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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멜랑꼴로지 Feb 25. 2019

오래된 미래 : 라다크로부터 배우다 (2)

2부. 변화에 관하여

헬레나 노르베리 호지, 『오래된 미래 : 라다크로부터 배우다』, 양희승 옮김, 중앙북스, 2018.    




『오래된 미래』의 1부의 내용이 라다크가 아직 서구세계의 영향을 심각하게 받지 않았던 당시 호지가 경험한 것들에 대해 기술되어 있다면, 2부는 라다크가 서구세계에 영향을 받아 변화되는 상황을 호지의 눈으로 바라보고 있다. 


1부의 내용이 호지가 라다크에 느끼는 경이가 중점이라면, 2부는 호지의 변화에 대한 안타까움을 기술하고 있다. 정확히는 변화되는 것 자체에 대해 안타까움을 느끼기보다는 변화를 받아들이는 라다크 사람들에 대한 태도에 대한 안타까움이다. 2부에서 호지는 1부에 대한 나의 페이퍼에서 드러내었던 불만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바로 라다크 사람들이 가지는 경제적 발전에 대한 욕구 말이다. 라다크 사람들이 변화를 받아들이는 이유에는 호지가 경이롭게 느꼈던 전통적 삶에서 느꼈던 불만과 고통을 해소하기 위해서 아니겠는가라는 물음이다. 호지는 분명 이러한 지적에 대해 이해하고 있었고 인정하고 있다. 그럼에도 호지가 이러한 상황에 대해 안타까움을 느끼는 것은 크게 2 가지에 대한 우려라고 생각할 수 있다.     


전통을 잊으려 하는 것     


라다크의 젊은이들은 ‘전통’적인 것을 잊으려 한다. 정확히는 자신의 존재적 토양인 라다크(로컬)를 철저히 버리려 노력한다. 그것들을 버려야 화려해보이고 좀 더 나은 삶으로 나아갈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심지어 그러한 태도에서는 전통에 대한 분노도 함께한다. 서구세계가 보여주는 아름다움을 이제야 받아들이게 된 것. 서구처럼 라다크가 변화하지 못한 것은 기성세대가 지키려고 했던 ‘전통’ 때문이라고 느끼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자신이 경제적 성공, 부유한 삶을 살지 못한 이유를 전통에서 찾는 것이다.


이러한 태도는 사실 한국에서도 흔한 일이었다. 최근에는 이러한 태도가 적어졌지만 분명 전통에 대한 분노는 한국 사회에 만연해 있었다. 한국 사회는 세계적으로 특출 난 경제적 성장을 위해, 부유한 삶을 쟁취하기 위하여 산업화 이전의 전통적 생활상을 버리려 노력해왔다. 그 대상 중 하나가 바로 ‘유교’였고, 그와 더불어 삶을 지배해왔던 대가족 중심의 농경 사회였다. 수도권의 인구의 3분의 1이 올려 있는 이 비정상적인 국가는 경제적 부를 쟁취하기 위해 적극적으로 서구 사회의 시스템을 받아들이고 전통을 버려왔다. 그와 더불어 빠르게 농경 사회를 지탱해온 대가족은 핵가족화 되었고, 이제는 더욱 분열되어 1인 가구가 늘어난 상황이다. 


한국 사회가 산업화 되며 변화된 과정을 단순히 비판하거나 부정하기 위해 이러한 이야기를 한 것은 아니다. 이것은 시대적 상황이었으며, 이미 흘러온 역사적 변화였다. 현대 시대에 한국의 변화에 의해 혜택을 받아온 1인으로써 그 당시 과거를 버리고 새로운 것을 받아들이려 한 이들을 비방하고자 한 것이 아니다. 그저 『오래된 미래』를 통해 호지가 우려했던 것 중 하나가 무엇인지 생각해 볼 수 있다는 것이다. 우리는 서구 사회의 부를 이양 받기 위해 무엇을 버려왔는가? 그리고 버려야 했던 것들이 꼭 버릴 수밖에 없었는지, 그리고 그것이 더 나은 선택이었는지 생각해볼 필요는 있지 않은가하고 말이다.


