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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쓰는 러너 Nov 08. 2024

가을의 위로


“위로의 표현은 잘 익은 언어를 적정한 온도로 전달할 때 효능을 발휘한다. 짧은 생각과 설익은 말로 건네는 위로는 필시 부작용을 낳는다.


상대에 대한 '앎'이 빠져 있는 위로는 되레 더 큰 상처를 주기도 한다. 상대의 감정을 찬찬히 느낀 다음, 슬픔을 달래 줄 따뜻한 말을 조금 느린 박자로 꺼내도 늦지 않을 거라고 본다. <언어의 온도. 이기주>”


SNS에서 누군가를 얼마나 아는지에 따라 위로의 표현이 달라진다. 상대에 대한 '앎'이 빠져 있는 위로는 공허하다. 누군가 DNF(Did Not Finish: 중도포기)를 하고, 부상을 입고 아파서 달리지 못하고 있다는 글에 함부로 댓글을 달기가 망설여진다.


물론 손쉽게 “금방 나아질 거예요. 파이팅!” 정도로 쓸 수도 있지만, 그가 느끼는 상실의 무게에 깃털 정도의 위로, 아니 위로가 될 수 있을지 의문이다.


그래서 위로는 어렵다.


말없이 안아주는 것이 말보다 나을 때가 있다. SNS는 너무 빨리 흘러간다. 누군가의 아픔도 잠시 고속도로에 스치는 차들의 잔상처럼 금세 사라지고, 멋진 몸과 맛있는 음식, 그리고 대회장의 화려한 장면들로 가득 채워진다.


왜 인스타그램에는 하트만 있을까.


세상이 사랑으로 가득하길 바라는 마음은 이해하지만, 어떤 글은 하트를 누를 수 없는 글이 있다. 누군가 아파서 속상하다는 글, 누군가를 추모하는 글에 무조건 하트를 달아야 하는 현실이 잔인하는 생각이 든다.


관심을 표현하려면 어쩔 수 없이 좋아요를 눌러야 하지만, 그러기엔 너무 아픈 글이 있다. 공감을 표현하는 방식이 무조건 하트나 좋아요가 되어야 한다는 SNS의 논리는 너무 거칠다.


마치 아픈 가족사를 가진 사람들이 한참 동안 부모와 자신의 관계가 어떻게 힘들었는지 이야기하다가 마지막에는 그래도 우리 부모님은 좋은 분이셨다.라고 급하게 결론 내듯 불편하다.


아픈 것을 사랑한다고 해야 할지, 속상하다는 마음을 좋다고 해야 하는지. 가끔 혼란스럽다.


어떤 글은 그래서 하트를 누르기가 망설여진다.

난 당신의 그 아픔이 좋지 않고 오히려 아프다. 그 아픔을 사랑하지 않음에도 결국엔 하트를 누른다. 답답하다. 개인적으로 가슴 아픈 일로 무너져 내리면서도 직업상 남을 웃겨야 하는 코미디언이 된 듯.


개인 최고기록(PB)을 세웠다는 글. 기쁨을 알리는 글은 즐겁고 가볍다. 잘 알든 모르든 그 글의 댓글을 다는 손끝은 가볍다. 그냥 하트를 누르던가, 최고예요! 축하드려요! 한 마디로 끝이다. 뿌듯하고 자랑이 묻어 나오는 글은 댓글도 가볍다.


하지만 여러 이유로 마라톤 대회를 중도에 포기했다는 글. 본인의 부상이야기. 누군가의 상처를 적은 글. 읽기 시작하면 바로 아픈 글들이 있다. 좋아요를 누를 수 없는 글. 위로가 필요한 글이 있다.


짧은 생각과 설익은 말로 건네는 위로는 부작용을 낳는다.


우리의 삶은 바쁘게 흐른다.


SNS는 사람들의 삶을 서브 3 페이스로 피드, 스토리, 릴스로 정신없이 보여준다. 이게 광고인지, 진짜 삶인지, 기쁨인지, 아픔인지 순식간에 눈앞에 보여주고 정신없이 하트를 누른다. 그중에 하트를 누르지 말아야 할 글도 묻히곤 한다.


위로가 필요한 글을 만나면 잠시 멈추고 댓글을 바로 쓰지 않는다. 메모장을 열어 틈틈이 그를 생각하고, 그 마음을 바라보고 만일 나였으면 어떤 위로가 필요할지 생각해 본다.


결국 퇴근 후 충분한 시간이 있을 때 그 댓글을 완성하여 복사해서 SNS에 붙여 넣는다. 그 위로가 그의 마음에 닿기를 바라며.


왜 아픈 글이 내 마음을 그렇게 적실까.


행복을 말하는 글은 이미 충분히 사람들의 응원과 즐거운 하트가 많이 쌓아있어서 내가 굳이 손을 내밀 필요는 없다는 마음이 들어서일까.


어쩌면 나도 살면서 누군가에게 그런 위로를 간절히 바랐을지도 모른다.


누군가 내게 취미를 묻는다면,

'달리기가 아닌 댓글이 취미예요. 아픈 글에 마음 담아 쓰는 댓글이요.'라고 해야 할지.


많은 댓글을 쓰고 더 자주 누군가의 마음에 손을 내밀고 싶다. 시간이 없어 누군가를 더 많이 읽고 더 많은 댓글을 쓰지 못하는 것이 나는 아쉽고 아쉽고 아쉽다.


누군가에게 위로의 댓글을 쓴다.


잘 익은 가을 하나가 주는 계절의 위로.
잘 익은 단어 하나가 주는 댓글의 위로.

그 위로가 가을날의 낙엽처럼,
누군가의 마음에 소리 없이 닿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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