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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지은 May 10. 2022

아들과의 기차여행

네 살 아들과 KTX 타고 부산 내려가기

네 살 아들과 KTX 타고 부산 가는 길

두어 달 전, 이제 막 세 돌이 지난 아들과 함께하는 부산 여행을 가는 길. 우리 부부는 서울에서 부산까지 세 시간 가까이 되는 기차 여행이 얼마나 걱정되었는지 모른다. 서울에서 만종까지 약 1시간 반이 못 되는 여정도 지루해 마지않던 우리 아들이 과연 부산까지 과한 칭얼거림 없이 무사히 가 줄 수 있을까에 대한 우려에서였다.


우선 샌드위치 데이가 낀 어린이날과 어버이날 황금연휴였던지라, 대략 두 달 전에 미리 KTX '유아 동반석' 좌석을 확보해 두었다. 일전에 자리가 없어 유아 동반석이 아닌 일반석으로 아이와 함께한 적이 있었는데, 아이가 큰 소리를 낼 때마다 앞 좌석에서 눈총을 주었던 탓에 좌불안석 말썽쟁이 아들을 둔 죄인 엄마가 된 기분이 썩 좋지만은 않았기 때문이다.

출발 전날엔 유아용 헤드셋을 미리 충전해 놓고, 아이패드에 아들이 좋아하는 옥토넛 애니메이션 극장판을 넉넉히 저장해 두었다. 부디 엄마와 아빠의 노력이 헛되지 않도록 기차에서 되도록 조용히 가주길 바라며 여정이 시작되었는데, 우리 아들은 우리의 노력이 무색하게 의외로 정말 점잖게 함께 해 주었다. 가끔 헤드셋에서 나오는 소리 때문에 큰 소리로 만화 내용에 추임새를 넣기는 했지만 말이다.

취식이 허용된 KTX

그런데 생각해보니 이건 이번 주 초부터 허용된 기차 내 취식 더분이기도 했다. 예전에는 기차 내에서 마스크를 꼬박 쓰고 있느라 기차 안에서 무언가를 먹는다는 것은 생각지도 못했는데, 이번 주부터 허용된다고 하길래 출발 전, 아들이 좋아하는 프레츨 한 봉지와 레모네이드를 사들고 자리에 앉았다. 맛있는 것을 먹으며 엄마, 아빠와 함께하는 여행의 시작이라는 들뜨고 설레는 마음을 마음껏 느끼게 해 줄 수 있어서 나도 얼마나 기분이 좋았는지 모른다. 역시 기차여행의 묘미는 맛있는 간식을 먹으며 바깥 경치를 즐기는 것인 것을, 그동안 이런 걸 누릴 수 없어서 어찌나 섭섭했는지 모른다.


나는 어릴 적 기차여행에 대한 추억이 참 많다. 맞벌이로 바빴던 부모님 대신 서울 사시는 우리 외할머니가 나를 방학 때마다 돌봐 주셨는데, 내가 살던 원주에서부터 외가댁이 있던 서울까지 종종 기차를 타고 오고 가곤 했다. 그때만 해도 원주에 가려면 청량리역까지 가서 원주역으로 가는 무궁화호 열차를 타야만 했는데, 2시간 정도 되는 기차여행이 지루하지 않게 우리 할머니는 꼭 나를 매점에 데리고 가서 간식을 사주시곤 했다. 내가 즐겨 고르던 간식은 주황색 플라스틱 망에 담긴 '귤'이었다. 크고 실한 귤이 아닌 작고 껍질도 얇은 귤 너덧 개가 완두콩처럼 주황색 망 안에 줄지어 담겨 있었는데, 그 귤이 어찌나 달콤하고 맛있었는지 모른다. 요즘도 이렇게 파나 궁금한데, 백화점이 딸린 세련된 역사로 탈바꿈한 청량리역과 글로벌 스테이션의 위력을 뽐내는 서울역 편의점에서는 더 이상 이런 귤은 팔지 않는 것 같아 아쉽기만 하다.


미색의 가로로 긴 종이 기차표에 녹색으로 출발역과 도착역, 날짜와 시간, 좌석이 적혀 있었던 게 아직도 기억에 생생하다. 표를 고이 간직하고 자리에 앉아있으면 기차가 출발한 후, 역무원 아저씨가 통로를 거닐며 표도를 확인하면서 '철컥!'라고 종이에 확인했음을 알리는 구멍을 뚫어 주셨었는데. 나는 추억에 잠겨 만화를 보는 아들 옆에서 한참을 과거에 머물렀다.


아이를 키우며 육체적으로는 참 힘들지만 이럴 땐 정말 좋다. 아이와 함께하는 이 시간에 그 당시의 나를 떠올릴 수 있는 것. 어린 시절의 나를 추억하게 되는 계기를 만들어 주는 것. 이 아이의 삶을 바라보며 나 자신도 한 번 더 살아가는 느낌을 받는 것. 육아의 묘미가 아닌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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