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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멜랑꼴로지 Aug 08. 2018

디오니소스와 로코코

미셸 마페졸리의 『디오니소스의 그림자』 서평

들어가는 말     


  마페졸리는 자신의 저서 『디오니소스의 그림자』의 제목에서 알 수 있듯이, 디오니소스를 앞세우며 자신의 이야기를 전개해가고 있다. 그는 디오니소스를 앞세우고, 광란(Orgie)이라는 말을 드러냄으로써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가. 우리는 마페졸리가 앞선 그의 학문에서 민중의 삶, 그리고 그 민중이 매일 겪는 ‘일상’에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는 점과 그가 자신의 주장을 말함에 있어 사용하는 “마치 그런 것 같은(comme-si)"라는 말을 통해 그의 의도를 엿볼 수 있다.


    “넒은 의미에서 집안의 여자들처럼 내팽개쳐진 감정이라는 것은 사회적 활동 속에서 그 효력이 재확인 된다. 이해를 잘하자. 이 가설은 그 어떠한 품위 있는 만장일치(unanimisme)를 우리의 준거로 삼자는 것이 아니며, 이제 사회적 관계를 지배하게 될 어떤 미묘한 감정을 말하는 것도 아니다.”                           

                                            미셸 마페졸리(2013), 『디오니소스의 그림자(L'ombre de Dionysos), p.38


그는 광란(Orgie)이라는 표어를 통해 (그가 말하는)성실한 프로메테우스의 사회를 전복하려는 것이 아니며, 개인과 합리화의 앞에 집단성(총체성)과 광란을 두고자 한 것도 아니다. 사회에서 성실한 프로메테우스를 의미하는 “이성은 지속적으로 존재 발전에 참여”할 것이다. 단지 마페졸리가 하고자한 작업은 프로메테우스의 횃불에 잊어진 디오니소스의 그림자를 우리에게 소개하여, 잘게 쪼개지고 분석되어지던 ‘일상’의 세계를 ‘느껴지게’하고자 한 것이다. 그가 말하는 광란은 우리네 삶과 동떨어진 것이 아니며, 마페졸리가 임의적으로 만들어낸 개념이 아니다. 광란이 우리와 같이 했음은 우리네의 경험을 통해서 간단하게 예시를 들 수 있다. 

  2002 월드컵은 마페졸리가 말하는 디오니소스적 광란을 명확히 드러낸다. 관능성, 열정의 분출, 집합성, 사교성, 퇴폐성, 연극성, ‘비도덕주의 윤리’, 파레토가 말하는 “잔기(résidu)”에서 엿볼 수 있는 “결합의 본능”, “집합체들의 끈질김”, “외적 행동을 통해 자신의 감정을 드러내려는 필요성”, 성적 잔기 혹은 “사교성과 관련된”잔기 등이 총체적으로 나타난 사건이다. 2002년 월드컵 당시에 사람들은 월드컵이라는 축전 속에서 태극기로 혹은 다른 나라의 국기로 얼굴을 가리고, 붉은 악마 티셔츠를 동일하게 입었다. 그들은 그 축전 속에서 개인이 아닌 한국, 혹은 월드컵을 즐기는 군중이라는 결합을 ‘몸소’ 느꼈으며 그 속에서 그들의 욕망을 드러내었다. 그 당시 광란에 빠진 군중들이 밤새 크락션을 울리고 자동차를 뒤집어엎고, 자동차 지붕위에서 섹스를 즐기는 모습은 그전까지 한국에서 볼 수 없었던 집단적 광란 상태이자 마페졸리가 말하는 아노미를 잘 나타내고 있다. 



예술 사조에서 나타나는 디오니소스와 프로메테우스     


  18세기 프랑스의 예술 사조와 사회 배경을 통해 우리는 디오니소스의 광기가 어떻게 나타나고 특징지어지는지를 알아보고자 한다. 짧은 시간 내에 고전주의에서 로코코 양식으로 그리고 다시 신고전주의가 시작된 시대이기 때문이며, 절대왕정으로 군림하던 루이 14세의 죽음 이 후 귀족들과 오뛰 부르주아의 행동을 통해 프로메테우스의 종말 이 후의 사람들의 생활양식도 엿볼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하기 때문이다.

