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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멜랑꼴로지 Aug 09. 2018

미셸 앙리의 『야만』읽기

삶-불안

삶 - 불안 


  『야만』에서 갈릴레이의 환원을 통해 삶과 괴리되는 이유. 개인이 개별적 개인에서 관념적 개인으로 환원되는 이유는 결국 삶의 파토스를 극복하기 위한 삶의 방식 중 하나일 뿐이다. 삶은 즐거움만이 아니며, 삶을 제거하고자 하는 일은 삶 자체에 존재하는 이러한 불안에서 나온다. 그리고 그 제거를 원한 것이 삶이기에 그 불안은 삶의 사실이다. 삶이 제거하고자 하는 것이 그 자신이기에 그 불안은 자기에 관한 불안이다. 그리고 “불안은 받아냄이 자신과 분리되기를 원하는 일이다.” 나는 이러한 불안에 관한 이야기를 프리드리히 니체의 『도덕의 계보학』과 연관 지어 생각해보고자 한다. 


  금욕주의적 이상을 제외해보자:
그러면 인간은, 인간이라는 동물은 지금까지 아무 의미도 지니지 않았다. 지상에서의 인간의 생존은 아무 목표도 없다. “도대체 인간이란 무엇 때문에 존재하는가?” - 이것은 해답이 없는 물음이었다. 인간과 대지를 위한 의지가 결여되어 있는 것이다. 모든 거대한 인간의 운명의 배후에는 ‘헛되다!’라는 말이 후렴으로 울리고 있었다. 무엇인가 결여되어 있었다는 것. 어마어마한 균열이 인간 주위를 감싸고 있었다는 것. 실로 이것이 금욕주의적 이상을 뜻한다. - 인간은 스스로를 변명하고, 설명하고, 긍정할 줄 몰랐다. 인간은 자신의 의미의 문제 때문에 괴로워했다. 그는 그 밖의 문제로도 괴로워했다. 인간이란 대체적으로 보아 병든 동물이었다. 그러나 그의 문제는 고통 자체가 아니었고, “무엇 때문에 고통스러워하는가?”라는 물음의 외침에 대한 해답이 없다는 것이었다. 가장 용감하고 고통에 익숙한 동물인 인간은 고통 그 자체를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인간에게 고통의 의미다 고통의 목적이 밝혀진다고 한다면, 인간은 고통을 바라고, 고통 자체를 찾기도 한다. 지금까지 인류 위로 널리 퍼져 있던 저주는 고통이 아니라, 고통의 무의미였다. - 금욕주의적 이상은 인류에 하나의 의미를 주었던 것이다! 그것은 지금까지 유일한 의미였다. 어떤 의미가 있다는 것은 아무런 의미도 없다는 것보다는 낫다. 금욕주의적 이상은 어떤 점에서 보더라도 지금까지 있었던 최상의 ‘어쩔 수 없는 것’이었다. 이 이상 속에서 고통은 해석되었다. 어마어마한 빈 공간은 채워진 것처럼 보였다. 모든 자살적 허무주의에 대해 문이 닫혔다. 해석은 –의심의 여지없이-새로운 고통을 가져왔고, 좀 더 깊고, 좀 더 내면적인, 좀 더 독이 있는, 삶을 갉아먹는 고통을 가져왔다. 이 해석은 모든 고통을 죄라는 관점 아래로 가져왔다. …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 인간은 그것에 의해 구출되었다. 인간이 하나의 의미를 가지게 되었다. 인간은 그 후로 더 이상 바람에 날리는 나뭇잎 같은 존재가 아니었고, 불합리나 ‘무의미’의 놀이공이 아니었다. 이제부터 인간은 무엇인가를 의욕할 수 있었다. - 우선 어디를 향해, 무엇 때문에, 무엇으로 인간이 의욕했는가는 중요하지 않다: 의지 자체가 구출되었던 것이다. 금욕주의적 이상에 의해 방향을 얻은 저 의욕 전체가 본래 표현하고자 한 것은 도저히 숨길 수가 없게 되었다. 인간적인 것에 대한 이러한 증오, 관능에 대한, 이성 자체에 대한 이러한 혐오, 행복과 미에 대한 이러한 공포, 모든 가상, 변화, 생성, 죽음, 소망, 욕망 자체에서 도망치려는 이러한 욕망 – 이 모든 것이, 감히 이것을 이해하고자 시도해볼 때, 허무를 향한 의지이며, 삶에 대한 적의이며, 삶의 가장 근본적인 전제들에 대항한 반발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도 하나의 의지이며 하나의 의지로 남아 있다! … 그래서 내가 처음에 말했던 것을 결론적으로 다시한번 말한다면, 인간은 아무것도 의욕 하지 않는 것보다는 오히려 허무를 의욕 하고자한다…. - 《도덕의 계보학》 제 3논문, 28.  


