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극 <레드> <올드 위키드 송> <오펀스>
공연큐레이션 | '연뮤 입덕'이 늘고 있는 요즘, 어떤 공연이 재미있는지 혹은 함께 보러 가기에, 혼자 보러 가기에 좋은 작품은 무엇이 있는지 주제와 상황과 맞는 공연큐레이션을 선사합니다...라고 쓰고 극에 대한 사실적 정보와 주관적인 감상에 기반한 '영업글'이라고 읽습니다. [편집자주]
웹사이트를 기반으로 운영되던 매체의 연예부 기자로 일하던 시절, 내 두 번째 데스크(편집국장)는 신문, 그것도 문화부의 종교, 도서 파트에서만 수십 년을 글을 쓰신 기자였다. 드라마와 예능, K팝을 취재하며 신조어, 유행어, 외래어에 절여져 있던 나는 그와 일하면서 국어사전을 끼고 살아야 했다. 단어를 고를 때는 사전적 정의와 글의 맥락을 까다롭게 비교했고(그렇게 써도 고쳐지는 일이 부지기수였지만), 외국어로 된 노래 제목을 한글 발음으로 표기하기 위해 국립국어원에 연락한 적도 있다(그래요 제가 바로 국어국문학과 전공자예요). 업계에서 관용적으로 굳어진 표현도 그에게 익숙한 것이 아니라면 기사에 실릴 수 없었다. 어릴 때도 안 해본 빨간펜 수업을 듣는 기분이라고, 그즈음 회사의 평기자들끼리 농담(혹은 진담)을 주고받았다. 우리는 데스크를 꼰대라고 생각했고, 아마 데스크 본인도 스스로 그렇게 생각했을 것이다. 그는 가요 담당 기자였던 내게 "얘들은 은퇴한 적도 없으면서 왜 자꾸 '컴백'을 한다는 거냐"와 같은 질문을 자주 던졌다.
수년이 지나 여전히 글을 쓰며 사는 내게 '일하면서 만난, 가장 도움 되는 어른'을 물으면, 제일 먼저 그분이 떠오른다. 그때 그 혹독한 가르침이 없었다면, 아주 기본적이지만 대부분이 놓치고 마는 원칙들을 나 역시도 지키지 못한 채 엉망진창인 글을 쓰고 있었을 것이라고. 그러니까 마냥 '꼰대' 같다고 생각했던 어른을 이해하게 된 순간이, 나에게도 찾아와 버렸다고.
어른의 신념 <레드>
마크 로스코는 씨그램 빌딩의 고급 레스토랑에 걸릴 연작 작품을 그리기 위해 젊은 화가 켄을 조수로 고용한다. 로스코는 생명력을 가진 레드를 죽음의 블랙이 잠식해 버릴 것을 두려워 하지만, 켄은 레드는 토마토 색깔일 뿐이며 블랙에서 죽음을 떠올리는 것은 식상하다고 말한다.
<레드>는 추상표현주의의 거장 마크 로스코의 이야기다. 그가 자본주의의 상징인 도심 한복판 고급 빌딩, 고급 레스토랑에 걸릴 연작을 그리다 돌연 계약을 취소한 실제 사건에서 출발한다. 연극에 등장하는 조수 켄은 허구의 인물이다. 엄격한 순수 예술을 추구하던 로스코의 반대편에서 예술의 상업화, 대중화를 대변하는 역할을 한다. 로스코가 빌딩과의 계약을 취소하기까지 겪었을 내적 갈등을 상상하며 켄과의 대립으로 풀어낸 것이다.
그래서 이 극에서 중요한 건 인물들의 말이다. 로스코와 켄은 방대한 양의 말들을 주고받는데 물론 대개 예술에 관한 것이다. 미술사나 철학, 그 안에서 각자가 갖고 있는 예술관 같은 것. 예술에 손톱만큼도 관심 없었던 관객이라면 대사 대부분이 낯설 것이고, 피카소와 니체 정도는 들어본 적 있는 관객이라면 충분히 이해 가능할 것이다.
