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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쓰는 러너 May 01. 2024

남자가 레깅스라니

달리기에 푹 빠진 2020년 겨울, 회사 선배를 만났다.


어떻게 그렇게 갑자기 살이 빠졌냐고 묻길래 요즘 달리기를 시작해서 매일 10km씩 달린다고 했다. 사람이 이렇게 달라질 수도 있느냐며 신기해하던 선배는 문득 중요한 말이 생각난 듯 말했다.


“혹시 정말 그럴 일은 없겠지만, 레깅스 같은 거 입고 뛰는 건 아니지? 공원에서 산책하다가 가끔 레깅스만 입고 뛰는 남자들이 있는데, 진짜 눈 뜨고 못 보겠더라. 그 인간들은 부끄럽지도 않나 봐. 당연히 그런 옷은 안 입겠지만 혹시나 해서 물어본 거야.”


 나는 펄쩍 뛰듯 황당해하며 말했다.

“레깅스요? 완전히 미친 거죠. 여자들이 입어도 민망한 그 내복 같은 옷을 남자가 어떻게 입어요? 제가 어떻게 그런 걸 입고 앞에 툭 튀어나온 채로 밖에 나가겠어요? 전 달리기를 좋아해도 그 정도까지 미치지는 않았어요. 절대로 그럴 일 없으니 걱정하지 마세요.”


 선배는 안심한 듯 재차 당부하듯 말했다.

“그렇지? 하도 세상이 이상해서 내가 괜한 소리를 했네. 혹시 모르니까 내 말 절대 잊지 마. 알았지?”


 나는 웃으면서 대답했다.

“선배님. 저는 절대로 레깅스 같은 이상한 옷 입고 안 달릴 테니 걱정하지 마세요. 진짜 다들 미쳤나 봐요.”     


 3년이 지났다. 달리면서 레깅스와 사랑에 빠졌다. 달릴 때 나는 사실 거의 레깅스만 입는다. 겨울용 기모 레깅스와 마라톤 대회나 특별한 도전을 하는 날에 입는 붉은색 대회용 레깅스까지 준비되어 있다.


 지금 다시 그 선배가 같은 질문을 한다면 나는 이렇게 말할 수밖에 없다.

“선배님, 죄송해요. 그래도 레깅스를 입을 거예요. 레깅스는 정말 달리는 사람들을 위한 옷이란 말이에요.”    

  

 처음에는 레깅스를 입을 용기가 나지 않았다. ‘도저히 이것만큼은...’ 이런 마음이었다. 레깅스를 입은 내 모습을 상상해 본 적도 없었으니까. 누가 2년 전 내게 레깅스를 입고 밖에 나가서 뛰라고 했으면 미쳤냐고 했을 정도였다.


 러너가 된 두 번째 겨울에 처음 레깅스를 샀다. 레깅스를 입고 나간 첫날을 기억한다. 여성들이 태어나서 처음 비키니 수영복을 입던 날처럼 너무 부끄럽고 신경이 쓰였다. 도저히 용기가 나지 않아 거울에 몇 번이나 몸을 비춰보다가 결국 반바지를 레깅스 위에 덧입고 밖에 나섰다.


사실 아무도 관심이 없었지만, 모두가 내 레깅스 입은 모습만 보는 것 같은 두려움과 착각에 빠졌다. 그런데 막상 입어보니 레깅스는 신세계였다. 기능적으로 완벽하게 몸을 잡아주어 달리기에만 집중할 수 있었다. 이미 천국을 맛본 다리는 거추장스러운 예전의 옷을 거부했다. 그때부터 나는 레깅스를 사랑하기 시작했다.


 2022년 4월 남성 레깅스 전문 브랜드에서 크루 기수 모집 공고가 떴다. 레깅스에는 관심이 없었지만 솔깃한 소식이 있었다. 기능성 건강제품업체와 제휴하여 선발되면 단백질 보충제와 레깅스 제품을 주고 최종 우승자에게는 파격적인 선물을 준다고 했다.


남성용 전문 레깅스는 부담스러웠다. 반바지가 필요 없도록 진화한 제품이었다. 과학적(?) 메커니즘으로 앞툭튀를 방지하고 Y존을 완벽하게 커버해 준다고 했다. 반바지를 못 입고 레깅스만 입고 나가서 매일 인증해서 SNS 올려야 한다니 내가 할 수 있을지 심히 염려스러웠다. 그 선배가 이 꼴을 보면 뭐라고 할지. 수치심과 탐욕의 힘겨루기가 계속되다가 결국 단백질 보충제가 레깅스를 못 입겠다는 수치심을 눌렀다.


 나는 3기 레깅스 크루에 선발되어 21일간의 인증 마라톤을 시작했다.      

매일 뛰고 있어서 운동 인증은 힘들지 않았다. 다만 레깅스만 입어야 하는 것이 문제였다. 반바지를 덧입지 않아도 부끄럽지 않도록 과학적인 기술을 적용했다는 특별한 레깅스만 입고 3주간 인증을 하는 일. 이게 보통 일인가 말이다.


그때부터 불안한 마음에 새벽마다 반바지를 입었다 벗었다 하는 혼자만의 레깅스 패션쇼가 진행되었다. 어느 날은 과감하게 레깅스만 입고 문을 나섰다. 혹시라도 아내의 눈에 띌까 두려워서 빠르게 움직였다.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엘리베이터를 타고 밖으로 나갔다. 어두운 새벽이라 사람들은 별로 없었지만 다들 내 흉을 보는 것 같아서 부끄러웠다. 부끄러움에 도망치듯 평소보다 더 빨리 달렸다.     


