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대미문한 이 바이러스로 인해, 역대급으로 우울하고 외로운 크리스마스를 맞아, 친구들과 작은 이벤트를 벌였다. 이름하야 '시크릿 산타'. '마니또 크리스마스 에디션'이라고나 할까. 아직은 크리스마스와 연말연시가 설레는 파릇파릇한 20대라, 작은 이벤트가 지루한 일상에 활기와 설렘을 불어넣어 주었다.
나는 사랑하는 친구에게 별다방 텀블러를 보내주었고, 내 시크릿 산타는 무언가 의미심장한 제목을 가진 책을 선물했다.
<여자 둘이 살고 있습니다>라니. 이거 거의 무슨 프러포즈 아닌가?
출처) YES24
이쯤에서 '산타들의 모임'을 간단하게 소개해야 할 것 같다.
이후로는 편의상 나, 1번, 2번, 3번 산타로 칭하기로 한다.
네 명의 산타는 모두 같은 고등학교를 졸업했다. 여기까지는 그다지 특이할 것도, 재미있을 것도 없어 보인다.
음, 고등학교 동창 넷이 서로에게 크리스마스 선물을 챙겨주는 이벤트를 벌였군. 이게 전부다.
하지만 나는 이 모임이 꽤나 기묘하다고 생각한다.
우리가 '넷'이 된 건 고등학생 때가 아니다. 학교를 졸업한지 햇수로 3년차가 되어서야, '00고 쿼타'라는 이름으로 뭉치게 되었다. 내 입장에서는, 대학 가서도 계속 연락하겠다, 싶었던 친구와는 오히려 연락을 덜 하고, 상상도 하지 못했던 친구들과 매일매일 연락을 주고받고 있는 셈이다.
(그 중심에는 우리가 공통으로 가지고 있는 '취미' 또는 '흥미'가 있는데, 그야말로 구구절절한 사연이므로 다음에 따로 지면을 할애하기로 한다)
우리는 아직 언젠가 누군가 다른 마음(?)을 먹을 수도 있으니까애인보다는 친구가 좋은 20대 초반이고, 한 치 앞을 잘 내다보지 못하는 인간답게, 언젠가 우리가 경제적으로 안정되면 주거를 공유하자는 소소한 꿈이자 목표를 가지고 있다. 최근에는 '계'도 들었다. 이러한 이야기가 진심 섞인 농담으로 퍼져나가는 와중에 이런 책을 선물로 주다니, 이게 프러포즈가 아니면 무엇이란 말인가! 친구야 장난이야 알지?
'조립식 가족'이라는 말이 참 좋았다.
'생물학적 가족'에 실망하는 일이 자꾸만 늘어나고, 동시에 결혼이라는 제도에 대한 회의를 차곡차곡 쌓아가고 있던 와중에, 조립식 가족과 동거인 간의 관계를 활자로나마 엿볼 수 있어서 좋았다.
그래서, 친구들은 원하지 않을 수도 있겠지만, 그리고 사람 일은 아무도 모르는 거지만,
'우리가 조립식 가족이 된다면 어떨까?' 에 대한 행복회로를 마구 돌려보려고 한다.
결혼이라는 사회적 결합과 비교했을 때, '조립식 가족'의 가장 큰 장점은 무엇일까?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나는 '서로의 가족에 대한 의무가 생기지 않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2번 산타와 한 동네에 산다. 우리집에서 2번 산타의 집까지는 걸어서 5분이면 도착한다.
워낙 가까이 사는 덕에, 가끔 서로의 집에서 끼니를 해결하기도 한다. 때때로 찾아오는 그런 상황에서, 우리는 그저 서로의 부모님께 '감사'하면 된다. 진심에서 우러나온 감사합니다, 잘 먹었습니다, 한 마디면 된다. 식후에 과일을 깎아야 한다거나, 효도여행을 기획해야 한다거나, 아니면 철마다 값비싼 선물을 해야 한다거나 따위의 의무는 없다. (물론, 우리 중 누군가 진짜 마음에서 우러나와서 위에 언급한 행위들을 하는 것은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저 결혼이라는 제도가 부과하는 의무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은 것이다)
229쪽부터 시작하는 '우리는 사위들' 챕터에서 현재의 우리가 보여서 즐거웠다. 대 코로나 시대를 맞아 최근 우리는 '줌팅'으로 주로 만난다. 각자의 집에서 웹캠을 켜고 모임을 가지다 보니, 카메라 뒤편으로 가족 구성원들이 스쳐지나가기도 한다. 목소리로 찬조출연하는 경우도 심심치 않다. 그럴 때마다 우리는 김하나 작가님이 전화기 너머의 황선우 작가님 어머니한테 "어머니! 김치 너무 맛있습니다!"하고 소리쳤듯, "어머니! 안녕하세요!" 하고 소리치고는 한다. 20년 후에 나와 주거공간을 공유하는 동거인의 부모님께도 지금처럼 해맑게 '안녕하세요오오'하고 인사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두 동거인이 생활습관을 맞추어 나가는 이야기도 재미있었다.
