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부. 미래에 관하여
헬레나 노르베리 호지, 『오래된 미래 : 라다크로부터 배우다』, 양희승 옮김, 중앙북스, 2018.
1부가 호지가 본 라다크의 참모습이었다면, 2부는 라다크가 개발 되며 겪는 변화의 과정이었다. 그리고 3부는 호지가 변화되어 가는 라다크를 보며 가진 개발, 현대화, 서구화, 산업화에 대한 고민들이 담겨 있다. 서구사회처럼 개발하는 것이 과연 미래를 위하여 좋은 것인가? 산업화되어 간다는 것은 진정 모든 이들에게 장밋빛 미래를 선사해줄 수 있는가?
문제는
개발이 진행되는 동안에는 사람들이 현재 그들에게 어떤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를 개괄적으로 파악하지 않거나 파악할 수 없다는 것이다. P.255.
당사자는 자신의 코앞만을 바라볼 수밖에 없다.
제서림벽(題西林壁) 2)
소식蘇軾
가로 보면 고개요 모로 보면 봉우리
멀고 가깝고 높고 낮아 모두 다르다
이 산의 참 모습을 모르는 것은
이 몸이 저 산속에 갇혀 있는 탓일세
橫看成嶺側成峰(횡간성령측성봉)
遠近高低客不同(원근고저객부동)
不識廬山眞面目(불식여산진면목)
只緣自在此山中(지연자재차산중)
소동파의 제서림벽에서 말하는 것처럼, ‘여산’ 속에서는 ‘여산’의 진면목을 볼 수 없다. 그 속에서 보이는 것은 산의 전체가 아닌 나무들의 뒤얽힘뿐이다. 그렇기 때문에 산 속에 있는 사람들은 산의 전체적 모습이 아닌, 자신의 앞에 나있는 길만을 바라볼 뿐이다. 그저 이 길이 정상으로 다다를 길이라는 것을 믿고서 말이다. 하지만 개발이라는 것이 보여주는 미래가 꼭 그들의 희망사항과 같지 않다는 점이 문제다.
현대화라는 것은 겉으로 볼 때 문화에 대한 위협으로 느껴지지 않는다. 현대화의 결과로 나타나는 개별적 변화들은 처음에는 아무런 조건 없는 발전인 것처럼 보인다. 오랫동안 지속되는 부정적 결과들은 예측하기 어렵다. (…) 개발이 불러오는 파괴적 영향이란 시간이 흐른 뒤 그간의 과정을 돌이켜 보아야만 명확하게 알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p.255.
개발이 진행되는 지역의 사람들은 현재 자신이 겪는 불안과 고통을 서구 사회가 제시하는 미래의 희망찬 모습으로 해소할 수 있다 생각한다. 희망찬 서구 사회의 모습은 언제나 ‘장밋빛 미래’로 그려진다. “나도 서구인처럼 잘 살 수이다”라는 맹목적 믿음아래 서구에서 들어온 제품들은 무조건적으로 수용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미래상의 제시는 이성적인 판단에 의해서가 아닌, 서구 사회의 문화 침략이 그 선봉장으로 들어선다. 현대화란 것은 위에서 말하는 것처럼 단순히 경제적 성장이 아닌, 문화적 위협이 선행되어진다.
문화의 파괴 현상에 있어 또 하나 중요한 요인은 현대 세계와의 접촉이 초래하는 상대적 열등의식이다. p.255.
단적인 예로, 개발이 진행되기 전 라다크 사람들에게는 가난이 없었다. 그러나 개발이 진행되면서 그들에게는 ‘가난’이란 것이 생겨났다. 그들은 개발이 진행되면서 가난해진 것이다. 그들을 가난하게 만든 것은 서구사회가 만들어낸 상대적 열등의식이다. 그들은 헐리우드의 영화를 보고, 서구 사회의 제품을 보면서 자신들이 가지지 못한 것들을 깨닫게 된다. 그리고 그와 더불어 그들이 가지고 있는 것들이 어떤 가치를 지니고 있는지 망각하게 된다.
그렇기 때문에 문화 침략이란 문화를 빼앗는 일이고, 문화를 파괴하는 일이다. 문화를 침략당한 이들은 그들이 가진 것을 보지 못하는 ‘봉사’가 되어 버린다. 그리고 멀리 떨어져 있는 ‘기호’를 소비하기 위해 개발을 향해, 현대화를 향해 달려 나가는 것이다. 그것은 마치 ‘차안대’를 쓰고 달리는 경주마와 같다.
