벌거벗은 나를 사랑할 수 있는가.
정원을 가꾸는 사람이 될 것인가,
건물을 세우는 사람이 될것인가?
나는 일하고 싶을때 일하는 불량 자영업자이자,주부, 작가지망생, 반백수이다. 나를 설명할 건덕지는 여러개가 되지만 어디를 나가면 그냥 나는 무직이라고 말한다. 대부분 나와같은 나잇대 아줌마가 집에 있는다고 하면 가정주부겠거니 하지만 나는 내자신을 딱히 가정주부의 범주에 넣고싶지 않다. 가정주부라고 한다면 남편과 아이에게 가정에 그저 어디에 '얽메이거나 속한' 사람이 되는것 같아 그저 나를 무소속 인간이라 칭하고는 한다.
그간 나는 무엇이 되기 위해 어딘가에 소속되기 위해 여기저기 부지런히 문을 두드렸다. 치열한 대한민국 하늘아래 뭐하나 특출나게 내세울것 없었던 나는, 그나마 내 노력으로 팔수 있는 것은 반듯한 직장에서 나오는 직함과 이름이 새겨진 명함뿐이었기 때문이다.
10대 때는 가수가 되고싶어 중학교때부터 중소형, 대형 기획사 오디션에 도전해 수십번 낙방했고, 20대가 되어서는 연영과 입시 불합격, 대기업 서류 광탈, 1지망 대입시험 불합격 , 기자/아나운서 시험 최종탈락, 그나마 어렵게 들어간 중소 방송사에서도 방송을 너무 못한다는 이유로 한달만에 벚꽃이 흐드러지는 청청한 3월에 해고 통보를 받기도 했다. 실패에 익숙해지다 보니 어느덧 대한민국에서 나는 제법 삽질좀 하는 사람이 되어 있었다.
문송합니다.
그러다 2010년대 최악의 취업난이 닥쳤다. 당시 취업난은 그 유명한 '문송합니다'를 만들어 냈고, 언론고시를 준비하느라 혼기처럼 꽉찬 내 취업 적정 나이 마지노선이 간당간당 해지고 있었다. 20대 중후반 문과인 나는 더이상 갈곳이 없었다. 그때 집에서 서서히 압박이 들어오기 시작한것이다.
그때 나는 계약직으로 공기업 홍보실을 다니고 있었지만 겨우 백만원 벌까말까한 그 직장이 아버지 눈에는 그저 허송세월을 하고 있는 것으로 보였을 터이다. "직장이고 뭐고 다 때려치고, 공무원이 잘릴 걱정도 없으니 당장 공무원이나 준비해!!" 그렇게 호랑이 같던 아부지와 내 진로사이에 팽팽한 줄다리기가 시작되었다. 세상과 싸우는것도 힘든데 이제는 아군과도 싸워야 한다니. 힘이 빠졌다.
더 무서웠던것은 아직 27살에 불과했던 내가 점점 자신감을 잃어가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때 나는 모아놓은 돈은 커녕 학자금 대출금에 취준생 신분이었고, 그나마 위안이 되었던 3년동안 사귄 남친도 삼성에 취직이 되더니 바로 나를 차버렸다. 여자로서의 인생은 이제 끝이라는 생각이 점점 떠나질 않았다. 평생 이렇게 계약직만 전전하면서 살면 어떡하지라는 막연한 두려움이 밀어닥쳤다.
" 공무원 시험 준비 할게요. 아버지." 눈이 펑펑 오는 새해 첫날 온가족이 김이 펄펄나는 떡국을 먹으며 나는 그렇게 아빠에게 백기를 들었다. 왜서인지 눈물이 떡국에 수제비 얹듯 그렇게 뚝뚝 떨어졌다. 새해가 지나고 나는 추운 겨울애 고시원에 들어갔고, 2년을 꽉채워 준비한 끝에 어렵게 공무원이 되었다.
여기가 진짜 신의 직장 맞나요?