 어느 날은 결국 반바지를 입고 나갔다. 역시 마음이 편했다. 발가벗고 다니다가 옷을 입은 느낌이었다. 그렇게 한참 달리고 있다가 문득 레깅스 인증이 생각났다. 얼굴이 어두워졌다. 약속은 지켜야 했고 우승 욕심도 있었다. 매일 인증 포인트를 쌓아서 점수가 높은 사람이 우승하는 방식이라 하루라도 인증을 놓치면 포기해야 했다.


망설이다가 한 번만 양심을 속이기로 했다. 사람들이 드문 공원 구석에서 반바지를 벗었다. 마치 레깅스만 입고 나와서 뛴 것처럼 레깅스만 입은 내 모습을 찍어서 인증했다. 찔리긴 했지만, 나름대로 찾은 해결책이었다.     


 레깅스 인증에 겨우 적응할 무렵 새로운 제품이 도착했다. 레깅스 옆에 특이한 녀석이 있었다. Y존 커버 패드였다. 무엇에 쓰는 물건인고? 팬티를 안 입을 수 있도록 Y존 돌출을 방지하는 특수장비였다.


제품소개에 웃음이 났다. “여성의 브라 패드와 같은 원리를 적용하여 남성 Y존 부위 안쪽에 커버 패드를 장착할 수 있게 하였다. 물리적인 방어력을 갖추면서도 유선형의 젠틀한 쉐입을 유지함으로써 레깅스만 단독 착용하였을 때도 심리적인 안정감을 줄 수 있다.”    

 

 문득 페니스 케이스가 생각났다. 나체 또는 그에 가까운 상태로 살아가는 열대지방 원주민들이 사용하는 남성 성기에 씌우는 통 모양의 보호구. 가만히 방문을 잠그고 조심스럽게 그 녀석을 장착하고 레깅스를 입었다. 이게 무슨 일인지. 특수장비를 쓰기 전엔 아주 살짝 앞툭튀 느낌이었는데 커버 패드 자체의 입체감 때문에 왕 툭튀 느낌으로 바뀌었다.


아찔하다. 이건 도저히 못 쓰겠다. 노팬티로 이걸 장착하고 레깅스만 입고 나가서 “자. 여러분. 저 괜찮지요?”라는 사진은 못 찍을 것 같았다. 좋은 제품이지만 아직 몸과 마음의 준비가 되지 않아서 예전처럼 그냥 레깅스만 입고 인증하기로 했다.      


  2022년 5월, 드디어 10년 같던 3주간의 레깅스 인증이 끝났다. 우여곡절 끝에 나는 최종 1등이 되었다. 1등, 하하, 내가 1등이라니. 우승자의 상품은 대용량 단백질 보충제와 특별한 레깅스였다. 가장 눈길을 끈 것은 타오르는 불꽃같이 선명한 붉은색 레깅스였다. 제품 사진을 보고 너무 놀라서 담당자에게 전화를 걸었다.


“안녕하세요. 이번에 크루 챌린지에서 우승한 미니락인데요. 1등 상품에 빨간 레깅스가 있던데 맞나요? 그 색상은 제가 도저히 입고 못 다닐 것 같아서요. 죄송하지만 검은색으로 바꿔주실 수 있나요?”


 그가 당황해하며 말했다.

“죄송해요. 이미 경품으로 정해진 제품이라서 바꾸지는 못해요. 좀 튀어 보이기는 해도 착용감이 편해서 요가하시는 분들이 많이 입으시고 저희 대표님도 좋아하세요.”


 그렇게 문제의 레깅스가 내 앞에 도착했다. 유튜브 아이콘의 붉은색처럼 선명하고 시선을 사로잡는 녀석이었다. 결국 받자마자 옷장 서랍에 깊숙이 넣고 기억에서도 지워버렸다.     

 

 그 후 8개월이 지났다. 2023년 3월에 개최되는 동아 마라톤을 준비하고 있을 때였다. 곧 대회가 있어서 경기 당일 복장을 미리 준비해야 했다. 땀에 쓸리지 않도록 위에는 소매 없는 나시(싱글렛)를 준비했다. 밑에 입을 옷을 고민하다가 검은색 레깅스를 꺼내서 대회 때 입기로 했다.


 인스타그램 피드에 동아 마라톤을 준비하는 러너들의 복장 인증이 계속 올라왔다. 형형색색 러너들의 대회 옷차림에 눈이 휘둥그레졌다. 대회 복장은 무조건 화려해야 달리는 기분도 나고 사진도 많이 찍힌다는 러닝 선배들의 말이 그제야 이해되었다.     


 가장 화려한 옷을 찾기로 했다. 옷장을 열어보니 안쪽 구석에 타오르는 불꽃처럼 붉은색의 레깅스가 있었다. 소중한 보물처럼 꺼내서 입어봤다.

 ‘아! 그래서 네가 내게 왔구나.’

 마치 원주민들이 전투에 임할 때 자신의 몸을 선명하게 색칠하듯 강렬한 붉은색은 나를 사로잡았다. 부끄러워할 이유가 없었다. 레깅스를 입기로 한 것이 옷에 대한 금기를 넘은 사건이라면, 빨강 레깅스는 색에 대한 금기를 넘은 또 다른 혁명이었다.      

 대회 날 새벽 나는 빨강 레깅스를 입고 당당하게 버스에 올랐다. 나는 대회장으로 향하는 러너였고, 전투에 나가는 알록달록한 새의 깃털로 치장한 전사였다. 남들의 시선은 더 이상 두렵지 않았다.


그날부터 나는 대회에 나갈 때마다 빨강 레깅스를 꺼낸다. 삶에서 새로운 도전이 필요한 순간마다 빨강 레깅스를 입는다. 열정이 담긴 마법의 옷, 그 옷을 입고 나는 오늘도 세상을 향해 힘차게 달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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