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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카 Sukha Nov 18. 2020

우리, 나쁜 일엔 둔해지고 좋은 일엔 예민해졌음 좋겠어

2020년, 힘들었던 당신에게.



쓸쓸했던 한 해가 지나간다. 올해의 다이어리는 그 어느 때보다 바빴다. 칸칸이 욱여넣어진 계획들도, 그 위로 덮이는 체크 표시들도 모두 받아내었다. 그런데 왜 일까. 꽉 찬 다이어리가 텅 비어 보이는 건.



2020년을 떠올리면 자동으로 '재난'이라는 단어가 앞으로 가 붙는다. 올해의 첫날, 나는 호주에 있었다. 산불이 온 나라를 뒤덮고 연기로 앞이 보이지 않던 때였다. 뉴스는 새해 불꽃놀이와 산불로 고통받는 사람들과 동물들 소식을 나란히 보여줬다. 팡-팡- 터지는 불꽃놀이는 예뻤고, 팡-팡- 산불에 터지는 자동차 엔진은 무서웠다.



1월 중순, 나는 한국으로 돌아왔다. 1월 20일은 국내 첫 코로나 환자가 발생한 날이다. 당시 일하던 회사 직원은 중국 출장을 다녀온 지 얼마 되지 않아, 잦은 기침을 하기 시작했다. 건강 염려증인 나는 호들갑을 떨었다. 호들갑은 금세 식었다. 확진자 수가 점점 늘어나면서 나는 호들갑이 여유 있는 사람의 사치임을 알았다. 길가의 사람들도 더 이상 웃지 않았다. 아니 더 이상 사람들의 웃음을 볼 수 없었다. 하얀 마스크 뒤로 가려졌으니까.



3월의 우리는 팬데믹을 겪었다. 약국 앞에서 마스크를 사기 위해 늘어진 줄을 보는 건 언제나 낯설었다. 대학원 마지막 학기는 원격으로 시작되었고, 엄마는 가게를 폐업하기로 결정했다.



7월. 장마가 한창이었다. 학교 문 턱을 밟아보지도 못한 채 학기는 끝이 났고, 10년이 넘은 엄마의 가게도 함께 끝났다. 자취방을 빼서 돌아온 고향 집에 짐을 다 풀지도 못한 채 쉼 없이 내리는 비에 어깨가 짓눌렸다. 뉴스는 더 이상 좋은 것과 나쁜 것을 나란히 보여주지 않았다. 오늘의 코로나 확진자 수에 이어 장마 침수 피해 소식을 내보냈다. 나쁜 뉴스를 연달아 보는 아침은 도통 끝나지 않았다.



9월에는 아빠를 만났다. 한참을 보지 못하다 만난 아빠는 힘들다고 했다. 더 적나라하게는 돈이 없다고 했다. 그는 폼으로 사는 사람이었다. 절대 내 앞에서 돈 없다는 말을 하지 않았다. 그 생경한 문장을 곱씹으며 밥을 꼭꼭 씹어먹었다.



11월의 나는 한 해를 되돌아본다. 2020년 나는 일하던 회사에 사직서를 냈고, 대학원을 수료했다. 오랜 시간 꿈꾸던 글을 쓰기 시작했고, 따고 싶었던 자격증도 여럿 땄다. 혼자 살던 서울 자취방에서 고향으로 내려와 엄마와 함께 살기 시작했다. 운동도 다시 시작했다. 착실한 하루하루를 보내기 위해 노력했다. 그런데 왜일까. 쓸쓸한 마음은 지워지지 않는다.



서랍을 열어 지난 다이어리들을 꺼내어 본다. 지난 다이어리들에는 있고 올해의 다이어리에는 없는 걸 찾아본다. 빈자리는 금방 티가 났다. 다이어리들에 붙여진 친구들과 찍은 사진들. 그 날 하루하루를 보내며 느낀 사소한 행복들. 새롭게 알게 된 사람들에 대한 호기심들. 빈자리의 이름은, 설렘이었다.



일 년을 꽉 채운 재난의 연속은 몸도 마음도 지치게 한다. 데드라인 없는 불행은 희망을 사그라뜨린다. 행복했던 일이 없었다고 하면 거짓말이다. 곰곰이 돌이켜 세어보면, 행복했던 일들도 여느 때처럼 있었다. 그런데 지친 마음은 좋은 일을 기쁘게 받아들일 여유를 앗아가 버렸다. 어느새 나는 사소한 행복들은 둔하게 지나쳐버리고 연속된 불행은 예민하게 받아들이고 있었다.



아마 모두가 그랬을 테다. 나쁜 일들과 힘든 일들로 가득 차 잔뜩 예민해진 날들, 내 몫을 감당하기도 힘겨워 가까운 사람들의 힘듦을 헤아리기는커녕 그럴 생각조차 못했던 시간들, 설렘이 없어진 하루하루들을 보냈겠지. 오늘의 나는 다른 날보다 조금 힘이 나기에 이 힘을 빌어 소망한다.

 

우리, 나쁜 일에는 둔해지고 좋은 일에는 예민해질 수 있기를. 그래서 우리의 일상 속에 작은 웃음이 존재하기를. 그 웃음이 힘든 일들을 견딜 수 있는 힘이 되기를.


지금의 겨울을 지나 다가오는 봄을 맞이하기 위해서.






이 글의 제목은 실제로 사촌 동생에게 했던 말입니다. 그 말을 제 글을 읽어주시는 분들께도 드리고싶어 이 글을 쓰게 되었어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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