9 to 6 편하게 일할수 있을것이라던 내 얕은 생각은 산산히 부서졌다. 신의 직장이라고 소문난 그곳은 워라벨은 커녕 하루종일 밀려드는 민원인들로 쉴시간 하나 없었고, 산불근무에 기상악화라도 되면 휴일이고 주말이고 나발이고 없이 항상 대기조에 출근을 해야했다.
세상이 떠들었던 공무원 찬양론의 그것과는 전혀 딴판이었다. 거기에 타지에서 갑자기 온 나를 아니꼽게 봤던 직장상사는 매일 오탈자 하나와 띄어쓰기 문서순서가 바뀌었다는 이유로 나를 갈궜고, 가뜩이나 낮았던 내 자존감은 바닥을 쳤다. 잊을만하면 공무원 자살 기사가 계절과 상관없이 캐럴처럼 들려왔다. 나역시 언젠가 뉴스속 주인공이 되지 않을까 라는 무서운 생각이 하루하루 스쳤다. 거기에 매일 만성 스트레스로 속쓰림과 소화불량, 두통, 공황장애와 우울증이 도미노처럼 찾아왔다.
그때 이후로 나는 휴직을 내고 3년동안 인간관계를 모두 끊고 세상과 단절한채 지냈다. 난생 처음 정신과 치료와 심리치료를 받았다. 내면의 화가 임계점을 넘어 끓어올랐다. "세상이 대체 내게 왜이러지??" 그때 아빠가 나를 갈구지만 않았어도, 하필 그때 공무원이 뜨지만 않았어도. 내가 조금만 깡이 있었어도 모든것은 달라졌을까. 수도없이 생각을 해봤지만 물음은 쉽게 사라지지 않았다. 내 모든 미움은 외부로 향해있었고 그럴수록 내면의 마음 구멍은 더욱더 커져갔다.
내자신이 되는 것이 두려워
매일 남의집 앞에서 문을 두드렸다.
3년동안 두문불출하며 나는 내자신과 많은 대화를 나눴다. 마음공부와 불경공부를 시작했다. 그리고 나서 깨달은것은 내자신과 맞서는 것을 절대 두려워 해서는 안된다는 것이었다. 나는 이제껏 그저 내 자신과 떳떳히 맞설수 없었기에 도피해왔던 것이다. 담이 높은 으리으리한 대감집 같은 타인의 집앞에서 그저 서성였던 것이다. 저 직업이 괜찮아 보여서, 멋있으니까. 저 직업이라면 나를 대변해줄수 있을것 같아서, 남의 집앞에서 하염없이 문을 두드렸기에 문은 열리지 않았고, 누구보다 무엇이 되려 했지만 무엇이 되지 못했다. 그렇게 하염없이 두드리다 뒤돌아 보니 만신창이가 된 내가 서있었다.
생각보다 사람들은 내가 원치 않는것은 잘 아는데
내가 진짜 원하는 것은 잘 모른다.
공무원만큼은 절대로 안될거야! 라고 말했던 나는 확실히 원치않는 것은 알았지만 진짜 내가 무엇을 원하는 지는 몰랐다. 그래서 그렇게 피하고만 싶었던 엉뚱한 길로 갔다. 많은 기회비용과 인생 교훈을 얻고 나서야 나는 알게 되었다. 내가 좋아하고 원하는것이 명확해야 한다는 것을. 그리고 그것이 내가 무소속으로 흘러가는 시간을 오롯이 견딜 수있는 힘이라는것을 . 우리는 꼭 한번씩 나와 결판 지을 침묵과 어둠의 시간을 가질 필요가 있다는 것을.
만일 내가 그때를 다시 산다면, 이렇게 말해 줄 것이다.
첫번째, 무소속의 시간을 즐겨볼 것이다. 그때의 나로 돌아간다면 좀 덜 불안해하고, 내 자체를 신뢰해볼 것이다. 타이틀이 주는 단단함 대신 무소속이 주는 모호함을 견뎌 볼것이다. 그리고 진짜 내가 원하는것이 무엇인지 끝내 찾아낼 것이다. 무소속의 시간은 내가 누구인지 내 장점과 적성은 무엇인지 알아 갈수있고, 인생을 내가 원하는 방향으로 선수(船首)를 돌려놓을 최적의 시간이다. 그 시간을 견딘다면 우리는 진짜 무엇이 된다. 그것이 어떤것이라도 그것이 된다.
