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동네 식당에 파스타를 먹으러 갔다. 파스타를 고르고 간단히 마실 맥주를 고르려는데, 어? 이거 왜 이만 원이나 하지? 참나 맥주가? 너 뭐 돼? ㄴ...내..추럴..맥주?
이 맥주의 이름은 '팀머만스 람빅 블랑쉐'. 와인의 이름이 그렇고 커피의 이름이 그렇듯. 이 맥주도 긴 이름을 통해 맥주가 어디에서 왔고, 어떤 스토리가 있는지, 무슨 특징이 있는지를 알 수 있다.
팀머만스 : 1781년 벨기에의 팀머만스 가문이 세운 양조장으로,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람빅 양조장.
람빅 : 벨기에를 중심으로 생산되는 자연 발효식 맥주.
블랑쉐 : 벨기에에서 호가든이나 셀리스 화이트등 벨기에식 밀맥주를 지칭할 때 쓰는 용어
그러니까, '팀머만스 람빅 블랑쉐' 라는 이름은 팀머만스 양조장에서 만든 자연 발효 벨기에식 밀맥주라는 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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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은 라거인가, 에일인가?
맥주는 발효 방식에 따라 두 종류로 나뉜다. 에일과 라거. 에일은 효모가 맥주의 상면에서 발효되며, 바디감이 진하고 과일이나 꽃 향처럼 풍부한 맛과 향이 느껴진다. 반대로 라거는 효모가 맥주의 바닥에 가라앉아 발효된다. 가볍고 청량한 맛과 강한 탄산이 특징. 우리나라의 맥주 대부분이 라거에 해당한다. (앗, 지금 떠오르는 캐치 프라이즈 하나. '이 맛이 청정 라거다!')
앞에서 말한 자연 발효식 맥주 '람빅'은 에일도 라거도 아니다. 에일과 라거는 정제된 효모를 이용해 만드는데, '람빅'은 대기 중에 떠다니는 찐 야생! 날것의 효모와 박테리아를 사용하기 때문. 그러면 아무데서나 막 '람빅'을 만들 수 있냐? 놉! '람빅'의 효모는 벨기에의 일부 지역에서만 얻을 수 있다. 오직 벨기에에서만 '람빅 맥주'가 만들어지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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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람빅 맥주'가 비싼 이유
'람빅'은 효모 뿐만 아니라, 양조 과정도 다르다. 일반적인 맥주는 정제된 효모 외에 다른 효모가 침투하지 못하도록, 맥주를 발효통에 넣어 공기를 차단한다. 그럼 '람빅'은?'일반 맥주의 정해진 틀을 거. 부. 한. 다.'
'람빅'은 맥아즙을 발효조에 펼쳐놓고 하룻밤 동안 대기 중에 노출시킨다. 이때 공기 중에 떠도는 야생의 효모들이 내려앉아 1차 발효가 이뤄진다. (이 때문에 람빅 양조장에서는 내부에 생긴 거미줄이나 곰팡이도 치우지 않는단다. 찐 야생....) 1차 발효가 끝나면 오크 나무 통에 넣어 또다시 발효시킨다. 무려 6개월에서 3년까지.
또 일반적인 맥주는 양조 과정에서 아로마를 살리기 위해 신선한 홉을 사용한다. 그런데 또 또 또 '람빅'은? 거의 죽다시피한 묵힌 홉을 이용한다. 홉이 가지고 있는 풍미를 없애고, 홉의 특징인 방부 효과만 챙기는 것. 홉이 맥주의 부패를 막는다는 건 중세시대 수도원에서 발견된 특징인데, '람빅'은 이 점을 이용해 6개월이 넘는 기간 동안 맥주를 부패 없이 발효시킨다.
자연 효모도 잡아야지, 1차 발효도 해야지, 양조장 청소도 마음대로 못해, 긴 시간 발효시키다 보니 자칫 상해버릴 수도 있고, 자연환경에 따라 그때그때 맛도 달라지고, 생산량도 한정적... '람빅'은 여러모로 비쌀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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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람빅' 무슨 맛이지?
