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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멜랑꼴로지 Feb 23. 2019

오래된 미래 : 라다크로부터 배우다 (1)

1부.  전통에 관하여

헬레나 노르베리 호지, 『오래된 미래 : 라다크로부터 배우다』, 양희승 옮김, 중앙북스, 2018.     


    

『오래된 미래』 1부는 헬레나 노르베리 호지가 라다크에서 생활하며 보고 느겼던 것들에 관한 것이다. 1부의 대부분 내용은 라다크가 아직 서구세계의 영향을 심각하게 받지 않았던 당시에 헬레나가 경험한 것들이다. 그녀는 1975년 처음 라다크에 갔었고, 16년 간 라다크에서 생활을 하였다. 라다크가 서구의 영향을 크게 받은 것은 1985년에서 1986년부터라고 한다.


사실 1부의 내용은 라다크가 어떤 곳인지 그리고 라다크 사람들은 어떠하고 라다크의 공동체는 어떻게 이루어져 있는지에 대한 것이 대부분이며, 이러한 설명들은 모두 호지가 직접 겪은 경험들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실제적으로 1부는 크게 ‘어젠다’를 제시한다기 보다 호지가 본 라다크에 대한 정보와 감상에 치우쳐져 있다. 


호지가 보기에 라다크 사람들은 자연과 벗살아 살아가며 욕심을 부리지 않는다. 또한 그들은 개인의 삶에 치중하기 보다는 유기적인 전체에 집중하며 함께 하는 삶을 추구한다. 이러한 삶에 대한 자세는 정신적으로는 종교적 믿음이 밑바탕이 되고, 실천적으로는 공동체 내부의 제도를 통해 완비된다. 


라다크는 대승불교에 큰 영향을 받고 있다. 레에는 무슬림도 있지만, 라다크 사람들은 대체로 불교를 믿고 있으며, 이는 티벳의 영향이라고 할 수 있다. 호지에겐 신기한 불교의 ‘공(公)사상’, 연기설 같은 것들이 라다크 사람들에게는 생활 양식으로 남아 있으며, 삶을 대하는 자세나 공동체를 묶는 정신 밑바탕에 깔려 있다. 그렇기 때문에 라다크 사람들은 크게 슬퍼하지 않으며, 모든 것에 감사할 줄 알고 만족할 줄 안다. 모든 것은 인연(因緣)으로 묶여 있고, 모든 것은 ‘여여(如如)’하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은 단순히 개인의 삶이 외따로이 있는 것이 아니다. 


라다크 사람들은 자신들의 공동체적 삶을 제도화 시켰으며, 협동은 많은 사회제도 속에서 구체적인 모습을 갖추고 있다. 먼저 파스푼이라는 공동체가 있는데, 몇 가구 단위의 공동체로서 장례, 출산, 결혼과 같이 한 집안에서 처리하기 힘든 대사를 파스푼이란 공동체가 모여 해결한다. 그리고 우리네 품앗이와 같은 제도가 있는데 이를 베스(Bes)라고 부르며, 재미있는 점은 함께 농사를 하기 위해 일을 미루기도 한다고 한다. 그리고 염소 보기라는 뜻하는 ‘라레스(Rares)’를 통해 라다크 마을 사람들은 공동으로 가축을 돌본다. 이를 통해 각각의 농가들은 가축을 돌보는데 노동력을 줄이고 그 시간을 다른 일에 투자할 수 있다. 또 사유재산을 공동으로 이용하는 제도도 있는데, ‘랑제(lhangdse)’라고 한다. 이를 통해 라다크 사람들은 농기구나 가축을 함께 사용함으로써 생산수단을 효율적으로 활용한다.      


“건강한 사회란 구성원 사이의 친밀한 연관관계와 서로 돕는 분위기를 더욱 붇돋아주어야 하는 것이며 개개인에게 무조건적으로 정서적인 지원을 제공할 수 있는 사회를 말한다.” P.176.     


