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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손님 Apr 05. 2022

죽음과 맞닿은 곳에서 피어난 생명력 | 공연 큐레이션

뮤지컬 <프리다> <리지> 연극 <눈을 뜻하는 수백 가지 단어들>

공연큐레이션 | '연뮤 입덕'이 늘고 있는 요즘, 어떤 공연이 재미있는지 혹은 함께 보러 가기에, 혼자 보러 가기에 좋은 작품은 무엇이 있는지 주제와 상황과 맞는 공연큐레이션을 선사합니다...라고 쓰고 극에 대한 사실적 정보와 주관적인 감상에 기반한 '영업글'이라고 읽습니다. [편집자주]



숨을 쉬고 눈을 깜박이고 나의 다음 발걸음을 어디로 내딛을지 생각하는 것. 살아있는 한 당연한 행위들이 무척이나 거창하고 비장하게 느껴지는 순간은 아이러니하게도 죽음과 가까워졌을 때가 아닐까. 여기, 죽음과 맞닿은 순간 엄청난 생명력이 피어오르는 이야기 세 편이 있다. 전부 무대를 채우는 인원이 전부 여성인, 공연계 중소극장 작품 중에선 보기 드문 여성극이다.


각 포스터



죽음이 코앞까지 다가왔대도 "인생이여, 만세" <프리다>


멕시코의 초현실주의 화가 프리다 칼로. 여섯 살에 소아마비를 앓았고 열여덟 살에 교통사고로 척추가 부서졌으며 결혼 후엔 세 번이나 유산했다. 그때마다 맞닥뜨려야 했던 죽음의 고비, 그러나 견디고 버티어 기꺼이 자신의 삶을 화폭에 옮긴 프리다 칼로를 'Last Night Show'에서 만난다. 쇼의 진행자 레플레하와 크루 데스티노, 메모리아가 프리다 칼로의 남편과 의인화된 죽음, 평행우주 속 또 다른 프리다 칼로를 각각 연기한다.
사진=EMK뮤지컬컴퍼니

실존 인물의 삶으로부터 다양한 주제를 끌어 오면서도 주인공에 대한 깊은 존경과 배려를 잃지 않는 태도. 드라마보다 더 드라마 같은 생의 굴곡을 '쇼'라는 콘셉트로 한데 묶어 낸 기발한 상상력. 우리에겐 대극장 전문 제작사로 익숙한 EMK뮤지컬컴퍼니의 소극장 신작 <프리다>를 보고 감탄한 것은 위와 같은 이유에서였다.

뮤지컬 <프리다>는 제목에서 알 수 있듯, 멕시코의 화가 프리다 칼로의 이야기다. 특정 분야에 천재적인 재능을 보인 실존 인물을 주인공으로 그 삶의 이면을 들여다보는 작품은 많다. 그 속에서 <프리다>가 특별한 점은 이야기를 지나치게 교훈적인 '위인전'도, 반대로 작위적인 '드라마'도 아니라는 점에 있다. 

이 작품은 프리다가 자신의 생애를 정리하는 의미에서 출연하게 된 가상의 프로그램 'Last Night Show'의 리허설이라는 설정으로 진행되는데 이것이 관객의 몰입력을 높인다. 프로그램의 호스트와 크루들이 관객에게 호응을 이끌어내며 오프닝넘버를 부르고 나면 프리다 칼로가 조명을 받으며 등장한다. 그 순간 관객은 뮤지컬 <프리다>가 아니라 실제 프리다 칼로의 헌정 쇼를 보기 위해 모인 방청객이 되고, 자연히 무대 위에서 토크와 노래, 안무를 넘나들며 삶의 조각들을 들려주고 보여주는 배우는 '연기자'가 아니라 진짜 '프리다 칼로'로 존재하는 것이다.

이 같은 설정에 설득력을 높이기 위한 장치들도 재미있다. 우선 시작부터 끝까지 무대 뒤에 밴드 연주자들이 함께한다. 공연 중반부에는 이들을 소개하는 시간도 갖는다. 또 쇼의 호스트인 레플레하가 'Last Night Show' 연출가와 공연에 대해 상의하는 장면이 있는데, 연출가는 목소리로만 등장한다. 목소리엔 그날그날 프리다를 맡은 배우에 따라 배우 박정자와 실제 <프리다>를 만든 추정화 연출이 달리 출연한다.

