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로디지털단지역의 불타는 밤
그날도 난, 역시 그날도 달린 썬을 모셔오기 위해 구로디지털단지역 벤치에 앉아 있었다. 막차가 임박한 지하철 역사에는 불콰한 얼굴의 여성이 눈을 가리고 기묘한 소리를 내며 뛰어다니고 있었고(그는 곧 남친에게 타박을 받았다), 비슷한 얼굴색의 남성이 역 직원에게 고성을 지르고 있었다. 문제는 그 남성이 나에게 말을 걸어 왔다는 것. "너 왜 지하철 안타냐?”(다짜고짜 반말) "누구 기다리는 거에요.”(그러나 나는 공손하다) 그는 고개를 끄덕이더니 옆자리에 앉아 자신의 지나온 삶을 반추하기 시작했다. "제가(그도 공손해졌다) 99만 원어치 월급을 못 줬어요. 지금도 날마다 하느님께 회개하고 있습니다... 소신껏 살아가십시오. 그러니까 여기 앉아계신거겠죠? ... 저는 너무 행복합니다.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죄책감 속에서도 자신의 행복을 주체할 수 없었던 남자의 이야기가 이어지는 동안, 막차가 도착했지만 삑삑 교통카드를 든 인파 속에 썬은 없었다. 자리에서 일어나 아직 나오지 않은 사람이 있는지 보려하자 다시 불손해진 남자가 함께 일어나 말했다. "야 내놔!” “뭘?”(분위기가 심상치 않아져 나도 반말로 응수) "우리 어머니 드릴 돈.." 말을 흐리며 남자는 지하철 역 사각기둥에 기대 섰고(잠깐 슬퍼하는 것 같기도 했다), 난 역 직원에게 혹시 아직 나오지 않은 사람은 없는지 물었다. "누구 기다리시는 건가요?" "네, 아직 나오지.." 내 말을 자르며 다시 등장한 남자가 대신 대답했다 "아니에요, 없어요. 야 가자" 어딜 가자는 걸까. 저흰 초면인데요.. 남자는 이젠 내 몸을 배치기 하며 또 내놓을 것을 요구했다. "내 전화기 내놔!” 한 손에 전화기를 꼭 쥔 채로 전화기를 내놓을 것을 요구하는 이 남자. 내 전화기가 탐나는 걸까.
산만한 남자가 다시 역 직원에게 전화기 도둑 조사를 의뢰하는 틈을 타 난 역을 빠져나왔고, 종점까지 간 썬은 택시 아저씨 핸드폰을 빌려 택시를 타고 가고 있다는 소식을 전해주었다. 돌아온 썬은 택시를 타고 오는 길에 중간중간 차를 세워 토했다는 무용담을 들려주었고(이 자리를 빌려 택시 기사님께 무한한 감사를 드립니다. 이런 손님에게 전화기까지 빌려주시다니요..), 난 역시 불콰한 얼굴의 수퍼 아저씨(계산대에는 한없이 투명한 소주와 벌건 젓갈이 놓여 있었다)에게서 여명을 사서 먹여주었다.
보람찬 하루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