위의 인용을 간단히 말하자면 결국 ‘더불어 사는 사회’아닐까? 더불어 산다는 것은 둘 이상이 함께 서는 것이고 같이 사는 것이다. 그리고 이렇게 함께하고 같이 하는 것이 개개의 사람들의 마음 속에 버팀목이 되어 행복한 삶을 살 수 있도록 도와준다. 그렇기 때문에 호지는 라다크의 사회를 건강한 사회라고 한다. 그런데 재밌는 점은 라다크 사람들이 이루고 있는 협동의 구체적 모습이 우리에겐 익숙하다는 점이다. 경조사에 축의금과 조의금을 내고, 공동체에서 상조회를 운영하고, 필요할 땐 품앗이를 하고, 공동의 재산을 만들기도 한다. 물론 이러한 모습은 다양한 면모로 변하였지만 여전히 우리 생활 속에 남아 있다. 특히 옛 농경 사회에서는 이러한 모습들이 더더욱 흡사하게 있었다. 그렇기 때문일까. 호지에게는 책으로 남겨야할 만큼 경이로운 모습일지 모르겠지만, 내가 보기엔 익숙하고 흔한 광경이었다. 아니, 제레미 리프킨이 『한계비용 제로 사회』에서 ‘공유 사회’에 관한 논의를 보면 서구에서도 저러한 면모가 있었으며, 리프킨은 지금도 있다고 말한다. 리프킨에 따르면, 서구에서 이러한 면모는 “존재의 거대한 사슬(Great Chain of Being)”의 관념 아래 봉건 시대를 지배해온 경제 시스템으로서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형태의 제도화된 민주적 관리 방식이었다. 공유 사회는 교환보다는 주로 생존을 목적으로 생산과 소비가 이루어졌던 자급자족 기반의 농경 공동체에서 비교적 성공적인 관리 모델이었으며, 오늘날 순환 경제의 전형을 일찍이 보여주었다. 이 ‘공유 사회’ 개념은 오늘날에 사라진 것이 아니라 여전히 우리네 삶의 깊숙이 들어와 있고 많은 이들이 공유사회에 참여하고 있다. 오늘날 우리는 자선단체, 아마추어 스포츠클럽, 예술 및 문화 집단 생산자 및 소비자 협동조합, 신용협동조합 시민단체, 종교단체, 아파트 입주자 회의 등 공식적이든, 비공식적이든 사회적 자본을 창출하는 대부분의 조직이 모두 여기에 포함된다고 이야기한다.


호지가 리프킨이 말하는 논의를 모를 리 없었을 것은 아니다.. 그러나 호지가 놀란 이유를 좀 더 생각해보면, 직접 보고 느꼈던 라다크 사람들의 삶에 대한 ‘태도’가 아니었을까 조심히 유추해볼 수 있다. 단적인 예로 한국에서는 결혼을 할 때 지인들이 축의금을 낸다. 축의금은 결혼하는 이들을 축하한다는 의미의 선물이기도 하지만, 공동체로서 목돈이 드는 결혼을 돌아가며 돕는다는 의미도 강하다. 그러나 축의금을 내는데 어찌 기뻐하며 돈을 내는 이 있던가? 결혼은 축하하지만, 지갑을 빠져나가는 돈을 생각하면 언제나 아깝다. 심지어 생전에는 연락도 않던 이들이 결혼한다고 연락 오면, 돈 내라는 것 같아 얄밉기도 하다. 그러나 라다크 사람들은 공동체적 행위를 하는 것 자체를 즐긴다. 그것이 함께 하는 삶을 직접적으로 느끼게 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렇게 생각해보면, 자본주의가 들어선 이래로 노동의 소외가 일어났듯이, 축의금이 생기고 나사 ‘행위의 소외’가 생겨났기 때문은 아닌가 싶다.      


소국과민     


라다크 사람들이 이러한 공동체적 삶을 살 수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 나는 그 이유를 노자의 ‘소국과민’에서 찾았다. 현대식으로 풀이하자면, 유사한 방식으로 풀뿌리 민주주의 정도 될까 싶다. 소국과민은 『노자(老子)』 80장에 나오는 말이다.      


소국과민 小國寡民;나라는 작고 백성이 적어서
사유십백지기이불용 使有什伯之器而不用;온갖 문명의 이기가 있어도 이를 쓰지 못하게 하고 
사민중사이불원사 使民重死而不遠徙;백성들이 생명을 소중히 여겨 멀리 옮겨 살지 않도록 하면
수유주여 무소승지 雖有舟輿 無所乘之;배와 수레가 있더라도 타고 갈 곳이 없고 
수유갑병 무소진지 雖有甲兵 無所陳之;갑옷과 군대가 있어도 진칠 곳이 없다.     


춘추전국시대 개별 나라들은 “죽느냐 사느냐?”라는 극단적인 경쟁 상태에서 규모를 키우는 것이 살아남을 가능성이 크다고 봤다. 그러한 욕망이 바로 나라를 경제적으로 부유하게 하고 군사적으로 강하게 하자는 부국강병의 논리로 구현됐다. 노자는 확대와 가속만이 살길이라며 부국강병을 외치는 시대에 반대로 축소와 감속을 외치는 소국과민(小國寡民·작은 나라 적은 백성)을 주장했다. 좀 더 이야기를 덧붙이자면, 『도덕경』 17장을 보면 노자가 생각하는 이상적인 국가를 이해할 수 있다.     


太上, 下知有之 최고의 단계에서는 백성들이 통치자가 있다는 것만 안다.
其次, 親而譽之 그 다음은 친밀함을 느끼고 그를 찬미한다.
其次, 畏之 그 다음은 그를 두려워한다.
其次, 侮之 그 다음으로는 그를 비웃는다.          