이러한 문화 침략이 바로 ‘개발’이 가져오는 위험성을 잊게 만들고, 맹목적으로 서구의 것을 추종하도록 만든다. 그리고 글로벌 시장 경제는 이러한 어리석은 어린 양들을 먹임직스러운 바비큐로 여기는 것이다. 단순한 예로, 서구 사회에서 금지되어버린 DDT가 버젓이 ‘레’의 시장통에서 팔리고, 그러한 DDT를 뿌리는 농부들은 보호장비를 전혀 하지 않는 것처럼 말이다.
숫자 놀음
고도화된 현대 사회는 모두 숫자로 치환된다. 영국의 지리학자 나이절 스리프트(Nigel Thrift)는 수를 처리하는 방식이 진화하면서 시대마다 세계를 개념화하고 인식하는 방식이 달라져 왔음을 역사적으로 보여 준다. 예컨대, 고대 그리스 사태에는 수학적 사고가 싹트기 시작하면서 공식, 수학 문자, 다이어그램 등이 고안되었고, 세계를 간결하게 추상적인 형태로 인지하는 사고가 싹트기 시작했으며, 16~17세기 서구 유럽에서 근대 국가 건설 과정의 일환으로 인구(Population) 개념이 등장하여, 세계를 구성하는 방식이 인구 개념을 통해 사망자의 수, 병자의 수 등에 통계적인 규칙성에 따라 치환되고, 이와 함께 인간을 국가의 자원으로 수량적으로 바라보는 시각이 변화하였다. 나아가 19~20세기 초반에는 효율적인 자원의 배치 방법을 모색하기 위해서 사물과 사람, 정보의 움직임을 통계적으로 산출하는 로지스틱스가 등장, 확산되었고, 오늘날 컴퓨팅이 유비쿼터스화 되면서 숫자의 세계에 따라 인간의 지각기관이 작동하는 방식, 세계를 바라보는 시점 등이 질적으로 변화하는 현상인 “연산의 질화(quarlculation)”가 나타났다.
인간은 인적 자본이 되며, 인간의 시간, 인간의 ‘주목(attention)’ 또한 교환가치가 있는 자본이 된다. 모든 것은 정량화되며 수치화된다. 그것이 바로 지구촌 시대의 글로벌 스탠다드이다. 문제는 이러한 수치화 속에는 ‘인간’이 없고, 인간이 숨 쉬며 살아가는 ‘삶의 공간’이 없다. 그 속에 있는 것은 생산과 소비의 덕목만이 있으며, 이러한 덕목은 ‘낭비’를 추구한다. 괜히 쟝 보드리야르가 『소비의 사회』에서 ‘낭비’를 소비사회의 덕목으로 본 것이 아니다. 이러한 숫자 놀음의 상황을 『오래된 미래』 속에서 흥미롭게 보여준다.
자급경제체제를 유지하는 오지의 나라이건 산업화 세계의 심장부이건 GNP를 사회복지의 주요 지표로 활용하는 국가의 재무시스템에는 분명 문제가 있다. 그런 시스템에서는 토마토를 팔거나 교통사고가 났거나에 상관없이 돈이 다른 사람의 손으로 넘어갈 때마다 GNP로 환산이 되어 더 잘사는 나라가 됐다는 결과를 낳는다. 그래서 환경이나 사회에 악영향을 끼치는데도 불구하고 GNP를 끌어올리기 위한 정책이 시행되기도 한다. 예를 들면 삼림의 나무들을 모두 베어 민둥산을 만든다 해도 국가의 대차대조표는 더 나아 보인다. 벌목이라는 것이 돈을 만드는 것으로 계산되기 때문이다. 범죄율이 증가하고 사람들이 오디오나 비디오 플레이어를 도난당해 새 것을 구입하는 경우에도, 또 노인이나 환자를 진료비가 비싼 의료시설에 입원시키는 경우에도 정서장애나 스트레스 때문에 상담을 받는 경우에도 물이 오염되어 병에 든 생수를 사서 마시는 경우에도 GNP 지수는 올라가게 되어 그만큼 경제가 성장한 것으로 측정된다.