예술가의 이야기, 예술에 관한 이야기지만 넓게 보면 삶의 태도와도 직결된다. 팝아트를 무시하고 예술 작품을 돈으로 거래하는 대중을 우매하다고 여기던, 문자 그대로 꼬장꼬장한 꼰대 그 자체였던 로스코가 극의 맨 마지막 장면에 이르기까지 보여주는 모습들이 그렇다. ‘역사에 ‘거장’으로 기록될 만한 삶을 살려면 저 정도의 지조와 신념이 있어야 하는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세상을 지키는 것만큼이나 바깥의 세상을 인정하는 것이 중요하구나’ 앞뒤 꽉 막힌 것 같았던 로스코를 이해하고 고개를 끄덕이게 되는 지점이 분명 존재한다.
캐스팅 이야기. 로스코 역의 배우 유동근 선생님의 연기는 마치 외화를 보는 것 같다. 캐릭터를 만들 때 ‘나’에서 출발하는 배우가 있는 반면, ‘캐릭터’에 맞춰 나를 변화하는 배우가 있는데 유동근 로스코는 후자다. 목소리와 말투, 사소한 제스처까지 서양인으로서의 로스코를 표현하는 데 충실하다. 방대한 양의 대사를 빠른 속도로 소화하는 데도 놓치는 단어 없이 귀에 꽂힌다. 내가 태어나 살아온 시간만큼이나 연기를 해온 선생님의 숙련된 기술이란 것이 이런 거구나 감탄했다.
켄 역의 배우 강승호는 노련하진 않지만 흔들리지도 않는 청년 예술가에 꼭 맞다. 발성이 탄탄하고 눈빛이 올곧아 로스코 앞에서도 기죽지 않는다. 덕분에 극의 주축이기도 한 로스코와 켄의 대립이 더욱 재미있다.
이야기와 인물은 그대로인데 내가 변하면서 다르게 와닿는 작품들이 있다. <레드>가 그렇다. 2019년의 나와 2023년의 내가 본 <레드>의 감상평은 완벽히 달랐고, 그 차이들이 스스로도 놀랍고 새로워서 100분의 러닝타임이 마치 10분처럼 느껴질 정도로 재밌었다. 서울 서초동 예술의 전당 자유소극장에서 2월 19일까지.
마크 로스코의 작품을 아는 사람
미술사에 관심 있는 사람
세대 간의 치열한 말싸움이 궁금한 사람
유동근, 정보석을 좋아하는 부모님과 관람 예정인 사람
어른의 역사 <올드 위키드 송>
한때는 영재, 지금은 슬럼프에 빠진 피아니스트 스티븐은 개인 레슨을 받기 위해 오스트리아 빈의 쉴러 교수를 방문한다. 그런데 피아노 레슨을 받으려면 보컬 코치인 마슈칸 교수의 수업을 먼저 들어야 한다니. 어쩐지 정신없고 주책맞은 마슈칸 교수는 스티븐에게 깊고 오랜 시련을 겪은 민족에게서 훌륭한 음악가가 탄생한다고 가르치지만, 유대인의 고통에 대해서는 무심하게 군다. 스티븐은 마슈칸이 말한 대로 진정한 슬픔을 경험하기 위해 오스트리아의 유대인 강제수용소가 있는 다하우 마을로 잠시 여행을 떠난다.
<올드 위키드 송>은 음악극이다. 뮤지컬은 아니지만, 음악이 중요한 역할을 하는 연극이란 뜻이다. <올드 위키드 송>에서 그 중요한 역할을 하는 음악은 슈만의 가곡집 ‘시인의 사랑(Dichterliebe Op. 48)’이다(<올드 위키드 송> 자체가 ‘시인의 사랑’ 마지막 곡의 영어 제목이다).
이야기는 보컬 코치인 마슈칸 교수가 피아니스트 스티븐에게 ‘시인의 사랑’ 속 노래들을 가르치면서 전개된다. 이때 장마다 언급되는 곡에 담긴 가사와 정서가 마슈칸과 스티븐의 관계, 그리고 마슈칸의 비밀, 스티븐의 비밀과 맞물리면서 의미를 확장하는 구성이다.
