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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율룰루 Aug 02. 2020

다른 사람의 삶을 사랑한다는 것

내가 좋아하는 것


아가씨, 이런 바지는 어디서 팔아요?”

버스를 기다리는데 모르는 할머니가 웃으며 다가와 말을 거셨다.  할머니는 알록달록한 연두색 원피스를 입고 귀여운 벙거지 모자를 쓰고 계셨다. 모자에 가려지지 않은 머리카락이 삐쭉빼쭉 꼬불꼬불 귀엽게 튀어나와 있었다. 시골에서 고양이 두 마리와 평온하게 살 것만 같은 일본 드라마 속 할머니의 모습이었다. 할머니의 모습은 호감을 갖기에 충분했으며 버스가 오는 17분 후라는 시간도  대화를 나누기 충분한 시간이라고 생각했다. 바지가 예쁘다는 할머니의 칭찬에 자주 가는 쇼핑몰을 공유했고 우리는 대화를 이어갔다.


대화를 나누며 새로운 사실을 하나 알게 되었는데 할머니가 폐암 말기 환자라는 사실이었다. 의사로부터 살 수 있는 시간이 6개월밖에 안 남았다는 이야기를 들었다고 한다. 그리고 의사가 덧붙인 말이 있었다.


“어제도 오늘도 생각하지 말고 
오늘만 즐겁게 사세요”

할머니에게 중요한 말은 6개 월이라는 시간이 아니라 의사가 덧붙인 말일 거라 생각했다.할머니는 의사의 말을 따라 매일매일 즐겁게 지내고 있다고 말했다.  


버스정류장 뒤편에 있는 옛날 통닭집을 가리키며 저 집이 이 동네에서 정말 훌륭한 치킨집이라며 소개해줬다. 어느 날 나는 그  집이 기억나 퇴근 후 치킨을 사서 집에 갔다. 치킨은 노동에 찌든 나에게 황홀한 하루를 선물했다. 할머니는 치킨집을 추천 한 뒤 도로 건너편 피자집을 가리켰다. 할머니가 피자를 사러 갔는데 가게 앞에 쪼그만 애가 계속 서성거려서 “내가 피자 좀 사줄까?” 했더니 아이는 뾰로통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더랬다. 할머니 한 판, 쪼그만 애 한 판. 그렇게 두 판을 사서 아이에게 주고  집에 갔다고 한다. 아마 할머니는 집에 돌아와 피자를 두 배 맛있게 먹었을 거라고 생각했다.

우리는 서로의 블로그도 공유했다. 블로그 공유를 마치자 버스가 왔다. 17분이란 시간이 대화하기에 충분할 것만 같았는데 짧게만 느껴졌다. 나는 아쉬운 마음에 입꼬리를 내리고 꾸벅 인사를 한 후 버스에 올랐다.

버스를 타고 이동하며 할머니의 블로그를 염탐했다. 소소하지만 굉장한 행복이 담긴 글들을 하나씩 읽어갔다. 최근에 컴퓨터를 배운 이야기, 동네에 가장 콩국수를 잘하는 집에서 혼콩국수를 한 이야기, 자신을 걱정하는 며느리를 안심시키며 통화한 이야기
생각해보면 별것 아닌 일들이 너무도 재미나게 행복하게 적혀 있었다. 할머니는 의사의 마지막 처방전인 “어제도 오늘도 생각하지 말고 오늘을 행복하게 사세요”라는 말을 잘 지키며 살아가고 있었다.
그 처방을 잘 들어서 할머니는 4년째 건강하게 살고 있었다.

할머니의 블로그 덕분에 나는 금세 목적지에 도착했다. 일산의 큰 병원 앞이었다. 로비에서 친구를 기다렸다. 얼마 전 암수술을 마친 친구가 죽을 것 같은 표정을 하고 걸어 나왔다. 꼭 해주고 싶은 말이 있었는데 고통스러워 보여서 하질 못하고 마음에 담아두었다. 희로애락 중 애만 남아 보이는 친구에게 할 말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항암치료로 머리카락이 듬성듬성해질 때쯤  놀리며 이 말을 꼭 해줘야겠다고 생각했다.
“**아... 죽고 싶지 않으면 어제도 내일도 생각하지 말고 오늘을 즐겁게 살아라~”

건강하게 꿋꿋하게 멋지게 아름답게 황홀하게 살아가는 할머니의 이야기를 친구에게 꼭 해주고 싶었다.


나는 서점에 가면 늘 에세이 코너를 기웃거린다. 그리고 타인의 삶을 펼쳐본다. 누군가의 삶은 내 마음을 두근거리게 한다. 그리고 그 삶은 나를 움직이게 하는 동력이 되곤 한다. 살아가면서 만나는 수많은 사람들의 고유한 삶이 그냥 흘러가는 시간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지금 이렇게 이 곳에 나로서 서 있는 것은 그들의 덕이 크다는 것을 나는 안다.


내가 펼친 책에 담긴 저자의 삶, 울면서 본 영화 속 주인공의 삶, 밉지만 안아주고 싶은 우리 엄마의 삶, 주름진 우리 할머니의 삶, 사랑하는 내 친구들의 삶.

나는 내가 만난 누군가의 삶을 듣고 생각하고 고민하며 나의 길을 찾아간다. 내 길을 찾다가 마음이 어려울 때 나는 또 누군가의 이야기를 듣는다. 이야기를 들으며 나는 그들의 이야기를 사랑하게 되고 그들을 사랑하게 된다.

누군가 나에게 어려움을 이야기할 때가 있다. 너무 돕고 싶지만 내가 겪은 경험으로만 도울 수 없을 때가 있다. 그때 나는 타인의 삶을 펼쳐 읽는다.


그 삶이 힘들어하는 그 사람을, 그리고 나를 어떻게 바꿀지 기대하며 나는 자주 당신은 어떻게 살아가고 있느냐 묻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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