람빅의 맛은 하나로 정의할 수 없다. 전문가들은 람빅의 풍미를 마구간, 먼지 쌓인 다락방, 오래된 가죽 등으로 표현한다. (쿰쿰하고 꼬릿한 향이 강한 모양. 커피에서도 원두를 발효시키면 쿰쿰한 된장 향이 난다)
'람빅'은 람빅의 원액끼리 혹은 과일과 블렌딩 하며 다양한 종류를 만들기 때문에, '람빅'에 입문할 때는 거부감이 없도록 과일 블렌딩이나 설탕을 넣어 만든 맛 먼저 보는 게 좋다.(내가 이번에 마셔본 람빅에도 설탕이 들어가 있다)
'람빅' 마신 썰 푼다
내가 마셔본 '람빅'은 서두에서 말했던 '팀머만스 람빅 블랑쉐'. 입구를 메운 코르크마개와 전용 잔을 보면 자연스레 화이트 와인이 떠오르는데, 맛 또한 와인 같았다. 호기심에 한 입 머금자마자 터지는 탄성. '와....!' 이건 맥주인가 샴페인인가? 어떻게 맥주에서 이런 향미가 날 수 있지?
탄산은 강하지 않지만 오밀조밀해 입안에서 톡톡 터지는 느낌이 좋다. 질감은 가볍고 청량. 여기에 복숭아와 자두, 허브의 향이 촤악 퍼진다. 상쾌한 산미가 인상적. 눅눅한 여름에 마신다면, 습기를 모두 날려버릴 듯한 맛이다. 다양한 맛이 느껴지는 것과 달리, 끝 맛은 또 아주 깔-끔.
평소 편의점에서 수입맥주를 살 때면 꼭 고르는 맥주가 있다. '블랑, 에델바이스, 호가든, 블루문' 이 제품의 공통점은 아로마 향이 난다는 건데, 알고 보니 이 맥주는 모두 벨기에식 밀맥주로 분류된다. 벨기에식 맥주란, 맥주에 보리, 밀, 홉 외에 각종 허브와 향신료를 넣어 만든 맥주를 말한다.(이와 대척점에 있는 게 독일식 맥주. 과거 독일에는 맥주는 오직 보리, 밀, 홉만 사용해 만들어야 한다는 이른바 '맥주 순수령'이 있었다.)
덧붙여 네 개의 맥주에는 공통적으로 오렌지 껍질과 고수 씨앗이 들어가는데, 이번에 맛본 '람빅 블랑쉐'에도 오렌지 껍질과 고수 씨앗이 들어갔다? 뭐지? 이러면 내가 좋아할 수밖에 없잖아!!!!
'람빅'은 유럽에서 문화유산급 대우를 받는다. 지구온난화로 인해 '람빅'의 1차 발효시 적합한 온도를 맞추기 어려워졌다. 생산량은 떨어지는데 6개월~3년간 숙성을 시켜야 한다면? 멸종각... 또 전 세계적으로 라거에 대한 선호도가 높아지면서 '람빅'을 찾는 사람이 적어져, 맥이 끊어질 뻔했단다.
현재 EU에서는 벨기에에서 전통 방식으로 만들어진 람빅 맥주에 TSG(Traditional Speciality Guaranteed) 인증을 주고 있다.(설탕을 넣지 않고 찐! 전!통! 방식의 람빅에만 해당 인증 마크를 주는 듯하다)
맥주의 탄생은 신석기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기나긴 역사에 비해 맥주의 종류가 적다고 느꼈는데, 내가 몰랐을 뿐 다양한 맥주가 있었구나. 이번에 맛본 '람빅'은 입문자를 위한 맛이었으니, 다음에는 TSG인증 마크를 받은 꼬릿꼬릿하고 쿰쿰한 다락방 맛 '람빅'을 마셔볼까?
참고자료
[H의 맥주생활 (22)] 라거도 아니고 에일도 아닌, 자연이 만든 맥주 ‘람빅’ㅣ2017.02.17ㅣ동아사이언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