정말이지 어이없는 상황이 되어버린 것이다. 자기 집 정원에서 기른 감자보다는 다른 지역에서 재배한 다음 가루로 만들고 얼리고 말린 밝은 색깔의 감자과자를 사먹는 게 경제성장을 위해서는 더 좋다고 한다. 이런 식의 소비과정은 더 많은 운송량과 더 많은 화석연료와 더 많은 공해물질과 더 많은 화학첨가물과 방부제가 소요된다. 또한 생산자와 소비자 사이의 간격은 더욱 벌어지게 된다. 그러나 그것 역시 GNP 상승을 일으키는 것이어서 경제성장의 차원에서 권장되고 있다.
개발 전문가들과 경제학자들이 선호하는 일차원적 진보관은 경제 성장의 부정적 효과들을 은폐하고 있었고 지역적 자급형경제구조의 가치를 가리고 있었다. 그에 따라 지구촌의 모든 사람들, 특히 제3세계의 농경 지역에 사는 수백만의 사람들 사이에는 상황에 대한 중대한 오해가 빚어질 수밖에 없었다. 개벌 프로그램들은 실제 그들에게 이익을 가져다주는 것이 아니라 낮은 수준의 생활수준을 정착시킬 뿐이었지만 그런 사실은 철저하게 미화되고 곡해되었던 것이다. PP.263~265.
바로 우리가 당연한 진리로 받아들였던 ‘숫자’. 바로 GNP를 통해서 말이다. 우리는 GNP, GDP, 경제성장률 등
에 민감하게 반응하고, 이러한 숫자들이 우리네 삶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다고 생각한다. 실제로 첨단의 소비사회를 살아가는 한국인들에게 이러한 숫자는 지대한 영향을 미칠 수 있다. 그런데 우리 솔직하게 이야기해보자. 진짜 이러한 숫자가 당신의 삶을 좌지우지 하였는가하고 말이다. 내년도 경제성장류를 0.5%로 오른다고해서 당신의 삶이 0.5%로 나아지지 않는다. 살림살이 또한 그 만큼 나아지지 않는다. 그저 희망할 뿐이지.,
호지가 책에서 말하고자 하는 것은 이러한 논지는 아니다. 그가 짚어내고 싶었던 것은 개발이라는 것이 삶의 질을 향상하기 위한 노력이 아니라, 숫자 놀음에 가깝다는 것이다. 경제성장이란 숫자 놀음을 하기 위해, 낭비를 미덕으로 삼고 개발을 이룩한다. 개발은 숫자를 키우기 위한 것이며, 키워진 숫자는 국가의 ‘부’를 대변한다. 문제는 이러한 숫자가 ‘시뮬라크르’는 아닐까하는 점이다. 무상의 기호이다. 헛된 환상일 수도 있다. 그리고 호지가 가장 크게 비난하는 것은 이러한 숫자놀음이 호지가 바라는 지속가능한 개발의 장애물로서 작용한다는 점이다.
서구식 경제개발이 갖는 결정적인 폐해 요인 가운데 하나는 정량적 분석 방법, 다시 말해 수치 자체에 더 큰 비중을 두는 분석 방법에 의해 주도되는 편협하고 단기적인 시각이다. p.287.
자급·자족하는 것. 우리가 직접 먹을 것을 구하고, 필요한 것을 생산하는 것. 이것은 경제 활동에 속하지 않는다. 분명 생산하고 소비하였는데 경제 지표에는 포함되지 않는다. 이것은 경제활동이 아니며, 숫자의 표기 속에서는 아무런 노동과 활동을 하지 않은 것으로 나타난다. 이러한 지표의 허점은 ‘집안일’에서 잘 드러난다. 우리가 외식을 하면 그것은 경제적 성장에 도움이 된다. 그러나 집에서 직접 요리를 하여 밥을 해먹고, 청소를 하고 빨래를 하는 노동은경제적 지표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 것이며, 숫자놀음상에서 보자면, 노동하지 않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한국에서 반세기동안 가정주부는 경제 활동 인구로서 인정받지 못한 것이다. 그들의 노동은 숫자로서 표기되지 않기 때문이다.
지속 가능한 개발
호지가 바라는 미래의 상은 무엇일까? 호지는 분명 개발에 대한 우려를 표하지만, 개발 자체를 부정적으로만 생각하는 것은 아니다.
