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은 여성 아이돌과 솔로 앨범을 발표한 멤버들의 존재감이 유독 두드러졌던 한 해였다. 한 해 동안 큰 존재감과 의미를 보여줬던 앨범과 싱글들을 소개하며 2019년을 돌아보자. 소개된 순서는 순위와는 무관하다.
전작 [PRESS IT]과 [MOVE]에서 쌓은 경험치와 섹슈얼한 컨셉을 폭발시키는 대신, 최대한의 형태로 정제해 매끈하게 다듬은 앨범이다. 직관적인 중압감 대신 치밀한 정교함을 자랑하는 프로덕션과 보컬 디렉팅, 퍼포먼스는 지금 태민이 아니라면 보여줄 수 없는 것들로 가득하다. 자신만의 규범에 갇히지 않고 자신을 향한 실험과 판타지를 수용적으로 받아들이는 에디튜드 역시 신선하면서도 노련하다. 2019년의 태민은 보이 그룹 솔로 중에서 가장 독보적인 영역을 확보함과 동시에 아이돌 팝의 새로운 표준을 만들어가고 있다.
BTS와는 완전히 다른 길을 가겠다는 듯 한 의지로 가득한 상쾌한 신스 팝과 뉴 잭 스윙 등의 장르로 가득한 앨범은 최근 청량함을 강조했던 보이그룹 앨범들과 일견 비슷할 수 있다. 그러나 BTS가 그려온 청소년, 학생, 청춘이라는 장르화된 어두움을 그리기보다는 일상성과 판타지 사이를 오가며 몽환적인 이미지를 펼쳐 그저 여름과 청량함이라는 이미지를 직관적으로 해석하는 데 그친 사례들과 차이를 둔다. 재치 있게 배치된 비트와 신스 사운드, 코러스의 화음 역시 독특한 이미지와 가사를 만난 덕에 그 무게를 달리한다. 앞으로 TXT의 디스코그래피에서 이 앨범의 컨셉과 메세지, 음악이 어느 정도의 지배력이나 대표성을 가지게 될지는 알 수 없으나 적어도 지금의 신인들이 취할 수 있는 가장 모범적인 형태의 팝 앨범이라는 점은 분명하다.
2017년 '동그라미의 꿈'에서 시도했던 독특한 리프 사운드와 무심한 보컬, 산발적이면서도 조형적인 레이어 구성이 올드 팝의 옷을 입고 더욱 강렬해졌다. 빈티지한 피아노 사운드와 베이스, 쾅쾅대는 드럼, 낮고 시니컬한 보컬의 조합은 충분히 트렌디하면서도 아이코닉하다. 수시로 바뀌는 대표 세션과 은근히 피치를 달리하거나 호흡에 힘을 줄듯 말 듯 한 보컬 디테일에서 팀 활동 시절 앨범 전곡을 프로듀싱했던 경험치와 노하우를 여유롭게 드러낸다. 킴브라나 빌리 아일리시, 렌카와 같이 빈티지 사운드의 올드 팝 스타일을 선보인 아티스트들이 좋은 의미에서 스쳐 지나가기도 하지만 그들에게 매몰되지 않는 단단한 방향성이 있다. 앞으로의 그의 행보에 주목해야 할 당위성을 부여하는 싱글.