   예술 작품은 고립되어 있지 않다. 먼저 개별적인 예술 작품은 그 예술 작품을 만든 예술가의 다른 작품들 속에 있으며, 그 예술 작품들의 집합은 서로 유사성을 지니고 있다. 동일 작가의 작품들은 그 예술가의 스타일과 사상이 녹아들어가 있으며, 그 예술가의 삶과도 많은 연관성을 맺고 있다. 그렇기에 우리들은 예술가를 통해 예술 작품을 해석하기도 하며, 유명한 예술가의 작품은 이름을 감추더라도 유추할 수 있는 것이다. 두 번째로 예술 작품이 고립된 존재가 아닌 이유는 그 예술 작품을 만든 예술가가 고립된 존재가 아니기 때문이다. 예술가는 같은 시기, 같은 국가의 유파나 계통에 속하여 있으며, 그렇기에 사조가 만들어진다. 예술가는 그 당대를 살아가는 존재이다. 예술가들은 예술을 바라보는 관점이 비슷한 다른 예술가들과 기술과 생각을 공유하였으며. 많은 영향을 주었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이 만들어낸 예술 작품은 고립될 수 없는 것이다. 서로 영향을 주었던 예술가들의 예술작품에는 그들만의 유사성을 띄고 있으며, 그 작품들은 작가만의 독창성을 가지고 있을 수 있으나 그 속에는 예술가들이 서로 공유하였던 유사성이 자리 잡고 있다. 예를 들어 셰익스피어와 같은 시기에 활동 했던 극작가들인 웹스터, 포드, 매신저, 말로, 벤 존슨, 플레처, 보몬트 등이 셰익스피어의 희곡과 동일한 특성을 나타낸다는 점이나 들라쿠르아의 『단테의 작은 배』가 그의 친우인 제리코의 『메두사호의 뗏목』에 영향을 받았다는 점 등을 들 수 있겠다.(이폴리트 텐(2013), 『예술철학』, p.17)  결국 예술 작품이 고립될 수 없는 이유는 그 예술 작품을 만드는 예술가과 그 시대의 삶을 살아가기 때문이다. 예술가들은 어디 외따로이 고립된 존재가 아니라 세상 속에서 맞부딪치며 살아가는 존재들이다. 예술가들의 풍속과 사고방식은 그 당대의 민중들과 다르지 않으며 같은 시대정신과 문화를 공유하고 있다. 소크라테스가 그리스의 시민으로서 3년 간 군 생활을 한 것처럼, 예술가들의 삶 또한 그 시대의 다른 이들과 다르지 않은 삶을 살았던 것이다.

  예술 작품이란 결국 그 작품의 예술가를 배제할 수 없고, 그 예술가에게는 많은 영향을 준 예술 집단과 사회가 존재하였다. 그렇기 때문에 작품의 올바른 이해를 위해서 우리는 그 시대의 사고방식과 풍습의 일반적 상태를 파악해야 한다는 점이다. 아이스킬로스, 소포클렛, 에우리피데스로 대표되는 고대 그리스 비극은 여러 도시국가들이 공화정 형태를 유지하던 영웅시대였으며, 부셰와 와토의 그림이 팔리던 18세기 시대에서는 루이 14세의 꽉 막히는 절대왕정에서 벗어난 귀족들과 부르주아들이 파리로 향락을 즐기던 시대였고, 다비드는 공화정의 발호를 거쳐 나폴레옹 제정의 찬양하다가 나폴레옹 제정의 몰락 후 좋지 못한 말년을 보낸 것처럼 말이다.

  18세기 프랑스에서 가장 큰 사건은 1715년 루이 14세의 죽음이다. 루이 15세는 1715년 루이 14세가 죽고 5세 왕위에 오르고, 오를레앙 공작이 루이 15세를 통해 섭정을 시작한다. 그 이후 절대왕정은 붕괴되고 귀족들은 베르사이유 궁전에서 파리로 돌아오게 된다. 귀족들과 사람들은 더 이상 장엄함과 위대함으로 치장되어 있는 베르사이유 궁전에 있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베르사이유 궁전은 루이 14세의 그림자이자 절대 왕정을 상징하기 때문이며, 일상에서 장엄함과 위대함이란 불편함과 동의어가 된다는 점이다. 높고 넓은 방, 높은 의자 딱딱한 가구 등은 왕의 장엄함과 위대함을 나타내었지만 그 속에 살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불편함만을 가져다주었다. 높고 넓은 방은 난방이 잘 되지 않았으며, 그 속에는 그들만의 사교적인 공간, 내밀하며 은밀한 공간이 존재하지 않았다. 