물론 관객을 몰입하게 하는 최고의 요소는 배우다. 프리다 역의 배우 최정원과 김소향은 각기 다른 색깔로 감탄을 자아낸다. 최정원의 프리다가 그의 목소리와 움직임으로 삶의 풍파를 고스란히 전한다면, 김소향의 프리다는 어떤 시련에도 절대 무너지지 않는 강인함을 보여준다. 극 후반부에 무대에 홀로 선 프리다가 또 다시 찾아온 시련 앞에서 삶에 대한 회한과 결연한 의지를 무용으로 선보이는 장면이 있는데 매우 아릅답고도 서글프게 느껴진다.

프리다 외에 쇼의 호스트이자 프리다의 남편 디에고를 연기하는 레플레하 역의 리사, 전수미도 마찬가지다. 디에고가 프리다를 유혹하는 내용의 솔로 넘버 '허밍버드'에서 리사는 스캣으로, 전수미는 탭댄스로 서로 다른 매력을 뽐낸다. 극 중 프리다가 사경을 헤맬 때마다 그를 찾아왔다는 죽음, 데스티노 역의 정영아와 임정희는 압도적인 가창력과 능청스러운 연기로 극의 흐름을 좌우한다. 평행우주 속 프리다를 맡은 메모리아로는 최서연, 허혜진, 황우림이 무대에 오르는데 통통 튀는 매력으로 분위기를 띄운다. 특히 배우 최서연은 전작과 비교했을 때, 메모리아를 통해 가장 잘 맞는 옷을 입은 듯하다.

소극장 뮤지컬이지만 제작사가 EMK뮤지컬컴퍼니인 만큼 무대를 화려하게 꾸민 것도 <프리다>를 추천작으로 꼽을 수 있다. 단, 미술 애호가라면 뮤지컬 <프리다>가 프리다의 실제 작품을 비중 있게 다루지는 않는다는 점을 염두에 둬야겠다. 광화문 세종문화회관 S씨어터에서 5월 29일까지 공연한다.


이런 분들이 보기에 좋아요

삶의 의욕을 되찾고 싶은 분

여성판 토드(뮤지컬 '엘리자벳' 캐릭터)를 보고 싶었던 분

여성이 연기하는 치명적인 카사노바의 매력이 궁금한 분

화가 프리다 칼로에 매력을 느끼는 분



부모를 죽이고 나서야 시작된 소녀의 삶 <리지>


어머니를 여의고 부친에게 학대받던 소녀 리지와 그의 언니 엠마는 계모에 의해 유산마저 빼앗길 위기에 처한다. 화가 난 엠마는 집을 나가고 혼자 남은 리지는 도끼를 집어 든다. 잠시 후 피칠갑이 된 리지를 하녀 브리짓이 발견하고, 리지의 친구 앨리스는 리지가 얼룩이 묻은 드레스를 태우는 걸 목격한다. 
사진=쇼노트

뮤지컬 <리지>는 미국의 유명한 살인사건인 '리지 보든 사건'에서 모티브를 얻은 록 뮤지컬로, 올해로 두 번째 국내 관객들을 만난다. 먼저 알아둬야 할 것은, <리지>의 장르가 살인사건의 범인을 추적하는 스릴러나 사건 중심에 선 리지의 심리를 치밀하게 다루는 심리물이 아니라는 점이다. 

우선 '리지 보든 사건'에 대한 소개가 필요하겠다. 이 사건은 어느 날 리지의 아버지와 계모가 살해된 채 발견된 것에서 시작한다. 현장엔 외부인이 침입한 흔적이 발견되지 않았고, 이 때문에 유력한 용의자로 최초 목격자인 리지가 지목됐다. 리지가 평소 부모에게 학대를 당했다거나, 보든 가족이 서로 화목하지 않았다는 증언들이 리지를 범인으로 몰아갔으나 결론은 증거 불충분. 리지는 풀려났다.

여기서 뮤지컬 <리지>는 '법정에서 인정받지 못한 증언이 사실이었다면?'이라는 질문에서 출발한다. 고로 이 작품은 살인사건의 범인을 리지로 설정하고 출발하므로 애초에 추리극이 될 수 없는 것이다. 대신 <리지>는 부친과 계모의 죽음 이후, 마침내 자신의 삶을 살게 된 리지의 변화를 의상과 음악으로 나타낸다. 

과정에서 강렬한 라이브 밴드와 그보다 더 강렬한 배우들의 노래가 등장인물의 감정을 폭발시키고, 더불어 듣는 관객의 스트레스도 해소해준다. <리지>의 넘버는 브로드웨이 버전으로 유튜브에서 감상할 수 있다.

