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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카 Sukha Oct 23. 2020

저장된 순간들



", 상상을 할 수 없는 병있나 봐."


남자 친구는 믿기지 않는다는 듯한 표정으로 말했다. 무슨 소리일까. 이해가 가지 않아 찌푸린 내 얼굴을 보며 본인도 이해가 안 간다며 그는 물었다.


"정말 하늘이라는 단어를 들으면, 하늘을 볼 수 있어?"






상황은 이랬다. 점심시간에 직장 동료와 대화를 나누던 그는 다른 사람들 하늘이라는 말을 생각하면 마음속에서 하늘을 볼 수 있다는 걸 다. 그리고 우연한 그날의 대화 주제 때문에 그는 자신이 일명 상상을 못 하는 병이라고 불리는 "아판타시아(Aphantasia)"라는 일종의 장애를 갖고 있다는 것을 알게  것이다. 평생을 다른 사람들도 자신처럼 하늘이라는 단어를 들으면 그 단어만 존재할 뿐 아무것도 보이지 않을 거라 생각했다 그는 물었다. 정말 모든 걸 마음속에서 볼 수 있어?


나는 곰곰이 생각해보았다. 아니, 볼 수 있는 어떤 순간들이 있어.






하늘


하늘을 생각할 때 나는 바다에 둥실 떠오른다. 파타야의 잘 알려지지 않은 에메랄드 빛 바다에 누워 온몸으로 바라보았던 하늘이 보인다. 엄마와 아빠가 갈라서고 얼마 되지 않 떠난 아빠와의 파타야 여행. 아빠에 대한 미움과 그럼에도 어떻게든 이해해 보고 싶은 마음이 뒤섞여 여행 내내 복잡했던 마음이 그 에메랄드 빛 바다에 몸을 누이던 순간 들어온 높은 하늘에 단숨에 고요해졌던 그 순간. 독하게 높고 푸르렀던 그 하늘.




봄을 떠올리줄지어 핀 개나리들이 보인다. 초등학교 저학년 때 살던 아파트 단지의 뒤편에는 봄마다 개나리가 줄을 지어 피어있었다. 샛노란 개나리 작은 꽃들이 너무 예뻐 보여 걷다가 늘 시선을 뺏겼던 개나리 꽃 울타리. 그리고 어린 나와 늘 함께 걸었던 엄마의 따뜻하고 힘 있는 손을 잡고 보았던 노란 개나리.



타코야끼


타코야끼라는 단어를 들으면 그려지는 건고등학교 때 친구와 자습시간에 몰래 나가 타코야끼를 먹었던 순간이. 한 번도 타코야끼를 먹어본 적 없다는 친구에게 타코야끼의 맛을 보여주고 싶어 꼬박 1시간여를 걸어갔던 작은 일 식당. 길거리에서만 타코야끼를 먹어봤던 나 역시 식당에서 먹는 타코야끼는 더 엄청나겠지 하며 기대했는데, 만원 가까이하는 그 타코야끼는 놀랍도록 맛이 없었다. 다시는 타코야끼를 먹지 않겠다는 친구의 말을 들으며 이게 아닌데, 속이 상해 나중에 꼭 맛있는 타코야끼를 먹게 해 줘야지 다짐하며 걷던 학교까지 돌아오 길.

 





상상을 하지 못한다는 그의 말에 떠올려본 말과 순간들은 흐릿한 하나의 이미지도, 내가 봤던 모든 이미지도 아닌 마음속 저장된 중한 들이었다. 잠깐의 틈 사이를 빌 고개를  바라보는 매일의 하늘이 아닌 복잡한 마음을 달래주었던 지독히높고 푸르렀던 하늘. 애틋하고도 그리운 아이 시절의 샛노란 봄. 아쉬웠지만 재밌었던 억으로 남은 맛없는 타코야끼. 나도 모르는 새 단어들은 어떤 특별한 순간을 담고 있었다.






내 말을 듣고 자기는 아무것도 볼 수 없다며 시무룩해남자 친구에게 말했다.


"어쩌면 그래서 네 취미가 사진 찍기가 됐나 봐. 상상은 못 해도 사진으로 남기면 볼 수 있잖아."


생각해보니 그런가 보다고 금세 기분이 풀어진 그를 보며 상상을 할 수 있는지 아닌지는 별로 중요하지 않다는 생각을 했다. 어떤 단어를 생각하면 이미지를 볼 수 있다 하더라도  그 이미지들을 보 살아가지 않으니까. 어쩌면 사진이라는 흔적을 갖고 있는 그가 나보다 특별한 순간들을 자주 돌이켜볼지도 몰랐다.



문득 [불러오기] 버튼을 만들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가 상상 대신 사진으로 추억을 불러오는 것처럼, 평소에는 있는지 조차 잊고 있는 일 년에 한 번 열어볼까 말까 한 서랍 속 편지들 같은 순간들을 불러올 수단을. 그게 나에게는 글이었다. 핸드폰에 몇천 장 넘게 저장되어있지만 들여다보지 않는 갤러리 속 사진들을 하나하나 훑어보게 되는 센치한 밤처럼, 추억에 빠지는 시간을 의식적으로 매주 한 번씩 갖는다. 내 안의 저장된 순간들을 꺼내 쓴다. 그 순간의 마음과 풍경을 천천히 다시 들여다본다. 그렇게 본다.







수카: 어디선가 후각이 인간의 기억에 감정을 덧씌우는 역할을 한다는 것을 본 적이 있습니다. 그 이후로 기억하고 싶은 순간이라는 생각이 들 때면 그 자리에 서서 숨을 깊게 들이쉬고 내쉬며 시공간의 냄새를 맡고 있습니다.


남자 친구가 찍은 미얀마의 석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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