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관계는 일반 법률관계와 비교해 볼 때 특수성이 있다. 계약관계이면서 인간관계이고, 금전관계이면서 감정관계이다. 한국의 사회적 정서상 법률분쟁이 발생하면 감정분쟁도 동반되는 게 일반적이지만, 노동분쟁은 그 정도가 특별히 심하다. 노동관계의 종속성(특히 인적 종속성: 근로자의 의미 참조)에 기인하는 특수성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 특수성을 온몸으로 느낄 수 있는 사건이 직장 내 괴롭힘 사건이다.
직장 내 괴롭힘이 근로감독관의 조사 업무로 추가된 초기에는 모든 근로감독관들이 해당 조사를 수행하지 않았다. 기존 사례가 없는 사건들이라는 점, 감정적 문제로 조사 진행이 쉽지 않을 것이라는 점, 법률 개념이 다른 사건에 비해 모호해 조서 작성이 쉽지 않을 것이라는 점 등이 고려돼 주로 경험이 많은 선임 감독관들에게 배정이 됐다. 나는 근로감독관 생활을 한지 오래되지는 않았지만, 노무사 자격 보유자라는 이유로 직장 내 괴롭힘 사건이 배정되는 감독관으로 선정됐다. '내가 시험공부를 할 때는 없던 제도였고, 저도 당신들과 마찬가지로 낯설답니다..'라고 항변해 볼까 싶었지만 군소리하지 않고 받아들였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후회했다.
3년가량 근로감독관으로 재직하는 동안 수백 건의 노동사건을 처리했다. 임금체불, 해고예고의무 위반, 근로조건 서면명시 위반, 퇴직금 체불, 부당노동행위, 단체협약 위반 등 다양한 노동관계법 위반 사건을 처리했고, 앞서 말한 특수성대로 대부분 감정분쟁이 함께했다. 하지만 수백 건의 사건 중 법률분쟁의 해결과 함께 감정분쟁도 해결되는 경우가 없지 않았다. 체불된 임금을 지급하는 사업주가 늦은 지급을 미안해하고, 근로자는 서로 어려운 상황에 노동부에 신고한 사실을 사과하는 경우 같이 말이다. 단, 직장 내 괴롭힘 사건의 끝은 항상 결국 비극이었다. 당사자는 사건이 마무리되는 그 순간까지 서로를 비난했고 본인의 억울함과 분함을 주장했다. 가해자가 피해자에게 사과하거나, 당사자간에 서로 화해하는 경우를 단 한 번도 보지 못했다.
피해자의 진술을 받는 내내 '이게 정말 사실일까' 싶을 정도로 심한 괴롭힘을 당한 근로자가 있었다. 모든 조사를 마친 결과 피해자의 진술은 오히려 축소되었다 싶을 정도로 심한 괴롭힘이었다. 법률적으로 도울 수 있는 부분은 최대한 돕고 싶었고, 유급 병가 등 피해 근로자가 회사에 재직하며 받을 수 있는 보상 조치가 이루어지도록 처리했다. 길지 않은 병가가 끝난 뒤에도 상처를 회복하지 못한 근로자는 회사를 포기하겠다고 했고, 실업급여 및 산재 신청이 가능하다는 것을조언해줬다. 몇 개월이 지나 기억이 희미해질 때쯤 찾아온 피해 근로자는 산재가 승인됐다는 소식을 전하며, 큰 부담 없이 정신과 진료를 받을 수 있게 도와줘서 고맙다는 인사를 건넸다. 현행법상 가능한 모든 법률조력을 했지만, 결국 피해 근로자는 여전히 정신과 치료를 받아야 했다. 괴롭힘이 없었다면 계속 다닐 수 있었던 직장도 사라졌고, 성실히 일하고 받았을 임금도 사라졌다.계속 남아있는 건 오로지 마음의 상처뿐이었다.
2019. 7. 16.부터 직장 내 괴롭힘 제도가 시행됐다. 그리고 직장 내 괴롭힘 제도를 보완하기 위해 근로기준법이 다시 한번 개정된 뒤 2021. 10. 14.부터 강화된 직장 내 괴롭힘 제도가 시행되고 있다. 이제는 명백히 법률문제인 직장 내 괴롭힘이 법률로 해결 가능한 문제인지 의구심이 든다. 정신과 치료를 받는 금전적 부담을 줄여주는 것으로 피해 근로자가 받은 직장 내 괴롭힘으로 인한 상처는 치유됐다고 볼 수 있을까. 어차피 직장에서 발생하는 괴롭힘을 우리 모두가 해결해야 될 문제라고 인식했다면, 이보다 더 나은 방법은 없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