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새해를 맞아 일기장을 샀다. 1월 1일부터 하루당 꽉 찬 한 페이지씩의 분량을 둔 이 한 권의 책을 나는 매일 밤 써 내려가고 있다. 첫날은 새해의 다짐과 목표들로 한 페이지를 채웠고, 둘째 날부터는 그 날에 있었던 일들과 감정들을 적었다. 브런치에 쓰는 에세이들과 달리 나만을 위하여 쓰인 이 일기들은 쉽게 읽히려는 노력도, 좋은 이야기를 전달하려는 마음도, 하나의 주제만을 담기 위한 구성도 없이 적나라하다. 하지만 그렇다고 이 여과 없이 쓰인 일기들이 있는 그대로의 내 하루를 담고 있는 건 아니다. 한 페이지는 길지만 또 한없이 짧기에 나는 일기를 쓰는 그 순간의 감정에 의존해 하루의 부분을 말한다. 하루에 일어난 수많은 일들 중 내가 바라보는 짧은 순간, 짧은 단상만이 기록되어 남겨진다.
최근 늘 별 일 없이 지나가는 나의 심심한 일상에 특별한 날이 있었다. 좋은 일들도 나쁜 일들도 새로운 일들도 익숙한 일들도 다채롭게 일어난 하루였다. 나는 작은 조명만이 켜진 어두운 방에서 일기장을 펼치고 어떤 일을 적을지 고민하다 그 순간의 감정을 솔직하게 따라 적기로 했다. 그리고 글이 채워진 페이지는 나쁜 일들, 부정적인 감정들로 가득 차 있었다. 당황스러웠다. 어떤 오후가 생각났다.
호주의 스낵바에서 아르바이트를 마친 어느 오후였다. 나는 펑펑 울면서 집으로 가고 있었다. 왜 그리 서럽게 울었는지 이유는 기억나지 않지만 아르바이트 내내 울고 싶은 마음을 꾹 누르다 일을 마치고 가게를 나오자마자 어찌할 새도 없이 눈물이 줄줄 흘렀던 걸 기억한다. 그렇게 울며 집으로 가는데, 그 짧은 15분 정도의 시간 동안 7명의 사람이 내게 다가왔다. 여자도, 남자도, 나이 든 사람도, 젊은 사람도 있었다. 그들은 왜 울고 있냐며 내게 다가와 힘내라고 말해주었고, 이야기를 하고 싶으면 얼마든지 들어줄 테니 말해달라고 했고, 따뜻한 음료를 건네기도 했다. 내 서러운 마음은 그렇게 한 명, 한 명이 다가올 때마다 점점 녹아 없어졌고 집에 다 달았을 때는 얼떨떨한 좋은 기분만이 가득했다.
사실 호주에서 좋은 기억들만 있었던 건 아니다. 길을 걷다 위협적인 인종차별을 당한 적도 여러 번 있었고, 한 번은 달리는 차에서 던진 무언가에 머리를 맞아 정말 위험했던 적도 있다. 스낵바에서도 주문을 한 번 더 확인했을 뿐인데 너는 학교를 다시 가야 한다며 화를 내는 백인 손님에게 굴욕적으로 혼이 나기도 했다. 하려면 얼마든지 더 쓸 말이 많다. 하지만 나는 늘 호주를 떠올리면 울고 있던 내게 사람들이 계속해서 다가와 위로를 건넸던 그 오후가 생각난다. 내가 길을 잃었을 때 같이 길을 찾아주고 버스 기사에게 나를 꼭 내 숙소까지 데려다주라고 신신당부했던 마음씨 좋은 할아버지도, 그렇다면 요금을 받지 않겠다며 날 태워주고 숙소까지 안전히 데려다준 버스 기사도 생각난다. 그렇게 내게 호주는 따뜻한 사람들이 많은 곳으로 호주에 있던 그 시기는 가장 행복했던 때로 기억된다.
언제나 그렇다. 늘 좋은 일은 나쁜 일과 함께 일어난다. 그 교차되는 다양한 성격의 일들 중 무엇을 바라보고 무엇을 기억할 것인가는 순전히 내 선택이다. 이 시간을 좋게 기억하고 싶은 의지, 이 시간을 나쁘게 기억하고 싶은 의지. 그 의지의 크기에 따라 시간은 다르게 적힌다. 나쁜 일들, 부정적인 일들을 무시하고 잊으려 노력할 필요는 없다. 그래서도 안되고, 그럴 수도 없는 거니까. 하지만 방점을 어디에 찍을 것인가는 순전히 내 선택이다. 그래서 나는 부정적인 감정들과 나쁜 일들로 가득한 일기장을 경계한다. 먼 훗날 오늘을 다시 읽게 됐을 때 나의 기억이 나쁜 것들에 갇히는 게 두렵다. 그래서 나는 오늘도 일기를 쓴다. 내 감정에 솔직하게, 하지만 조금의 행복한 감정들, 기분 좋은 일들을 얹어서.
어서 봄이 왔으면 좋겠어요. 봄 꽃 중에는 벚꽃이 제일 인기가 많지만 저는 개나리를 제일 좋아합니다. 노란색을 좋아해요. 하늘과 바다가 생각나는 파란색도 좋아요. 하지만 변치 않는 제일 좋아하는 색은 초록색입니다. 온 세상이 하얀색이 된 요즘, 초록이 가득한 풍경이 그립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