넘버가 고난도인 만큼 배우들의 실력은 두 말할 것 없다. 리지 역의 유리아, 엠마 역의 김려원, 앨리스 역의 제이민, 브리짓 역의 이영미, 최현선 등의 배우는 이미 지난 초연에서 무대를 뒤집어 놓으신 이력이 있고 이번 시즌부터 합류한 배우 전성민·이소정(리지 역), 여은(엠마 역), 김수연(앨리스 역) 역시 가창력으로는 정평이 나 있으니 캐스팅을 고민할 필요가 없다.

이야기 전개가 치밀한 편은 아니지만 록이라는 장르가 주는 압도감과, 이를 표현하는 여성 배우들의 에너지만으로 볼 가치가 충분하다. 6월 12일까지 종로 두산아트센터 연강홀에서 만날 수 있다.


이런 분들이 보기에 좋아요

'내 안에 록커의 피가 흐른다'는 분

폭발하는 가창력을 경험하고 싶은 분

강력한 에너지를 느끼고 싶은 분

여성 캐릭터에 대한 학대를 '장치'로만 사용하는 뮤지컬이 지겨운 분




아버지의 유골함과 떠난 여행에서 발견한 삶의 나침반 
<눈을 뜻하는 수백 가지 단어들>


로리는 갑작스러운 사고로 돌아가신 아버지가 유골함에 담긴 채 식탁 위에 놓인 것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 서재에서 북극여행 계획이 적힌 아버지의 일기장을 발견한 로리는 그 길로 짐을 싼다. 가방 안에 아주아주 작아진 아버지를 품고서, 아무도 모르는 둘만의 여행에 나선 로리.
사진=엠피엔컴퍼니

봄처럼 따뜻한 연극이다. 1인극 <눈을 뜻하는 수백 가지 단어들>은 주인공 로리가 아버지의 유골함을 들고 떠난 북극으로의 여행에서 다양한 사람을 만나고 또 여러 가지 일을 겪으면서 성장하는 내용인데, 그 과정이 참 따뜻하고 순하다. 시간이 지날수록, 극은 하나도 슬프지 않은데 어쩐지 벅차오르는 감정에 눈가가 뜨거워지는 것을 경험할 수 있다.

러닝타임은 90분. 약 한 시간 반 동안 배우 혼자 오롯이 이야기를 이끌어 가야 한다. 주인공 로리 외 다수를 연기하는 배우 송상은과 유주혜가 그 어려운 일을 해낸다. 씩씩하고 해맑은, 그러나 때로는 두려움도 느끼고 눈물과 화도 참지 않는 소녀 로리부터 로리의 엄마, 여행 중 로리의 마음을 사로잡은 남자애, 로리에게 친절을 베푸는 여행자 프리다까지 성별과 연령을 불문하고 다양한 얼굴과 목소리를 보여주는데 덕분에 공연을 보는 내내 한 시도 지루할 틈이 없다.

'소녀의 성장기'라고 하면 전혀 새롭게 들리지 않겠지만, <눈을 뜻하는 수백 가지 단어들>은 조금 다르다. 이 작품은 가장 소중한 사람을 먼저 떠나보내야 했던 사람들이 그 빈자리를 어떻게 어루만지면 좋을지에 대해 말한다. 정답을 제시하는 투가 아니라 이런 이야기도 있다고 보여주는 식이라 뭐랄까, 위로가 된다. 그런가 하면 어른과 아이의 경계에 선 여자 고등학생이 자신의 첫 경험을 직접 묘사하는 데서는 웃음이 터지면서도 자연히 공감하게 된다. 특히 터부시 되던 이야기를, 의도적인 과장이나 삭제를 거치지 않고, 있는 그대로 들려준다는 점에서 <눈을 뜻하는 수백 가지 단어들>이 여성극이기에 가능한 일이겠다는 생각이 든다. 

무대가 단출하지만 예쁘다. 있을 건 다 있다. 극 중 로리 아버지의 서재도 되었다가, 북극으로 가기 전 베이스캠프가 되기도 하는 책상 하나와 오르막길을 표현한 설치물, 그 끝에 모여있는 눈 결정체 모형. 그들이 시시각각 배경에 맞게 변화하는 조명과 만나 반짝이는 것이 <눈을 뜻하는 수백 가지 단어들>과의 여행을 더욱 아름답게 만든다.

서울에서 90분 간 체험하는 북극여행. 대학로 드림아트센터 4관에서 5월 1일까지 가능하다.


이런 분들이 보기에 좋아요

끝나지 않는 코로나 시대, 해외여행이 그리운 분

한 번쯤 북극여행을 꿈꿔본 분

일상에 지쳐 치유가 필요한 분

소중한 사람과 오랜 이별을 맞게 된 분

1인극의 매력이 궁금한 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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