  그래서 파리로 돌아온 귀족들은 내밀함, 따뜻함, 안옴함, 심플함이 중요시 되었고 이러한 양식이 로코코 양식으로 나타나게 되었다. 로코코 양식은 원래 로카이유 양식이라고 하는데, 로카이유 양식이란로카이유는 돌 더미, 돌이 쌓여 있는 것이라는 의미가 있는데, 정원을 꾸밀 때 조개껍데기나 돌로 장식을 하여 정원을 꾸미는 것을 의미하며, 장식을 뜻하기도 한다. 돌 사이사이에 꽃들을 심고 꾸미는 것이 원래의 로카이유 양식이다. 18세기에 와서 로카이유 양식이 확장된 의미로 지칭되게 되고 단순한 정원 양식에서 회하, 건축 등을 말하게 되었고 장식 예술 전반을 의미하게 된다. 로코코 양식은 장식적인데, 둥글고 꼬여있고 소용돌이가 많고, 조개 문양, 꽃, 과일 비대칭적, 여성적 실내 장식품을 사용하는 장식이다. 그리고 훨씬 편편함을 추구하고, 루이 14세 시대 보다 규모가 작고 아기자기한 멋이 있었다.                      

프랑수아 부셰 - 사계 중 겨울(1755)

  로코코 양식이 여성적인 것에는 로코코 양식이 사용되었던 처處가 바로 살롱이었기 때문이다. 18세기에는 살롱 문화가 꽃을 피우게 되었고 살롱 문화는 여성들을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살롱 문화란 로코코 양식으로 꾸며진 규방에 여성이 남성들을 초대하는 모임, 파티와 같은 것으로 귀족들의 퇴폐와 사랑, 관능성과 음란함이 모여 있던 곳이다. (사드의 철학이 규방 철학인 이유는 사드의 철학에는 이 살롱 문화가 포함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로코코 양식은 음란함과 퇴폐, 사랑에 관한 예술을 하는 양식으로 사람들에게 알려지게 되었다. 로코코 양식 속에서 우리는 디오니소스의 전형적인 형태를 찾아볼 수 있다.  디오니소스적 위계에서는 개인화의 법칙, 돌출한 권력이 더는 존재할 필요가 없는 순간이다. 집합적인 것은 그 자체로 스스로 나타내기 때문이다. 그 속에서는 논리를 교란하는 것으로 억압을 해제하고, 디오니소스적 위계인 매개적인 위계들은 나선형적이며 방향 전환적인 이중적 움직임 속에서 고정적인 기능이나 제도적 경직화, 종양처럼 불거져 나온 높은 지위 같은 것을 필요 없게 만든다. 그렇기에 수직적인 도덕은 사라지고, 균형이 중요시된다. 균형은 사회적 동의가 존재하는 비도덕적인 윤리이며, 서로 관련되어 있으며 서로를 필요로 하는 다기능적 균형과도 같은 “우주적 호흡”이기도하다. 

  광란이 폭력의 기반 위에 자리 잡고 있다는 사실을 숨길 수 없는데, 폭력은 과도한 생명력의 분출이며 균형의 어그러짐 속에서 나타나는 질서의 붕괴이기 때문이다. 광란의 ‘표현할 권리’를 부당하게 거부한다면 결국 난폭하며 통제 불가능한 반격에 처할 수 있다. 문명의 공간 속에서 아폴론적 가치가 적절하지 않은 우위를 점하는 경우는, 난폭한 어둠을 최악의 무절제함으로 몰아붙이는 것이며, 이러한 상황을 보여 주는 예인 학살, 참화, 유대인 학살 또는 다른 종족 말살 등은 흔히 이성의 독립적인 지배 이후에 야기된다. 홀로코스트와 같은 사건은 억제된 본질적인 폭력이 대거 복귀하는 위험이다. 그들은 디오니소스가 가지는 광란적 폭발을 통해 특정한 의무의 강제를 상쇄하며, 그래서 총체적인 균형을 복원시킨다는 사실. 집합적인 상징으로서 그림자(L'ombre)를 활용하고 의례화하는 디오니소스의 지혜를 외면했기 때문이다.

