지닌 고유의 형태를 뜻했다. 그리곤 세잔 얘기를 했다. 세잔은 온전한 사과를 그리기 위해 관찰 또 관찰하며 40년의 시간을 썼다고 했다. 교수님은 매시간 말했다.
"세잔, 세잔, 세잔……."
사과는 내게도 익숙했다. 그림을 시작한 이후로 정물화를 그릴 때마다 빠지지 않는 소재였다. 사과를 그리는 건 어려웠다. 새빨간 것도 아니고, 주황색도 아니면서, 옅은 초록이 있고, 황색도 띄었다. 어두움 아래에는 반사광이 있어 빨갛거나 까만 게 아닌 연하고 비릿한 초록과 보라색을 써야했다.
내 사과는 설익었다가, 귤처럼 변하기도 했고, 어둠을 과하게 표현하다 그을리기도 했다. 속이 타고 있었다. 갈피를 잡기 어려웠던 건 선생님마다 사과를 그리는 방식이 다른 이유도 있었다. 한 선생님은 붉은색으로 하이라이트를 남기며 큰 세로획 터치를 썼고, 다른 선생님은 노란색으로 점 같은 가로획 붓질을 했다. 저마다 다른 특성에 주목한 결과였다.
세잔처럼 40년은 아니지만 40번은 넘게 그렸을 거다. 내게 맞는 스타일을 찾아, 사과를 빨갛게 익게 하기위해. 선생님들의 스타일을 따라 하기도, 둘을 섞기도, 나름의 붓질을 하기도 했다. 그릴수록 사과는 탐스러워졌지만, 찰나의 손짓에 썩어버렸다. 미처 의식하지 못하는 그 찰나. 선생님들은 사과를 내 그림의 옥의 티라고 칭했다.
교수님은 우리에게 한 학기동안 그릴 물체를 정하라고 했다. 나는 사과를 그리기로 했다. 단 한 번도 사과 같은 사과를 그려본 적 없으니 ‘이번만큼은’하는 생각이었다. 예쁘고 고른 사과 한 알을 샀다. 시간이 지나 썩어 문드러질 때까지 관찰하기로 했다. 보이지 않던 게 보였다. 사과는 단순 구 형태가 아니었다. 윗면이 납작한 원기둥 같기도 했고, 아래로 갈수록 좁아지는 게 원뿔을 뒤집어 놓은 것도 같았다. 나는 사과를 뜯어보며 가로와 세로의 곡선을 그렸다가, 무늬에 집중해 묘사만 하기도, 칸칸이 색을 나누어 각기 다른 색을 칠하기도 했다. 선생님들의 사과가 왜 저마다 다른 모습이었는지 알아가고 있었다.
사과는 늘 같았다. 내 그림 속에서는 작은 손놀림에도 썩고 짓물렀는데, 현실 속 사과는 상온에서 한 달이 지나도 달라지지 않았다. 차라리 썩어주길 바랐다. 새로움 없이 같음을 들여다보는 건 지루한 일이었다. 더 이상 관찰할 것도, 그릴 것도 없었다.
‘본질은 무슨, 사과는 사과일 뿐이지.’
그림 그리던 종이를 치우고 사과를 베어 물었다. 귀와 목이 따가웠다. 나는 사과 알레르기가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