나는 개발이라는 것이 꼭 파괴의 의미를 지니는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나는 라다크 사람들이 수세기 동안 영위해 온 사회적, 생태학적 균형을 희생하지 않고서도 그들의 삶의 수준을 끌어올릴 수 있다는 것을 확신한다. 그러나 그렇게 하기 위해 그들은 관습화된 개발의 방향을 답습하여 고유의 것들을 해체해 버리기보다 오래전부터 내려오던 그 기반 위에 새로운 것들을 건설해야 할 것이다. p.257.
그가 생각하기에 개발이라는 것은 필수불가결한 것이고, 단순히 반대할 수만도 없는 시대적 흐름이다. 단적으로 그가 라다크를 개발하는 것에 대한 문제점을 인지하고 크게 우려를 표한다고 할지라도, 개발을 바라는 라다크 사람들을 막아설 수는 없는 것이다. 그리고 그가 위의 인용문에서 이야기하고 있듯이, 개발이 단순히 파괴를 의미하지 않음을 직시하고 있다. 그가 비판하고 바라는 것은 시장경제의 글로벌화 과정 속에 지역 사회가 매몰되어, 얼굴 없는 타자의 배만 불려주는 파괴적 행위를 그쳐야한다는 것이다.
시장경제의 글로벌화 과정은 권력과 자원을 소수의 영향력하에 집중시킬 뿐 아니라 그 모든 것들을 도시 중심으로 종속시키기도 한다. 서구 도시에서 거주자의 수 자체가 줄어드는 경우가 있기는 하지만, 실제로 도심의 영향력이 날이 갈수록 증대되는 것이 현실이다. 정치와 경제 권력이 몇 안 되는 대도시에 점점 더 집중되면서 대부분의 외곽 지역은 심각한 쇠퇴 현상을 겪고 있으며 많은 사람들이 더 멀리 떨어진 지역에서 도심을 향해 통근을 하고 있다. p.324.
글로벌 시장경제 체제는 개발 지역민에게 제시하는 장밋빛 미래와 달리, 지역의 자원과 부는 거대 메트로폴리스로 흘러들어간다. 글로벌 시장경제체제는 마치 보이지 않는 삼투압 현상이 있는 것처럼 부는 집중화된다. 도시는 점점 더 거대해지고, 그 외의 지역은 점점 더 쇠퇴해 간다. 이 현상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예가 한국 아니겠는가? 인구의 3분의 1이 수도권에 모여 사는 나라도 흔치 않을 꺼다. 이러한 상대적 우위를 글로벌한 차원으로 넓혀보더라도 유사한 양태를 보인다. 세계의 부는 한곳으로 집중화되고 흘러들어간다. 어떠한 방법에 의해서든 말이다.
선진국들이 자원을 활용하는 방식은 실제로 저개발국의 입장에서는 절대로 답습하기 불가능한 것이다. 세계 인구 가운데 3분의 1에 해당하는 선진국 사람들은 전 세계 자원의 3분의 2를 소비하면서 나머지 사람들에게 자신들이 하는 대로 따라 하라고 말하는 것은 기만에 가까운 행위다. 개발이란 많은 경우 착취나 신식민주의의 완곡한 표현이라 할 수 있는 것이다. p.270.
그렇기 때문에 호지는 글로벌 시장경제에서 벗어난 새로운 개발을 추구하는 것이다. 그것은 지역에서 시작하여 지역에서 끝맺음을 하는 개발이다. 그리고 이러한 개발만이 제3세계 사람들에게 빈곤을 초래하는 시장경제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호지가 말하는 지속가능한 개발이란 무엇인가? 호지는 자신이 그리는 현실적인 미래상을 “라다크 프로젝트”를 통해 제시한다. 라다크 프로젝트는 라다크의 전통 문화부흥과 재생가능한 에너지 사용 장려를 위해 시작한 소규모 실험 프로젝트라고 할 수 있다.
겨울철 안정적인 난방연료 수급을 위해서는 레의 화폐경제권에 편입되어 수입된 연료를 사용할 수밖에 없었다. 이를 벗어나기 위해서 호지는 태양 에너지를 이용해 주택의 난방을 해결하려 시도한 것이다. 이를 위해 트롱브(Trombe)의 벽을 만들었는데, 이 시스템은 남쪽을 향하는 외벽에 두겹의 유리를 부착하고 햇볕을 흡수하도록 검은색으로 칠을 하고, 다른 쪽의 별들과 천장은 짚으로 덮어 열 손실을 줄이는 구조이다. 이것은 라다크의 전통 가옥의 구조에 쉽게 설치할 수 있었고, 현지에서 구할 수 있는 재료들을 활용하여 만들 수 있는 것이었다.