  로코코 양식을 이끌었던 이들이 여성이라는 점, 그리고 광란의 장소로 사용되었던 살롱, 음란함, 퇴폐, 관능성 등 극대화되었던 시기인 것이다. 관능의 신비성은 기본적인 사교성 속에서 열정의 유기적 특성이나 차이들의 같은 기초적인 중요한 문제들을 제기한다. 그리고 그것은 “우주적인 것”에 대한 사항에서 삶에 대한 분석으로 연결된다. 그리고 그 속에서 광란이 본질적으로 타자성과 관련을 가지는 한 형식임을 상기시킨다.

  성적욕망은 자신을 지배하는, 개인의 구체적인 기능만이 아니며, 오히려 그 자체로 쉽게 설명할 수 없도록 얽혀 있는 삶과 죽음의 신화를 되풀이하여 보여주는 “원형적인 표현”이라 할 수 있으며 자유주의(자유주의와는 다르게 무정부주의는 국가란 존재하지 않는 가운데의 질서를 의미한다)의 전통에서처럼 디오니소스적인 것 속에서 지배적인 혼돈은 괴테 이후 “유동적 질서(Beweglicher Ordnung)”라고 부를 수 있는 견고한 유기체성과 맥을 같이한다.

  원형적 표현과 유기체성은 “사회적 본능을 과장되게 표현한 산물”로써 “탄생의 순환”, “부활의 끝없는 연속”과 같은 시간의 순환, 만물과 종(種)의 영원성, 인간과 자연의 연결, 사교성을 타나낸다. 이러한 것들은 우주의 요소들 간에 존재하는 ‘지속성’에 대해 느끼는 민중의 단단한 믿음을 보여준다. 마페졸리는     


“나는 한 책에서 세계(le mundus)이 쓰레기를 버리고, 사형수를 처리하고, 아버지에 의해 버려진 아이를 버리는 구멍(trou)이 있었음을 상기시킨 바 있다. 이 구멍은 세계의 지속성을 보장해주는 저장소였던 것이다.”


라고 말하는데 이 구멍은 존재와 만물의 끊임없는 연결 고리를 상징화하고 있으며, 이 또한 인간이 거대한 사회 속에 그리고 우주 속에 유기체적으로 연결되어 있음을 잘 나타내준다. 이것은 마치 어머니와 뱃속의 아기를 연결시켜주는 탯줄과 같은 것이며, 마페졸리는 이 구멍을 통해서 나타나는 사교성은 유대와 전체성의 상징으로서 인간, 동물, 무생물이 몸담고 있는 “태반”이라고 말한다. 귀족들은 절대왕정에서 벗어나 그 동안 억제되어 있던 자유를 만끽하고 그들의 사랑과 낭만, 퇴폐를 노래했다. 귀족들은 그들의 부인의 벗은 몸을 모두 알고 있을 정도로 그들의 부인을 공유했고, 그것을 터부시 여기지 않았다. 살롱이라는 은밀한 공간 그 속에서 귀족들은 고전주의가 주는 억제에서 벗어나 로코코가 주는 가벼움에 도취된 것이다. 그 당시 귀족들과 부르주아의 살롱은 다양한 만남과 모험을 가능하게 해주는 “특별한 공간”이었다.

  디오니소스는 밤, 암흑, 어둠의 요소로 상징되는데, 블로흐는 “어둠의 순간”이 모든 사회적이며 개인적인 구조화 속에서 본질적으로 존재한다는 것을 기억할 필요가 있으며, 바슐라르가 지하실 속의 어둠이 우리의 내밀함을 나타냄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밤, 어둠의 순간은 삶과 죽음의 교감이며 모든 것의 교환이자 우주의 내밀함이 표출되는 순간이다. 그렇기에 “어둠의 순간”이 일상의 삶에 통합되면서 균형이 잡힌 사회를 찾아볼 수 있다. 그리고 이 통합을 통해서 어둠의 순간은 수렴된다.                      