 《도덕의 계보학》에서 예술과 예술가에 대해 종교와 성직자에 대해, 과학에 대해, 지식 일반과 무신론 및 이상주의에 대해 언급하며 이 모든 실천들이 금욕주의적 이상과 얽혀 있으며 그것에 봉사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니체는 금욕주의적 이상이 어마어마한 범위로 지배적이었으며 여전히 그러하다는 점이 인간 의지의 본질을 보여주고 있다고 말한다. “근본적 진실” 특히 “무에의 공포”는 인간 의지를 통째로 삼켜버렸다. “아무것도 의욕 하지 않는 것보다는 오히려 허무를 의욕”할 정도로 인간은 목표나 지향을 필요하다는 것이다. “삶의 약함은 자기 자신에서 도망치려는 그 의지에 있다. 바로 거기 항구적인 유혹이 있다.” 삶의 받아냄을 우리는 피하려고 의지한다. 삶과 거리 두기를 통해 삶의 받아냄(고통) 혹은 무에의 공포에 벋어날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그리고 니체는 그것이 금욕주의적 이상을 만들어낸다고 보았다. “하지만 참된 약함, 곧 약함을 약함으로 만드는 것은 그 계획을 순조롭게 해나갈 수 없게 하는 불가능성이자 삶 속에서 삶이 자기에서 자기를 해체하려 할 때 부딪히게 되는 어쩔 수 없는 실패다. 삶을 그 자신에 잇는 속박을 끊을 수 없는 불가능성, 다시 말해 도한 자신의 받아냄에서 벗어날 수 없는 불가능성이 받아냄을 배로 한다. 그것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의지를, 또 그와 함께 결국 그 무능력함의 감정을, 자기에게서 벗어날 수 없는 원리적 불가능성으로서 자기에 관한 감정을 격화시킨다. 그 감정은 마침내 정점에 달아서 불안으로 귀착된다.” 그리고 인류가 그의 불안을 피하고자 한 주요 시도가 금욕주의적 이상이며, 그 가운데 하나로서 현대 과학의 과도한 발전이 있다.


  삶에 낯선 ‘자연적 존재’로만 자연을 헤아리고자 하는 의지는 이미 그 자신을 부인하려는 삶의 욕망을 나타낸다. 삶 속에 살아있는 개인(자신)이 아닌, 낯선 관념화 된 인간이 존재하게 된다. 그것 또한 삶의 의지에 속한다. 그렇기에 삶의 받아냄으로부터 벗어나고자 하는 의지는 여전히 삶의 받아냄으로 귀착될 수밖에 없다. 관념화된 인간은 삶으로부터 벗어나 있다. 그렇기 때문에 그 속에서 무엇이 우리를 불안하게 하는지도 모른 채, 아니 우리를 불안하게 하는 일정한 대상이 없기에, 우리들은 무엇을 불안하게 여기는지 알 수 없다. 그리고 그렇기 때문에 불안에 떨 수밖에 없다. 불안의 특성은 그것이 모든 이성적인 숙고를 통한 논란으로 제거되지 않는데 있고, 이 불확정적인 성격 속에 사람을 고민케 하는 불안의 독특한 성격이 가로놓여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러한 삶과 괴리된 인간을 니체의 말인(최후의 인간)을 통해 느껴볼 수 있을 것이다. 필자는 라디오 헤드의 노래 중 「Fitter Happier」를 통해 좀 더 말인에 대해 이야기 해보고자 한다. 「Fitter Happier」에서는 안드로이드의 컴퓨터화된 목소리가 방향성 없는 음악 속에 소멸되는 단조로운 어조로 그의 삶의 특징들을 나열한다. 처음에 행복으로 이끌 것 같았던 현명하고 이성적으로 들리는 규칙들은 희미하게 절망에의 유혹을 내포하고 있다. 웅얼거리는 목소리는 기호(嗜好)는 있지만 사람이나 탈출의 가능성은 보이지 않는다. 안드로이드는 “권한도 있고 사회구성원으로 인정도 받고 an empowered and informed member of society”있지만 그럼에도 그는 걱정에 휩싸여 있는데다 무력하다. 마침내 그는 자신이 건강하고 활동적이라며 “우리에서 항생제를 먹고 사는 돼지 a pig in a cage on antibiotics”에 비유한다. 안드로이드는 아무 감정 없이 이렇게 비교를 한다. 감정 없는 안드로이드가 그의 진정한 모습인 것처럼 말이다.


  과학이라는 위대한 산물은 우리에게 부여하는 항생제와 다를 바 없다. 삶의 받아냄에서 회피할 수 있는 항생제인 것이다. 하지만 항생제는 삶이 주는 세균을 죽이기 위한 시도이지만 그 또한 삶 속에 있기에 제거 할 수 없다. 오히려 우리가 알고 있듯이 그 세균은 점차 면역력을 길러 다른 방식으로 우리를 잡아먹을 것이다. 그것을 모른 채 우리는 편식하는 돼지로서 목숨을 이어간다. 마지막으로 내가 좋아하는 바슐라르의 지혜를 통해 마무리 지어보고자한다. 


“인간이란 살균된 세계에서 살 수 없는 법이니까요. 거기에 생명을 끌어들이기
위해서는 세균들을 우글거리게 해야 할 것입니다.
상상력을 회복시키고, 시를 발견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인간이란 살균된 세계에서는 살 수 없다. 살균된 세계란 관념화된 세계이며, 삶을 배제한 세계이다. 삶이 주는 세균에서 도망치기 위해 우리는 삶을 살균하여, 삶을 배제한다. 하지만 그 속에서 인간을 살 수 없다. 살 수 있는 인간이란 실재하지 않는 관념화된 인간뿐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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