사람과 사람이 주거공간을 공유하게 되면, 생활습관의 조립과 그 과정에서 일어나는 대립은 뭐랄까, 필요악 같다는 생각이 든다. 우리가 동거인이 되어도 그렇지 않을까? 우선 자정 언저리에는 잠자리에 들어야 하는 주제에, 주변 소리에 민감하기까지 한 나 때문에 수면 패턴을 맞추는 것부터가 꽤 큰 난관이 될 것 같다. 그 밖에도 삼시세끼에 대한 민감도나, 또 아직은 상상할 수 없지만 다양하고 사소한 것들에서 부딪힐 거다. 주거를 공유하는 순간, 우리는 더 이상 보여주고 싶은 모습만 골라서 보여줄 수 없을 테니까.
아, 그리고 우리 중에는 황선우 작가님 같은 요리사는 없지만, 뭐 설마 굶어죽기야 하겠나 싶다. 배달음식도 있고, 밀키트도 있고, 그래도 나름 집밥처럼 꾸며서 먹을 수는 있지 않을까?
259쪽부터 시작하는 '우리가 헤어진다면' 챕터도 인상적이었다.
어리고 미숙하던 시절에 주고받은 상처들로, 나는 꽤 최근까지도 사람을 사귈 때 '헤어짐'을 전제했다.
'평생 친구'라는 말을 믿지 않았으며, 나도 어찌할 수 없는 나의 단점들이 상대방 마음에 쌓이고 쌓이다 보면 언젠가는 그 사람이 나를 떠나게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실제로 나에게 있어 인간관계의 단절은 대부분 '버림'보다는 '버려짐'이었다.
다행히도, 현재의 나는 산타 모임의 해체를 전제하고 있지 않다. 이유는... 글쎄, 친구들이 너무 좋아서? 또는 나를 너무 좋아해줘서? 물론 서운한 적이 한 번도 없었다면 거짓말이지만, "별 것 아닌 농담에 웃고, (...) 기운 빠지는 하루의 끝에 나를 다독여 여전히 괜찮은 사람이라고 확인해주는 누군가를 또 만날 수 있을까 모르겠다"(262쪽). 친구들의 다독임에서 나는 매일매일을 살아갈 힘을 얻는다. 내가 이뤄내는 작은 성취를 시기하거나 깎아내리려 하지 않고, 진심으로 자기들의 일인 것처럼 좋아해준다. 그래서 나는 "우리에게도 끝이 언젠가 오겠지만, 최대한 미루고 싶다"(262쪽). 아니, 나는 아직 세상물정 모르는 20대니까, 우리에게는 끝이 오지 않기를 바란다.
한 사람이 진정으로 자부심을 가져야 할 것은
집 평수나 자동차 브랜드가 아니라 자신의 친구입니다.
그 친구가 얼마나 잘 나가는지, 얼마나 힘이 있는지가 아니라
친구가 얼마나 요리를 잘하는지
누구는 또 얼마나 잘 얻어먹는지
얼마나 잠을 잘 자고 얼마나 노래를 잘하며 얼마나
약지 못했는지
우리가 얼마나 많은 술을 마셨고 얼마나 어처구니없는
추억을 가졌는지
인생에서 진정으로 자부심을 가져야 할 것은 그런 것들입니다.
-김하나, 캐치볼 위클리의 정신, 책 25쪽에서 인용.
p.s. 지난주에 교보문고에 갔다가 <피프티 피플>과 <일인칭 단수>를 사 놓고 무얼 먼저 읽을까 고민중이었는데, 두 작가님이 <피프티 피플>을 좋아하신다고 해서 그걸 먼저 읽기로 했다. 오랜 고민을 끝내주심에, 두 작가님께 감사인사를 드리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