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렇게 살다가 죽는 건가
줄거리
아마도, 미래의 지구. 남주는 사람의 일을 대신해 주는 로봇 레이를 구매한다. 배송 당일, 전원이 켜진 레이는 자신이 인간이라고 주장하더니 대뜸 남주의 심장 소리를 듣겠다며 달려든다. 돌발 행동 후 멈춘 레이는 초기 동기화가 완료되자 정상 작동한다. 레이는 남주 대신 출근과 집안일을 하고, 남주는 자유를 누린다. 이제 전 세계는 레이들의 노동력으로 움직인다. 그러던 어느 날 레이의 개발자인 남박사가 죽음을 앞두고 숨겨둔 명령 코드를 작동시킨다. 그 순간 어떤 감정도, 고통도, 불안도 느끼지 못하기에 완벽한 레이들이 무너지기 시작한다. 레이들의 혼란은 인류의 혼돈을 몰고 온다.
사진=남주(가운데)의 심장 소리를 듣는 로봇 레이들 / 프레스콜 촬영 연극 <우주로봇레이>는 인간의 노동력을 대체하는 로봇 레이의 출현 이후 지구에 일어나는 변화를 그린다. AI 기반의 챗봇으로 과제도 하고 업무도 하고 예술도 하는 세상에서 신선한 소재는 아니지만, <우주로봇레이>가 여타 OTT에서 볼 수 있는 SF 장르물과 구별되는 점은 분명 있다. 다분히 이과적인 설정을 상당히 문과적인 사유로 풀어낸다는 점이다.
이를테면, <우주로봇레이>에 등장하는 인간 남주는 야간 근무 때문에 저녁 약속을 잡지 못한 지 오래다. 그가 로봇 레이를 주문한 이유다. 레이에게 회사 일도, 집안일도 모두 맡긴 남주는 자유를 누린다. 하지만 아마 그 자유가 주는 해방감과 즐거움은 오래가지 못했을 거다. 실제로 극 중 남주는 식물에게 물을 주는 일만은 자기가 하겠다고 레이에게 말한다. 이제 바깥세상은 남주의 레이처럼 다른 사람들이 고용한 레이로 가득하고, 남주가 스스로 할 수 있는 일은 집에서 식물을 기르는 것뿐인 것이다. 그러다 문득, 남주가 허공에 질문을 던진다. "이렇게 살다가 죽는 건가?"
종종, 아니 실은 자주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다고 생각한다. 출근도 대신해주고, 일도 대신 해주고, 이왕이면 설거지랑 빨래도 다 해주는 집요정 같은 존재가 있으면 좋겠다고 상상하지만, 정말 나의 모든 일을 누군가 대신해 준다면 아마 '나'는 살아남지 못할 거다. 세상에 태어난 모든 존재는 아무것도 하지 않고는 살 수가 없으니까.
<우주로봇레이>는 이처럼 눈부신 과학의 발전, 그 성과의 사각지대에서 인간으로서 고민해 볼 만한 철학적 혹은 윤리적인 화두를 끊임없이 던진다. 인간의 주체성과 권리, 인간과 이외 존재의 갈등, 평등과 책임, 무한한 생명 연장의 의미 같은 것 말이다. 그래서 한편으로는, 조금 뜬금없지만, 진짜 그냥 문득 갑자기 돌연 별안간, <우주로봇레이>를 다 보고 집 가는 길에 NCT가 생각났다. NCT(National Curriculum Test) 말고 아이돌 NCT(Neo Culture Technology). 지금은 끝났지만, NCT가 태초에 '무한 확장'을 테마로, 무한한 팽창과 평행 우주를 차용한 콘셉트를 선보여 온 자타공인 네오한 그룹이라. 사소하고 일상적인 질문에서 사고의 범위를 무한히 키워가며 우주 너머의 공간까지 이야기를 확장하는 <우주로봇레이>에서 엔시티를 느껴버린 거야....(자유로운 리뷰를 봐 자유로워)
사진=로봇의 권리를 위해 싸우는 레이들 / 프레스콜 촬영 작품이 던지는 질문의 깊이가 깊다고 분위기까지 무거운 건 아니다. 전반적으로 코믹하고 유쾌하니 가벼운 마음으로 봐도 좋다. 극의 분위기를 밝게 만들어주는 건 익살맞은 캐릭터와 이를 능청스럽게 연기하는 배우들 덕이다. 7명의 배우가 출연하는데 모두 1인 다역을 기본으로 다양한 연기를 펼친다. 단순히 배역마다 성대를 갈아 끼우는 것 이상으로, 캐릭터들이 내뿜는 밝은 에너지와 객석에 주는 메시지 사이에서 균형을 잘 잡아준다.