노자가 이상적으로 삼는 공동체란 수직적 위계에서 벗어난 작은 공동체이며, 이 작은 공동체 속에서 지배와 제도는 실효적 범위 속에 속해 있다. 즉 작은 공동체이기 때문에 각각의 삶이 함께하며 묶여 있다. 그렇기 때문에 얼굴 모를 타자가 공동체 속에 속할 수 없으며, 다른 이의 삶을 좌지우지 할 수 없다. 노자의 이러한 국가관은 이상적이라고 많은 비판을 받았다. 그러나 라다크에서는 노자의 이상적 공동체가 실현된 것은 아니었을까? 물론 2부에서의 내용을 통해 라다크 또한 결국 이상적 공동체에서 세상의 탁류로 흘러들어온 듯 하지만 말이다. 

이러한 국가관이 여전히 이상적으로 남는 이유는 모두가 작은 공동체로 함께 나아가지 않는 이상, 덩치 크고 힘 쎈 놈한테 휘둘리기 때문이다. 안타깝게도 작은 공동체란 작은 마을이며, 작은 경제이자 작은 힘이다.      


헬레나 노르베리 호지     


 라다크 사람들은 끊임없이 노동하고 생산물을 만들어야 하지만, 헬레나가 보기에 라다크 사람들의 삶은 행복하다. 그들은 언제나 부지런히 움직이며 공동체를 통해 여러 문제들을 해결한다. 공동체는 그들의 삶의 버팀목으로 다양한 노동이 가능하도록 한다. 그녀는 라다크 사람들이 당면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도구를 활용하기보다 공동체의 힘으로 노동하는 것을 보고 공동체의 힘에 감탄한다. 심지어 그녀는 해발 1만 6000피트의 고원 나이말링에서 양을 치는 어린 소녀의 모습을 보고, 라다크의 어린이들은 일찍부터 일을 시작하면서 책임감의 의미를 배운다며 감동을 받는다. 


그리고 나는 이러한 헬레나의 태도에 아주 불편하다. 내가 불편한 것은 헬레나의 말과 달리 라다크 사람들이 불행하기 때문이 아니다. 끊임없이 일해야 하는 라다크 사람들이 불쌍하기 때문도 아니다. 불쌍해해서도 안 된다고 생각한다. 내가 불편한 것은 헬레나가 자신이 비판하는 서국 관광객들과 서구인들과 크게 다르지 않다는 점이다. 그녀는 언제나 라다크 사람들의 겉을 보고, 자의적으로 해석한다. 단적으로 말해, 내가 보기에 어린 나이에 노동을 해야 하는 어린이를 보고, “아아, 저 아이는 어릴 적부터 일을 해서 책임감을 배우는구나”하고 감탄을 하는 헬레나의 모습은 산업혁명 당시 미성년 노동자들의 고통을 아는 이로서 보일 수 있는 모습인지 갸웃거린다. 


여기서 내가 말하고자 하는 바는 어린이 노동자들을 노동에서 구제하여 배움을 주자고 달려드는 것이 아니다. 그보다는 헬레나가 쓴 『오래된 미래』라는 책이 라다크 사람들에 대한 서구인의 관찰을 통한 자의적 해석이라는 생각이 떠나지 않는 다는 것이다. 이러한 면모를 책에서 꾸준히 찾아볼 수 있지만, 그 중 하나를 뽑자면 다음 부분이다.     


“라다크에는 어머니가 결혼을 하는 맏딸에게 그 페라크 머리 장식을 대대로 물려주는 것이 관습이라고 하는데 이렇게 한 집안의 모든 재산권이 여성에게서 여성으로 승계된다는 것을 알려주는 이러한 관습은 라다크 사회에서 여성의 지위가 얼마나 높은 것인지를 시사하고 있다.” p.136.     


 헬레나는 라다크의 어머니가 결혼하는 맏딸에게 대대로 머리 장식을 물려주는 것을 통해 한 집안의 모든 재산권이 여성에게서 여성을 승계된다고 설명한다. 그리고 이러한 관습이 라다크 사회에서 여성의 지위가 얼마나 높은 것인지를 시사한다고 말한다. 그런데 대대로 내려오는 ‘페라크 머리 장식’. 마치 예전에 어머니 혹은 시어머니에게서 물려 내려오던 과거의 ‘옥반지’가 생각나지 않는가? 혹은 언제나 결혼식에서 사랑받는 ‘다이아몬드 결혼 반지’가 떠오르지 않는가? 이러한 관습이 여성의 집안의 재산권을 승계한다는 것을 보장할 수 있는가? 한 사회의 여성의 지위가 얼마나 되는지 나타낼 수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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