맑고 기괴한 글로켄슈필 소리와 불협화음을 의도한 듯한 코러스. 감성적인 칠웨이브와 앰비언트 사운드, 은유적이고도 주술적인 가사. 해리성 정신 장애를 가진 사람의 이야기라는 뮤직 비디오까지. [고블린 (Goblin)]에는 우리가 직관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이야기란 없다. SM엔터테인먼트가 지금까지 시도했던, 혹은 아이돌 팝 씬에서 가장 낯설 조형적인 사운드 디자인과 컨셉, 가사 안에서 설리는 설리, 혹은 최진리, 혹은 무명의 개인이 가지는 복잡하고 자기모순적이고 불안정한 면들을 시적으로 전달한다. 그 이면 하나하나는 앨범을 이루는 곡들과 같이 매우 파편적이고 이해하기 어렵고 불안하고 때론 도발적이기에 쉬이 받아들이기 어렵다. 그럼에도 설리와 [고블린 (Goblin)]은 손을 먼저 내밀며 최진리라는 개인으로서, 여성으로서, 혹은 f(x)라는 팀을 거쳐 일련이 과정을 겪은 설리라는 또 다른 자아로서 아주 짧고 무거운 단 하나의 사실을 전달한다. "나는 여기 있는데."
발라드 장르가 유독 강세를 보인 한 해였지만 그 안에서도 첸이 발표한 두 장의 앨범은 유독 유려하고 깊다. 보컬리스트로서의 에고와 서늘한 정서를 강조한 [사월, 그리고 꽃]도 주목할 만한 앨범이었지만, 30년 이상의 한국 발라드 레퍼런스들로 가득 채운 앨범인 [사랑하는 그대에게]는 특정한 구상과 스타일에 집중했던 전작보다 더 풍부한 역량과 장르에 대한 이해를 담고 있다. 차기 남성 발라더를 자처하는 가수가 곳곳에서 자아를 뽐내는 와중에 한국 발라드가 쌓아온 스타일과 역사를 담백하게 표현해내는 이 앨범의 존재감은 더욱 빛이 난다.
박봄은 2NE1 시절과 솔로 시절, 그리고 지금의 그에 이르는 모든 스타일을 드라마틱하게 소화해내며 복귀를 선언했다. 오마이걸과 러블리즈는 '왜 그들의 음악을 들어야 하는가'를 스스로 탐구했고 증명해냈다. 마마무는 최고의 자리를 더욱 공고히 했고, AOA는 새로운 장을 열었다. 그리고 전소연과 (여자)아이들은 스스로 왕관을 썼다. 곡 하나하나의 만듦새와 디테일에서 걸그룹 씬의 과거와 현재, 미래를 모두 확인할 수 있다. 걸그룹 멤버들이 직접 곡 선택과 편곡, 무대 구성 등에 주도적으로 참여하며 기존의 프로듀싱과 비슷하면서도 전혀 다른 방향성의 무언가를 성취해냈다는 의의는 더욱 크다. 2019년 아이돌 팝 씬, 특히 걸그룹 씬이 어디로 나아갔는지를 나타내는 앨범을 고르라면 주저 없이 지목해야 하는 앨범.
레드벨벳과 SM엔터테인먼트 걸그룹 팀들의 음악과 스타일을 종합하며 자축하던 축제는 달콤하면서도 기묘하게 마무리되었다. 소녀시대와 f(x), 그리고 레드벨벳의 초기 음악을 다시 한번 재구성했던 '짐살라빔'과 레드벨벳이 그동안 시도해왔던 키치한 여름 시즌 테마를 레트로틱하게 편집한 '음파음파', 그리고 '벨벳' 컨셉이 대표하던 블랙뮤직을 보컬의 영민한 활용과 다양한 섹션으로 풀어낸 'Psycho'에 이르기까지 레드벨벳은 과거와 현재에 대한 회상과 자축을 끝내고 축제 이후에 있을 미래에 대한 준비까지를 완벽하게 해냈다. 팬들을 위해 곳곳에 숨겨놓은 암시들과 메세지들도 이 시리즈의 재미와 깊이를 부여하지만, SM과 레드벨벳의 노하우가 총동원된 촘촘하고 깔끔한 레이어들과 멤버들의 우수한 보컬적 기량이 완성도의 바탕에 있다. [The ReVe Festival]은 좋은 음악을 바탕으로 시리즈 앨범과 세계관을 만들고자 하는 팀들과 기획사들이 가장 우선적으로 참고할 만한 모범적인 케이스가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