다비드 - 호타리우스 형제의 맹세 (1784)

  고전주의의 반발로 로코코 양식이 나왔듯, 과도하게 분출되었던 광란은 빠르게 그 자리를 신고전주의에게 내준다. 마페졸리는 시간 속에서는 리듬이 존재하는 데, 그것은 근육이 긴장과 이완을 반복하는 것과 같다고 말한다. 프로메테우스와 디오니소스로 대비되듯이 그리고 그것을 횃불과 그림자로 대비하듯, 낮과 밤으로도 대비할 수 있다. 그것은 심장이 맥동하여 생명력을 뿜어내는 것과 같이 우주가 시간의 리듬 속에서 맥동하는 것이다. 신고전주의는 18세기 중반 부에 탄생한 사조로 가볍고 경박하고 은밀한 주제를 다루는 로코코 스타일의 반대급부로 나타난 사조이다. 사람들은 점점 더 가볍지 않은 엄격한 것을 추구해야 한다고 생각하였고 고대 그리스 로마 예술로 눈을 돌리게 되었다. 그리고 그 당시 1748년 폼페이 유적과 에라쿨라눔이 발견되고, 이탈리아에 피란세스가 로마의 예술에 관한 이야기를 책을 출판하게 되면서 부흥하게 된다. 신고전주의는 도덕주의에 관한 가치들이 중요시 대두되고, 공동체, 애국심, 도덕적 가치, 용기, 영웅주의가 중요하다는 사회적 분위기에 발맞춰 나온 사조이다. 이 신고전주의는 공화정의 가치를 칭송 하는데 사용되어 진다.  로코코 양식에서 신고전주의로 넘어가는 시대상은 소란스런 디오니소스를 대신하여 다시금 성실한 프로메테우스가 횃불을 높이 치켜든 것이다. 하지만 마페졸리에 말처럼 ‘당위-존재’의 도덕주의적 가치는 전체주의로 넘어가기 쉽다. 공화정을 외치던 이들이 나폴레옹의 제정을 칭송하게 되고 전쟁을 일으키는 것처럼 말이다.

  18세기에 어지러운 예술 사조와 시대 상 속에서 우리는 디오니소스와 프로메테우스가 끊임없이 ‘균형’을 맞추려 노력했다는 것을 단적으로 볼 수 있다. 마페졸리는 디오니소스의 그림자 첫 머리 부분에서 말한다. 과도한 것 또한 과소한 것만큼 나쁘며, 과소한 것 또한 과도한 것만큼 위험하다고 말이다. 중요한 것은 ‘균형’이다. 그리고 균형은 지배하지 않기에 무질서한 곳에서 서로의 윤리를 찾는 것이며, 그렇기에 “긴장 속에서 사회적인 것의 모든 요소들을 같이 유지하는 것”이다. 우리는 하나만을 옳고 그르다고 이야기할 수 없다. 특히 그것은 예술 양식에서 더욱 잘 드러난다.

  르네상스에서 바로크로 고전주의에서 로코코로 그리고 다시 신고전주의에서 낭만주의로 이어지는 예술 사조의 모습은 ‘디오니소스적’이다. 그것은 아마 예술 사조가 사회의 요구와 삶을 반영하고 있기 때문이다. 마페졸리는 “광란성이 추상적인 역사(Histoires)에 대한 거부라면, 광란성은 동시에 하루하루 경험되는 이야기, 사건(histoires)을 집합적으로 보여준다.”라고 말한다. 어찌 보면 예술은, 예술 사조는 우리에게 광란성이 나타내는 이야기의 표상 중 하나일 것이다.          



나오는 말     


  마페졸리는 사회가 디오니소스와 프로메테우스의 과소와 과대가 반복되어 왔다고 말하고 우리가 이러한 반복을 예술 사조에서 보아왔다는 이야기는 하나의 이원론의 불과할지도 모른다. 마페졸리가 말하는 프로메테우스와 디오니소스는 우리가 흔히 말하는 아폴로니우스적인 것과 디오니수스적인 것과 그리 큰 차이가 나지 않는다. 또는 예술 사조를 비합리주의와 합리주의로 나누어 설명하는 이론가들과도 큰 차이가 나지 않아 보인다. 하지만 마페졸리에 중요한 것은 음양이라는 두 원초적인 원형이 ‘일음일양’함으로써 세계의 역동적인 생명 세계를 밝힌다는 점이다. 또 일음일양이란 “한번 음하고 한번 양한다”라는 의미로도 “하나의 음과 하나의 양이 동시에 함께 있다”는 의미로도 읽힐 수 있는데, 이것이 존재의 법칙이자 양상이며 일체 사물들이 궁극적으로 이와 같이 운동 변화한다는 것이다.

  디오니소스는 언제나 소란스럽다. 그것은 디오니소스가 가지는 특징인 사교성(socialté), 집합적 본능, 순환성, 이성을 움직이고 파고드는 생명력때문이다. 소란스런 디오니소스는 성실한 프로메테우스가 만드는 질서에 무질서를 침투시키고 방해공작을 일삼는다. 마치 제멋대로 뻗는 뿌리와 같다. 

