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나의계절 Dec 13. 2023

백수 진화기

전 4단계에서 졸업할래요, 근데 몇 단계까지 있는 건대요? 


"음, 백수의 시간에도 각자의 단계가 있는데, 저는 지금 한 3단계에 와있어요. 이게 뭐냐면요.." 


퇴사 후 현재 백수의 삶에 대해 묻는 질문에 답할 때였다. 뭐랄까, 백수의 삶은 잔잔하면서도, 동시에 굉장히 다이내믹하다. 분명 평온한 하루하루를 살아가고 있었는데, 어느새 뒤돌아 보면 내가 생각지도 못한 어떤 다른 스테이지에 올라와 있는 느낌 말이다. 


그러니까, 그동안의 백수의 시간을 요약하자면 이렇다. 한참 재미있고 신나게 놀다가, 심심해지고, 그러다 심심함 마저도 사랑하게 되었는데, 나의 쓸모를 찾고 싶은 단계로 이어지더라,라고 말이다. 


1단계: 신나게 놀다, 백수 과로사 단계 

댄스 음악이 흐르는 무대에서 사람들과 매일 신나게 노는 단계. 매일이 만남의 연속, 백수가 과로사한다는 건 바로 이런 것이구나 싶은 시기다. 이땐 그 어느 때보다 바쁘다. 점심 저녁으로 사람들을 만나댔고, 악기며 운동이며 새로운 무언가를 시작했다. 저장해 둔 핫플레이스며 카페 투어도 다녔다. 책도 읽고 넷플릭스도 보고, 오 시간이 왜 이렇게 빠르게 흘러가지 싶은 날들이 이어졌다.   


2단계: 불확실성을 제거한 평온과 노잼의 단계 

어느덧 뒤돌아 보니 나 혼자 불 꺼진 무대에 서 있는 것을 알게 되는 단계. 평온의 스테이지라고 이름을 붙여볼 수도 있겠다. 게스트들은 이제 띄엄띄엄 무대에 오르고 있고, 무대는 댄스음악에서 발라드로 무드가 바뀐다. 평화로운데, 그래서 재미가 없다. 실수를 할 일도, 징징거릴 일도 없고, 성취감을 느낄 일도, 노곤한 피로감을 느낄 일도 없다. 직장과 일이라는 것이 내게 매번 어느 정도의 불확실성을 가져다주었기에, 그 문제를 푸느라 더 재미있고 흥미로웠구나를 깨닫게 되었다. 


3단계: 행복한 백수, 하지만 쓸모를 찾게 되는 단계 

똑같이 반복되는 평화로운(=지루한) 일상에도 곧 적응을 한다. 돈만 있다면, 이제 평생 백수로 살아갈 수 있을 것 같다. 다만, 점차 시간과 돈의 빈틈이 커지고 나의 쓸모를 찾게 되기도 하다. 뭐 했지 싶은 시간이 늘어나고, 써야 하는 돈과 가지고 있는 돈이 격차도 확연하게 눈에 띈다. 일하는 나의 자아는 까먹은 지 오래라, 이러다가 일을 다시 할 수 있으려나 하는 마음도 든다. 무언가 어디선가 나의 쓸모를 찾고 싶고, 보람과 성취감을 느끼고 싶은 마음이 꿈틀거린다. 



백수는 체질에 맞지 않을 줄 알았는데, 막상 해 보니 딱 맞더라. 이렇게 진화된 나의 백수의 시기는 이제 4단계로 진입하고 있다. 앞으로 굶어 죽지 않으려면 일해야 하니, 이것저것 도전해 보는 단계라고 할 수 있겠다. 아니, 다시 직장인으로 회귀하는 하고 싶어진 시기랄까. 


백수의 단계는 사람마다 다를 터, 나의 그 어디쯤 와있을까. 지금 오르고 있는 이 4단계. 이 지점이 백수에서 직업인으로 다시 문을 여는 마지막 스테이지이길, 바라본다. 지속 가능한 삶을 위해서는 이제 백수 졸업 해야 할 단계니까 말이다. 마음이 그렇다한들, 앞으로 펼쳐질 일을 누가 알겠는가. 그래서 인생이 재미있는 것이겠지.


후우, 몇 단계가 있든, 백수라는 삶의 시기는 한 번 보내볼 만해. 

그건 확실하지 말입니다. 


매거진의 이전글 그 호텔 주방에는 도사님과 선생님이 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