<올드 위키드 송>을 관통하는 문장은 ‘슬픔과 환희의 결합’이다. 두 가지 반대되는 정서가 공존해야만 더 깊은 슬픔을, 그리고 더 폭발적인 환희를 경험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 문장을 인간으로 형상화한 것이 극 중 마슈칸 교수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괴짜 교수인 마슈칸은 다소 변덕스럽고 시답지 않은 농담을 좋아하며, 이 모든 것과는 거리가 먼 스티븐을 괴롭히는 데 진심인(물론 사전적 의미의 ‘괴롭히다’가 아니다) 희극적인 모습과, 혼자 남은 밤에는 담배와 압생트, 정체 모를 알약에 취해야만 하는 비극적인 모습을 함께 갖고 있다. 마슈칸이 그 누구보다 강력히 대비되는 희극과 비극을 품게 된 이유가 무엇인지, 그 역사를 천천히 보여주는 것이 <올드 위키드 송>의 또 다른 주제이기도 하다.
<올드 위키드 송>을 추천할 때 자주 쓰는 표현 중 하나가 ‘잔잔하다’인데, 이 작품은 뚜렷한 기승전결, 강력한 서사를 갖고 있지만 그 모든 게 자극적으로 느껴지지 않는다. 극 중 인물들의 삶과, 이것이 대표하는 실제 사람들의 삶에 대한 존중과 배려가 텍스트 구석구석 녹아 있기 때문이다.
동시에 유머도 갖췄다. 우선 ‘괴짜 교수’란 수식어가 붙은 마슈칸 교수의 장난들이 사랑스럽고, 첫 등장부터 쓰리 피스 정장에 목을 꼭 죄고 있는 넥타이로 깐깐한 성향을 드러낸 스티븐의 알고 보니 허술한 면모들도 귀엽다.
캐릭터들이 가진 유머에 맘껏 웃을 수 있는 건 배우들 덕분이다. 마슈칸 역의 배우 남경읍, 안석환, 서현철 선생님은 매력이 다 다르다. 한 캐릭터를 해석하는 매우들마다 그 느낌이 완전히 다른 것이 공연이란 장르의 장점인데 <올드 위키드 송>의 마슈칸들을 보며 새삼 다시 느꼈다. 남경읍 마슈칸은 씩씩하고 안석환 마슈칸은 어린아이 같다. 서현철 마슈칸은 모든 대사와 동작들에 자신만의 디테일을 더해 로컬라이징된 마슈칸을 보는 것만 같다. 스티븐 역에는 배우 홍승안을 가장 많이 봤다. 홍승안이란 배우가 잘하는, 예민하고 우울하고 분노하고 다정하고 짓궂은 연기를 스티븐으로 모두 볼 수 있다. 2막 1장의 독백을 필두로 많은 대사와 자잘한 큐들을 성실히 수행하면서도 순간의 감정, 느낌대로 움직이며 관객까지 스티븐에 이입하게 하는 것이 장점이다.
다만 원작이 1995년 초연된 작품인 만큼, 2023년의 젠더 감수성과 맞지 않는 대사도 등장한다. 대신에 <올드 위키드 송> 극 중 배경이 1986년인 것을 감안하면 아쉽지만, 넘길 수 있다. 러닝 타임은 150분으로 중간에 쉬는 시간이 있다. 소극장 연극 중엔 상당히 긴 편이다. 역시 오는 2월 19일 폐막한다. 대학로 예스24스테이지 2관에서 상연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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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른의 격려 <오펀스>
소매치기로 생계를 책임지는 트릿에겐 지켜야 할 동생 필립이 있다. 아버지는 집을 나갔고 어머니는 죽었다. 세상에 오직 둘 뿐인 고아 형제 앞에 해롤드가 나타난다. 트릿을 '앵벌이 키즈'라고 부르는 해롤드 역시 고아원 출신이다.
<오펀스>, 제목에서부터 알 수 있듯 고아들이 주인공이다 어린 고아들 앞에 나타난 늙은 고아. 늙은 고아는 언제든 어디든 떠날 수 있었지만, 어린 고아들 곁에 남기로 한다. 이야기는 그렇게 시작한다.