특히 감탄한 건 배우들의 움직임이다. <우주로봇레이>가 상연되는 극장은 서강대학교 메리홀, 소극장이다. 작은 공연장의 특성상 막을 내렸다 올리거나 대형 설치물을 활용할 수 없는 탓에 장면을 전환하는 일이 쉽지 않은데, 이를 배우들의 힘으로 해결한다. 특히 <우주로봇레이>의 하이라이트인 우주 장면에선 배우들의 움직임만으로 무중력 공간을 표현하는데 그 어떤 CG보다 몰입도가 높다. 여기에 한 가지 더 마음에 들었던 점을 들자면, 조명이다. 조명 역시 배우들이 움직임만으로 어떤 설정을 풀어내야 하는 상황에서 적재적소에 힘을 보태 소극장이 가진 공간 표현의 한계를 넘어서는 데 큰 도움을 준다.
우주에서 만난 레이(왼쪽)와 아담, 이브(오른쪽) / 프레스콜 촬영
여기서부터는 스포일러 주의
아쉬운 점은 후반부로 갈수록 힘이 빠진다는 것이다. 그 아쉬움이 <우주로봇레이>의 하이라이트에 등장한다는 게 제일 아쉽다. 엔딩 직전, 우주로 간 레이들과 지구에 남은 윤하의 독백이 교차하는 대목이다. 레이들의 독백은 아마도 작가가 <우주로봇레이>를 쓰면서, 혹은 <우주로봇레이>를 쓰기까지 가졌던 질문과 사고의 총집합일 것이다. 그래서인지 답이 없는 질문들로만 이루어진 대사인데도 힘이 있고, 또 앞서 언급한 우주로의 전환(움직임과 조명)이 여기서 빛을 발하므로 시각적으로도 아름답다. 그런데 레이의 독백이 끝나고 등장하는 윤하의 독백은, 전자와 비교하면 알맹이가 없다. 같은 말을 글자만 바꾸어 반복하고 있다는 인상을 지울 수가 없고, 그것이 두 번 이상 거듭되니 지루하기도 하다. 윤하의 독백에 담긴 메시지 자체가 의미 없다는 게 아니라, 그 의미가 객석까지 와닿는 방식이 비효율적이다.
한 가지 더. 작중 세계관의 성별 구분에도 의문이 남는다. 극 중 '레이의 성별은 주인 마음대로 바꿀 수 있다'는 대사가 나올 때 배우가 손으로 여성의 신체를 형상화하는 듯한 동작을 취한 것이나, '여자인지도 남자인지도 알려지지 않았다'는 남박사에게 후배 연구자가 '누나' '형' 등 성별이 특정되는 호칭을 반복해 사용하는 것이 그렇다. "<우주로봇레이>의 세계관은 제3의 성, 논바이너리 등의 개념이 등장하고 특히 해외에선 호칭은 물론, 공식 문서에 작성하는 성별 표기에서도 이분법적 분류 방식을 벗어나고자 하는 현대 사회의 흐름이 반영되지 않은 미래인 것인가"란 생각에 뒷맛이 개운치 못했달까.
하지만 아쉬운 점은 지극히 개인적이고 극의 일부일 뿐이다. 전반적으로 기대 이상의 만족감을 느꼈다. 단언컨대, <우주로봇레이>는 창작진, 출연진, 제작진의 고민과 노력이 규모의 한계를 뛰어넘은 작품이다. 작가의 말을 살펴보면 이 작품은 수년 전 인형극에서 시작해 몇 차례 개발 과정을 거치며 인형이 실제 배우로 바뀌고, 출연자의 수도 늘어나며 오늘날의 버전에 도달해 처음 정식으로 관객들을 만난다고 한다. 현장에서 관객들과 호흡하고 이를 토대로 또 개발을 거듭하면 여러모로 더 넓고 깊은 <우주로봇레이>만의 우주가 완성되지 않을까 기대한다.
사진=별을 바라보는 레이 / 프레스콜 촬영
공연 정보
러닝 타임 | 90분
공연 기간 | 2023. 10. 6~15.
극장 | 서강대학교 메리홀
출연진 | 김재환, 김태양, 양지운, 윤새얀, 정해린, 최연오, 홍철희
예매 | 인터파크티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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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 '일하기 싫다'라고 생각하는 사람
무한 확장하는 상상력을 가진 사람
존재와 의미에 대해 한 번이라도 고민해 본 적 있는 사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