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편은 니트 가공 프로모션 업체 관리직을 10년 이상 맡다가 그 하도급 업체인 ‘쉐타 공장’을 차렸다. 말이 사장이지 혼자 거의 모든 일을 다 해야 하는 노동자다. 결혼 전까지 주로 사무실 내근을 하던 나는 인건비를 줄여 보려고 시다 일을 시작했다. 2010년 전 처음 공장을 시작할 때는 5~6명의 직원을 뽑았고, 바쁠 때는 두세 명씩 일당 직원까지 추가로 불러 일을 했었다. 4~5년이 지나자 상황이 너무 안 좋아져 두 명의 직원과 우리 부부가 예닐곱 명의 일을 해내다시피 했다.
일을 시작하면서 아니, 몇 년이 지나도 나는 이 일이 몹시 힘들었다. 체력적으로도 고되지만, 그동안 해 왔던 업무와는 너무 다른 분야라 모든 것이 쉽게 익숙해지지 않았다. 스무 살 이상 나이 차이가 있는 아주머니들과 같이 맞추어 일하기도 쉽지 않은 일이었다. 그중에서도 제일 낯선 것은 용어였다. ‘니트’라고 하면 사람들이 잘 알아듣는데 꼭 ‘쉐타’ 공장이라고 해서 ‘세탁’ 공장이냐는 반문을 듣곤 했다.
물론 무슨 일이든 어느 업종이든 그 일을 하는 사람들이 쓰는 전문용어나 속어가 있게 마련이다. 그런데 제조업 중에도 제일 아래 하청인 우리 같은 공장들에는 일제강점기의 잔재물인 일어도 아니고 영어도, 한국어도 아닌 애매하고 이상한 말들이 존재했다.
그중 대표적인 것이 ‘시다’이다. 다른 분야에서는 ‘어시’라든지 ‘보조’라는 표현들을 쓰기도 하는가 싶지만, 우리 공장이나 주변의 비슷한 하도급 공장들은 모두 ‘시다’라는 표현을 썼다. 다른 말로 바꾸면 어떨까 하는 생각을 해 보았지만 ‘어시’라는 것도 어차피 우리말은 아니고, ‘보조’라는 것은 어쩐지 ‘시다’가 하는 일에 어울리는 적당한 명칭이 아닌 듯하다. ‘보조’는 말 그대로 전문적인 일을 하는 사람을 도와 보조해 주는 역할을 하는 사람인데 ‘시다’가 하는 일은 그런 것이 아니다. 물론 기계를 다루는 사람들의 보조 역할도 하지만 그 외 온갖 잡일과 심부름도 도맡아 해야 한다. 또 전체적인 일의 흐름을 모르면 일을 할 수 없으니 그저 잡일꾼도 아니다. 그러니 그런 어감을 살리는 정확한 명칭을 만들려면 언어학자쯤 되거나 이 일을 오랫동안 한 사람에게 어떻게 불리고 싶은지를 설문조사라도 해야 할 판이다.
‘시다’ 말고도 알 수 없는 용어들은 넘쳤다. ‘미싱’ 정도는 쉬운 단어이고 ‘수파’, ‘인타’, ‘오바’ 하는 기계부터 ‘스쿠이’, ‘나나인찌’, ‘단가라’, ‘와꾸’ 등등 수도 없었다. 그중 ‘나나인찌’ 같은 것은 ‘단춧구멍 제조기’ 정도로 바꿔 쓸 수도 있을 것 같고 ‘단가라’도 그냥 ‘줄무늬’라고 하면 될 것 같았는데 왜 바꾸지 않고 그냥 모두 그렇게 쓰는지 처음엔 좀 거슬리기도 했다. 그런데 일을 하다 보니 왜 그런지 알 것도 같았다.