호지는 도시인 ‘레’로 라다크 사람들이 모이고, 핵가족화 되어가는 라다크 사람들을 보면서 자신은 느끼지만 당사자인 라다크 사람들은 쉽게 버릴 수밖에 없었던, 분노의 대상으로 삼을 수밖에 없었던 ‘전통적 삶’에 대한 아쉬움을 느끼는 것이다. 인간은 언제나 당시의 코앞만을 보고 산다. 그렇기에 바둑은 훈수 두는 이들이 잘 보는 것처럼, 라다크에서 이방인이자 관찰자인 호지만 볼 수 있는 버려진 것들에 대한 아쉬움이 보이는 것이다.  

   

불안     


라다크 사람들의 변화를 보며 나는 어릴적 읽었던 알랭 드 보통의 『불안』이란 책이 떠올랐다. 여기서 『불안』의 원제목은 Status Anxiety으로 지위에서 오는 불안이라고 해석할 수 있다. 그리고 보통은 지위에서 오는 불안을 현대인들이 불안을 겪은 이유이다. 이것은 다른 말로 하면 ‘자수성가 담론’이 우리에게 가져다주는 불안이다. 우리는 자수성가할 수 있다. 우리는 노오오력하면 성공할 수 있다. 사회는 능력에 따라 사람을 평가하고, 좋은 능력을 가지고 있다면 사람들은 더 많은 부를 얻을 수 있고 성공하는 삶을 살 수 있다. 그리고 이러한 성공하는 삶이 바로 행복한 삶으로 나아가는 전조행위이다. 이러한 논의가 바로 자수성가 담론이며, 흔히 우리가 ‘아메리카 드림’이라 부르는 바로 이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담론이 주류를 형성하고 있는 사회가 현대 서구사회이며, 현대화된 한국 사회이다.


이러한 담론은 우리를 언제나 불안하게 만들고 불행하게 만든다. 자신의 지위를 잃지 않을까하는 불안, 남들과의 경쟁에서 뒤처지지 않을까하는 불안. 이 불안이 성공을 하는데 장애물이라 여겨지는 ‘전통’에 대해 분노하도록 부채질 한다. 자수성가 담론은 얼핏 보면, 노력하면 성공한다는 아름다운 이야기를 담고 있는 것으로 보이지만, 그 속의 논리는 행복과 성공의 책임을 개인에게 돌리고, 무한히 경쟁하도록 한다. 


호지는 이러한 담론 속을 자신의 몸을 던지는 라다크 사람들을 볼 때마다 안타까움을 느끼는 것이다. 호지는 능력주의에 의해 평가되는 사회가 가져오는 개인의 불행과 과도한 경쟁을 잘 알고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서구사회를 안타깝게 여겼고, 라다크 사람들을 경이에 차서 보았던 것이다. 재밌게도 보통의 『불안』에서 보면, 서구 농노 사회에서는 이러한 ‘불안’이 없었다고 이야기한다. 마치 라다크 사람들이 과거 스스로 가난하다 여기지 않고, 불안해하지 않았던 것처럼 말이다. 


과도한 무한 경쟁 사회와 능력주의 사회는 우리를 어디로 이끌고 있는가. 그것은 아메리카 드림의 본고장인 현재 미국의 현실을 보면 알 수 있다. 최근에 <수퍼맨 각성제>라는 다큐멘터리를 본적이 있다. 이것은 주로 ‘애더럴(Adderall)’이란 각성제에 관한 이야기를 담고 있다. 이 약은 원래 ADHD나 ADD 환자를 치료하기 위해 만들어진 암페타민으로 만들어진 약이다. 암페타민. 마약으로 잘 알려진 약이다. 그리고 애더럴은 이러한 암페타민을 주성분으로 만들어진 각성제이다. 문제는 이것이 사람들에게 집중력을 높여주는 약으로 인식된다는 것이다. 애더럴을 먹으면 집중력이 올라가고 좀 더 오랜 시간동안 집중할 수 있도록 한다. 그래서 학부모와 학생들 사이에서는 성적을 올려주는 약으로도 불린다. 


최근 미국 대학생의 대다수는 애더럴을 복용하고 있다고 한다. 애더럴은 구하기 쉽고, 먹는데 거부감도 적다. 그에 비해 효과는 뛰어나다. 대다수의 애더럴 복용자는 마약을 한다고 하기보다 학업 보조제를 먹는다고 인식한다. 다큐멘터리의 안잔 차터지 박사의 말이 기억에 남는다.     