<오펀스>를 보는 일은 롤러코스터를 타는 것과 비슷하다. 깔깔 웃다가 숨이 막히다가 눈물이 찔끔, 가슴이 뭉클하다가 괴롭고 마침내 해방된다. 그래서인지 주위에 정말 추천해주고 싶은 동시에 한편으로 두려운 작품이기도 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음이 지치고 벼랑 끝에 선 것 같은 사람들에게 <오펀스>를 추천한다. “모든 젊은이들은 가끔 힘내라고 어깨를 주물러주는 손길이 필요하거든”이라고 말하는 어른이 <오펀스> 안에 존재하기 때문이다. 지켜야 할 것이 있어 스스로를 돌보지 못했던 삶, 고독에 갇혀 온전한 자유를 누려보지 못했던 삶에 대한 위로가 극 내내 그려지며 보는 사람들의 마음까지 어루만진다.
<오펀스>는 최대한 스포일러를 보지 않고 관람하는 것이 극의 재미를 배가한다고 생각하므로 줄거리에 대한 언급은 하지 않겠다. 대신에 그만큼, 줄거리를 확인하지 않고 보더라도 재미든 감동이든 혹은 내 안에 끓어오르는 감정의 파도든 무언가 하나는 반드시 느낄 수 있으리라 확신한다.
다만 주의할 점은 있다. <오펀스>는 욕설, 폭력, 고성, 가스라이팅 등을 포함한 장면이 있어 이 같은 요소들에 민감하지 않은 경우에만 관람하기를 권한다(이런 요소들이 포함되었는데도 어떻게 재미와 감동을 느낄 수 있다는 건지 의아하겠지만…). <오펀스>의 대변인을 자처하자면, 나는 위와 같은 폭력적인 설정이 극 중 사건이나 인물의 비극을 강조하기 위해 사용되는 것을 반대하는 편이다. 그러나 <오펀스>에서는 자극을 위한 드라마보다는 현실을 담아내는 다큐멘터리의 느낌으로서 위의 장면들이 등장한다고 생각해 거부감 없이 보고 있다.
또 한 가지 알아 두면 좋을 점은 캐스팅이다. <오펀스>의 세 인물은 원래 남자다. 그런데 지난 시즌부터 여자 배우들도 <오펀스>에 출연하고 있다. 여자 배우가 남자 캐릭터를 연기하는 것인지, 아니면 극 중 인물의 성별 설정 자체가 바뀌는 것인지는 관객들이 보기에 따라 다를 수 있다(물론 극의 엔딩에 이르면 답이 정해져 있긴 하다).
<오펀스> 역시 배우마다 캐릭터의 인상이 다 다르다. 방황하는 형 트릿 역의 배우 박정복은 대학로 전체를 날려버릴 것 같은 우렁찬 발성으로 트릿의 정석을 보여주고 있고 그래서 더 안쓰럽다. 배우 최유하의 트릿은 여려서 애달프고, 손지윤의 트릿은 어려서 아프다. 트릿의 보호를 받는 동생 필립 역의 배우들은 육아 난이도로 비교하고 싶은데, 김주연>>>>>>(넘사벽)>>>>>최수진>현석준>=신주협이다(뒤로 갈수록 형 말 잘 들었을 것 같다는 뜻). 두 형제를 보살피고 격려하게 된 해롤드 역의 배우 박지일, 추상미, 양소민 선생님은 공통적으로 따뜻하고 아이들을 사랑한다. 세 분 중 누구의 공연을 봐도 아쉬움이 없을 것이다. (언급되지 않은 배우들은 아직 못 봤다)
<오펀스> 역시 러닝타임 150분으로 인터미션이 있다. 길지만 시간은 쏜살같이 지나간다. 오는 26일까지 대학로 아트원씨어터 1관에서 만날 수 있다.
격려와 위로, 응원이 필요한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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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를 지켜줘야 해서 외로운 적 있는 사람
사소한 기적을 믿고 행복을 느끼고 싶은 사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