  디오니소스는 질서를 해체시킨다. 디오니소스의 강력한 생명력이 권력의 영원성을 해체시키는 것이다. 그것은 마치 단단한 땅을 헤집는 지렁이와 같다. 지렁이는 단단한 지면을 흩트리고 부드럽게 한다. 그럼으로써 단단한 땅이 숨을 쉬게 만들고 생명력이 깃들게 한다. 사람들이나 사물들을 새로이 느낄 수 있는 일종의 “호흡”을 가능하게 하는 것이며, 사회에서 광란의 역할도 그와 같다.


“인간이란 살균된 세계에서 살 수 없는 법이니까요. 거기에 생명을 끌어들이기 위해서는 세균들을 우글거리게 해야 할 것입니다. 상상력을 회복시키고, 시를 발견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 가스통 바슐라르가 소르본느에서 <상상력의 형이상학 La métaphysique de l'imagination> 강의 중.


  마페졸리에게 있어 살균된 세계란 “행복의 양과 질을 계산”하려는 욕구가 “존재의 일반화된 합리화”(베버)라는 방식으로 소비, 성, 말, 여가 등의 전체적인 경험의 영역으로 ‘계산’과 ‘측정’이 확장되는 세계이다. 그리고 그러한 살균된 세계를 효율적으로 확장시키고 구성시키기 위해 고안된 특수한 조직체를 “존재의 살균된 조직체” 라고 일컬으며, 이 조직체에 의해 모든 것이 계산 가능하고 생산적인 질서 안으로 포섭되는 경향이 있음을 지적한다. 즉 그가 우려하는 세계(살균된 세계)란 놀고, 사랑하고, 태양을 즐기고, 흘러가는 시간을 잘 활용하는 등 존재적 모험을 하게하는 것이 경제와 측정의 질서 속으로 편입되는 세계이다. 

  마페졸리는 “사회적으로 들끓는 삶의 욕구를 우리는 과연 저축할 수 있는가?”라고 반문하며, 우리가 “일정 부분의 ‘그림자’를 감수하는” 옛사람들의 지혜를 잊어버렸음에 탄식한다. 그리고 바슐라르가 살균된 세계를 구제하기 위해, 생명을 끌어드리기 위해 상상력의 회복과 시時라는 세균을 고안했다면, 마페졸리가 끌어들이고자 한 것은 옛사람들이 지녔던 지혜, 바로 디오니소스의 그림자의 회복이다.

  마페졸리는 우리에게 잊지 말아야한다고 말한다. 디오니소스적 광란이 그저 수많은 에로티시즘, 반동적인 과소의 위반을 의미하지 않는다는 점을 말이다. 그의 작업은 히브리즘으로 대변되는 유대 그리스도 전통의 단선적이며 종말론 적인 시간관에서 고대 희랍의 우로보로스를 일깨우려는 시도이다. 자신의 꼬리를 무는 뱀은 ‘순환성’을 나타낸다. 이 순환성이란 마페졸리가 그토록 강조하고 싶었던 ‘일상’을 의미하며, “순간의 윤리(éthique)”를 내포한다. 결국 앞서 말한바와 같이 마페졸리가 우리에게 말하고자 하는 바는 “순간성이 끝없는 순환 속에서 반복된다 할지라도 항상 한 순간”에 이루어지는 “열정적인 마력”, 즉 끝없는 삶의 순환 속에 있는 ‘매일의 일상’을 마주하는 우리의 ‘순간들’의 중요성을 강조하려는 것이다.      




참고 문헌     

박치완, 「바슐라르와 시」, 『프랑스학연구』 제 33집, 2005. 

안효성, 「음양이론의 상징적 상상력」, 『철학과 문화』 18집, 2009.     

미셸 마페졸리, 『디오니소스의 그림자(L'ombre de Dionysos), 이상훈 옮김, 삼인, 2013,

박기현, 『프랑스 문화와 상상력』, 살림 출판사, 2004.

아르놀트 하우저, 『문학과 예술의 사회사 3』, 백낙청 · 염무웅 옮김, 창비, 2016

오병남, 『미학강의』, 서울대학교출판문화원, 2011.

이폴리트 텐, 정재곤 옮김, 『예술철학』, 나남출판,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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