“가끔 그런 농담을 해요. 제가 대학생이었을 땐 마약이 일탈의 수단이었는데 이젠 공부하느라 약에 의존하죠. 현대 문화를 잘 나타낸다고 생각해요.”     


대학생들뿐만 아니라 청소년, IT기술자, 월스트리트 금융인, 운동 선수 등 다양한 직위에서 애더럴을 활용한다. 애더럴을 싸고 효과 좋은 보조제이다. 이를 통해 그들이 원하는 것은 뛰어난 성과를 내고, 더 많은 돈을 벌기 위함이다. 즉 성공하기 위해 그들은 약을 먹는다. 간이 파괴되고 신장이 망가지며, 약에 의존하게 되더라도 그들은 약을 먹는다. 약을 먹지 않으면, 약을 먹는 이들을 따라갈 수 없기 때문이다. 그들이 이루고 있는 경쟁의 논리는 어떠한 수단을 활용하더라도 따라붙어야하는 상황에 놓인 것이다. 다큐멘터리의 웬디 브라운 박사는 말이 이러한 상황을 잘 설명해준다.     


“오늘날의 문제점은 적은 일자리나 대학 입학 정원 감소가 아니에요. 과열화된 경쟁 사회에서 살고 있다는 점이죠. 목표에 도달하면 끝나는게 아니라 경쟁이 끝없이 계속되는 거예요. 모든 사람은 이제 자신을 인적 자본으로 바라봐야 하죠. 부모는 애들이 태어나는 순간부터 아이가 지닌 인적 자본 가치를 걱정하게 돼요. 모차르트 같은 영재 교육을 태교 때부터 시작하죠. 유치원에 보내고 특정 운동을 시키고 특정 교육 과정을 배우게 하면서요. 이러한 불안감 때문에 아이들이 어쩔 수 없이 애더럴에 손을 뻗게 돼요. 부모가 권유하든지 고등학교나 대학교에서 주변 친구에게 권유받죠.”     


애더럴에 관한 이야기를 가지고 현재 미국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들을 살펴보았다. 그들이 애더럴을 복용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과도한 경쟁 때문이다. 미국에서 ADD 환자가 급증하는 이유 또한 자신이 ADD인척을 해서라도 약을 처방받기 위해서이다. 학부모들은 아이에 대한 걱정으로 쉽게 약을 먹인다. 이미 반의 절반 가까이 애더럴을 복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미국의 대학생들은 SNS를 통해 쉽게 애더럴을 사고판다. 실리콘밸리나 월스트리트와 같이 과도한 경쟁이 있는 곳에서는 모두가 애더럴과 같은 약을 먹고 있다. 기업에서는 직원들이 모두 약을 복용하는지 알더라도 외면한다. 약을 먹고 직원들이 일을 잘하면 기업에서는 좋은 일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상황이 단순히 미국에서만의 일이라고 생각할 수 있을까? 다큐멘터리를 보면서 나도 잠시나마 애더럴의 유혹에 빠지기도 하였다. 내가 처리해야할 일을 좀 더 능률적으로 처리할 수 있다면, 게으른 나를 약을 통해 대체할 수 있다면이라는 욕망이다. 자료를 찾아보던 중 충격적인 사실을 한국에서도 애더럴에 대한 관심이 높다는 점이다. 성인들은 자신의 능률을 올리기 위해, 그리고 학부모들은 자식들의 걱정에 의해 애더럴에 대한 정보를 구하고 찾고 있다. 


라다크에서 시작하여 엉뚱하게 미국에서 끝나게 된 이번 페이퍼에서, 나는 다큐멘터리의 마지막 말을 인용하여 끝내고자 한다. <슈퍼맨 각성제> 마지막은 웬디 브라운 박사의 말을 통해 그 끝을 맺는다.      


“애더럴은 우리 시대에 만연해 있는 약물이죠.모구가 애더럴을 먹게 된다면 우린 뭘 잃게 될까요? 그만한 가치가 있는 걸까요? 인간이 사색하고 반성하고 방황할 때 얻을 수 있는 것을 잃게 되는 거죠. 그래서 뭘 얻게 되냐고요? 창의성, 예술, 타인과 맺게 되는 멋진 관계죠. 극심한 고통과 슬픔의 순간이 찾아오기도 하지만 오롯이 인간이기에 할 수 있는 경험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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