전통 문화부흥을 위해서 호지는 겔롱 판단과 한 팀이 되어 희곡을 쓰기 시작했다. 전통적으로 연극은 라다크 사람들이 즐겨온 대표적 엔터테인먼트였다. 첫 번째 작품은 <라다크여, 뛰기 전에 잘 살펴보라>라는 것으로, 라다크 프로젝트의 취지를 잘 요약하고 있다. 내용은 리그진이라는 서구 생활을 추종하는 라다크 청년이 미국에서 생활하고 온 라다크 의사를 만나면서 일어난 일을 그리고 있으며, 그 내용은 미국에서 인기를 끌고 있는 생활상과 제품들이 라다크의 전통적 제품과 흡사하다는 점을 그리고 있다. 연극은 초연 당시 500여 명의 관객이 모여들었고, 이후 지역의 지도급 인사들과 행정 관리들이 문화적 자부심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강연을 갖기도 했다.
이러한 활동이 추구하는 바는 명확하다. 불필요하는 무역을 줄여, 시장경제에 종속되는 일을 최대한 줄이고, 지속가능한 지역 자원을 개발하기 위해 애쓴다. 그리고 지역 경제를 지역민들이 자부심을 가지고 지켜나갈 수 있는 문화적 토양을 만들기 위해서 애쓴다. 이것이 내가 바라보는 ‘라다크 프로젝트’의 주요 골자이다.
라다크를 떠나며...
호지는 어느 심포지엄에 참석하였는데, 참석자들에게 아프리카에 외국의 야채 종자가 수출되기 전까지 그 사람들은 어떤 채소를 먹고 있었는지는 묻는 질문이 주어졌다고 한다. 그리고 그때 어느 스웨덴의 한 농업 전문가는 이런 말을 했다고 한다.
그들은 그 이전에는 야채를 먹지 않았고 그들이 먹었던 것은 잡초였다. p.275.
그 스웨덴의 전문가에게 아프리카 사람들이 먹었던 것은 그가 재배하고, 먹는 ‘채소’가 아닌 그저 어떤 풀이었던 것이다. 이러한 태도가 단순히 아프리카에 대한 시각일 뿐일까? 아니면 라다크와 같은 고도의 생활상을 간직하고 이들에 대한 태도일 뿐인가? 이러한 시각에서 한국인은, 한국 사회는 벗어나 있을까? 헤겔은 ‘동양적 전제주의’의 규정으로부터 동양 세계의 미성숙성과 자기 발전에 대한 무능력, 따라서 동양세계는 정체된 세계라는 결론을 이끌어 냈다 것을 아시는가? 그리고 이러한 규정에서 한국은 고려대상도 아니었다.
우리가 생각하는 보편주의, 보편성은 이러한 시각에서 시작되었다. 보편성이란 이름은 결국 특정한 세계 속에, 특정한 지평 속에 속해 있는 것이었다. 보편성을 주창한 이들 또한 그들이 서 있는 땅과 그들이 보는 문화 속에서 만들어진 산물인 것이다. 이러한 사실을 알고 있는 우리들은 쉽게 ‘알지 못하는 것’에 대해서 단정할 수 없다. 쉽게 개발을 외칠 수도, 보존을 외칠 수도 없다. 2부에서 이야기한 것처럼 지나치게 나서는 훈수쟁이는 게임판에서 물러날 수밖에 없다. 이러한 생각 때문에 나에게 호지가 운동하였던 ‘라다크 프로젝트’. 특히 연극 활동은 인상적으로 다가왔다. 그것은 훈수를 두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삶을 드러내는 것이기 때문이다. 언제나 훈수쟁이라 남아 있는 제3자로서 특정 지역사회와 소통하기 위해서는 공통의 관심사로 나아갈 필요가 있다. 그리고 그러기 위한 선행조건은 나의 관심사를 그들에게 이야기하고 드러내는 것이다. 그리고 나는 그것이면 훈수쟁이로서 충분하다고 본다. 지역에 대한 고민과 성찰, 그리고 방향성에 대한 판단은 그 땅을 딛고 사는 이들이 내리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