우리 공장 직원들은 9시에 출근해서 오후 7시에 퇴근한다. 점심시간은 한 시간도 아니고 50분이다. 바쁘면 야근은 당연한 일이고 밤 9시까지 야근할 때는 간단한 김밥이나 빵으로 저녁을 대신했다. 밤 10시 넘게까지 일을 해야 할 때도 자장면처럼 빨리 먹을 수 있는 것으로 저녁을 때우고 소화할 틈도 없이 일했다. 그렇게 일해서 받는 임금은 최저임금을 조금 웃돌았다. 숨 쉴 틈도 없이 일해서 자식들 먹이고 입히고 교육해 왔다. 무슨 말을 쓰는지 그 말이 일본어의 잔재인지 찌꺼기인지 따위에는 관심도 없었고 알 필요도 없었다. 일본어든 욕설이든 공장주가 급여만 떼어먹지 않는다면 그걸 듣고 말하며 일했다. 공장주라고 해도 별다를 것은 없었다. 남편과 나는 친정 엄마께 아이들을 맡기고 원단 쪼가리를 이불 삼아 잠깐씩 눈을 붙이면서 밤을 새우기도 하니 말이다.
혁명이라고 불러 주어야 마땅할 정도로 어마어마한 성장을 이뤄 낸 우리 부모님 세대는 모두 그렇게 일해 왔다. 지금 우리는 그 엄청난 성장의 거품 속에서 허우적거리고 있다. 1970년대 우리 부모님 세대가 동대문 시장 등의 도매시장을 끼고 제조업을 시작할 당시 기술자 월급은 70~80만 원, 옷은 한 벌에 450원 정도였다. 우리 공장 직원들의 월급은 150~200만 원 정도로 두세 배쯤 올랐지만, 옷값은 열 배에서 백 배까지 올랐다. 옷값 대부분이 거품이다. 경제가 이렇다 저렇다 떠드는 사람들을 보면 경제인이고 정치인이고 다 데려다 공장에서 시다 일을 한 달만 시켜 봤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체감 경제 교육 차원으로 말이다.
나도 사무실에서 컴퓨터나 만지는 일을 할 때는 이런 생각을 못 했다. 그때는 대학을 막 졸업한 사회 초년생이라 뭘 모르기도 했고, IMF 시기에 청년기를 맞아 나름대로 고뇌하고 방황하느라 바빴기 때문이다. 청년기와 중년기의 중간쯤에서 서성이던 나는 제조업을 시작하여 수금을 떼이고 사기를 당하고, 부가세를 못 내서 신용불량의 위기에 놓였다. 그런 와중에 세 자녀를 키우며 살림하느라 동분서주했다. 그러다 보니 청년기의 방황은 사치스러운 추억으로 느껴졌다.
폐업을 생각해 보았고, 주변에 폐업하는 공장도 많다. 앞으로 얼마나 많은 공장이 부도와 폐업의 길을 갈지……. 경제 전문가들은 전망을 확언하기 힘드니 ‘제조업이 사양길로 접어드는 것으로 보인다.’라고 조심스레 말한다. 하지만 제조업자들은 ‘우리나라 제조업은 죽었다.’라고 씁쓸하지만 당연하게 말한다. 그들은 죽어 가는 제조업을 살리려고 최후까지 노력할 사람들이다. 어쩌면 죽어 가는 것을 알지만 다른 대안도 방안도 없기에 그저 함께 가라앉을 날만을 꼽으며 버티고 있는 걸지도 모른다.
낯선 용어만큼이나 낯선 세계였고 익숙해지기까지 긴 시간이 걸렸다. 그다지 평범한 가정에서 자라지 못했지만, 내 결혼 생활은 평범하길 막연히 꿈꿔 왔다. 가라앉길 기다리는 제조업이라는 배를 보며 초조하고 힘든 하루하루를 보내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더구나 제조업은 거대한 배라도 되지만 내가 타고 있는 것은 그에 빌붙은 뗏목에 불과했다.
일을 계속하며 낯가림이 잦아들기 전, 처음부터 익숙한 말도 있었다. 스웨터의 소매 등을 수작업으로 마무리하는 작업대에 항상 놓여 있는 ‘반짇고리’다. 등에 온갖 바늘을 총총 꽂고 어쩐지 안쓰러운 모습으로 앉아 있다.
그렇게 많은 정체불명 언어 속에서 살아남은 반짇고리에게 박수와 격려를 보낸다. 그리고 가라앉아 가는 배 안에서 구명보트를 던져 주든 자력으로 노를 저어 육지로 올라가든 위태로운 뗏목들이 꿋꿋이 살아남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