도전해보고 실패해보고 비로소 알게되는 그 과정을 절대로 흘려보내서는 안된다. 대한민국은 실패에 너무 냉혹하다. 어떤것을 중단했을때 사회, 조직부적응자라고 칭하거나 나약한 사람으로 치부한다. 어떤길로 가기 위해서는 경험해보지 않고서는 절대로 알수 없는 것들이 많다. 그 과정에서 실패는 자연스러운 과정인데도 말이다.
두번째, 경솔하게 직업선택을 하지 않을 것이다. 우리는 얇은 면티셔츠 하나를 살때도 수많은 상품평을 보고 구매를 한다. 소재는 부드러운지 따가운지, 색깔은 어떤지, 실물과 같은지 몇천원짜리 티한장을 살때에도 우리는 그렇게 다면평가를 한다. 하지만 정작 평생을 몸담아야할 직업을 선택할때는 그런 과정이 많이 생략된다.
대외적으로 연봉이 높으니까 멋있어 보여서, 부모님이 좋아하시니까와 같은 직업의 단선적인 면만을 보고 택한다. 실제로 들어가보면 딴판인 경우가 많은데도. 직업은 반품도 안된다. 진짜 이 길을 신뢰하고 좋아하지 않는다면 언제든 그 길은 언젠가는 끊긴다. 정말 내 길이 맞는지 실제 내 적성과 맞는지. 직업을 선택할때에도 신중하고 꼼꼼히 따져볼 것이다.
세번째, 사회적으로 정해놓은 숫자에 연연하지 않을것이다. 생각해보면 27살은 무엇이든 시작하기 좋은 나이였다. 직장이 없다는 이유로 나를 차버린 남자친구 때문에, 주변 시선 때문에 나는 나의 창창한 20대의 가능성, 새롭게 시작할 가능성을 너무 많이 숫자에 묶어두었다. 사회적으로 금을 쳐놓은 숫자는 내가 다시 지우고 시작하면 거기서부터 새로운 카운팅이 시작된다. 30대건 40대건 누구든 새롭게 시작할수있다.
넷째, 남이 뭐라하건 신경쓰지 않을 것이다.
나는 내자신을 변호할 권리가 있다는 것을 가끔 망각할 때가 있다. 내면의 소리보다는 타인의 한마디가 더 깊숙이 파고든다. 저 사람이 이러면 어떡하지 저러면 어떡하지 왜나에게 이런 말을 했을까 너무 많이 곱씹다보니 어느새 타인은 나에게 적이되었다. 괴물이 되었다. 가끔 멘탈이 약해질때는 아무리 남이 뭐라고 하건간에 항상 "그래서 어쩌라고"를 마음속에 품고 다닌다. 불교에서는 마음에 바람이 불때마다 "이뭐꼬?" 라고 한다. 이것을 좀 변형해봤다. 너무 극단적인 방법이지만 타인과 나의 바운더리를 강하게 하고, 나를 지킬수 있는 효과적인 방법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조건적으로 나를 대하지 않을것이다. 백수여도 무소속이어도, 아무것도 아니어도 나를 사랑할 것이다. 가끔 나는 내 아이에게 유치원을 잘가면 오늘 장난감을 사줄게, 학습지를 하면 사탕을 사줄게. 라는 말들을 내뱉고는 소스라치게 놀라곤 한다.
나에게 걸었던 조건들을 자식에게도 똑같이 걸고 있었던 것이다. 그럴때마다 나는 이렇게 정정한다. 오늘은 유치원 가고싶으면 안가도 돼. 그치만 내일은 꼭 가야해. 이건 약속이니까 지켜야 되는거야! 조건 대신 자신의 행동에 책임을 질수있도록. 아이의 행동자체를 신뢰하고 사랑해주려고 한다. 그리고 나역시 그럴수 있도록 스스로에게 가르치고있다. 배움은 끝이 없기에 오늘도 나는 내 자신이 되기위해 이렇게 무소속의 시간들을 견디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