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단속 주정
집으로 돌아오는 버스 안. 버스가 어느 정류장에서 멈췄는데 갑자기 쿵- 소리가 났다. 돌아보니 할머니 한 분이 쓰러져 있었다. 소리로 짐작컨대 넘어지면서 머리를 바닥에 부딪힌 것 같았다. 곧 사람들이 할머니를 둘러쌌고 버스 기사가 뛰어왔다.
"할머니 괜찮으세요? 괜찮으세요?"
그러나 넘어진 할머니는 정신을 차리지 못했고, 구급차를 불러야 할 것만 같았는데..
일행인 다른 할머니께서 말씀하셨다. "아, 얘가 술에 취해가지고.."
그럴 수 있다. 나도 학교 앞에서 술을 먹고 돌아오는 버스에서 졸다가, 버스가 크게 좌회전을 할 때 바닥을 뒹군 적이 있다. 정신을 차리고 자리에 다시 앉으니 손에는 피가 흐르고 있었다. 어서 빨리 집에 가서 자고 싶었다. 술에 취하면 다들 그렇듯이. 그러나,
집에 강적이 산다는 걸 잠시 잊고 있었다. 같은 날 저녁, 썬 역시 서울 어딘가에서 술을 마셨고, 나보다 더 일찍 술에 취했으며, 나보다 더 일찍 집에 돌아와 밖에서는 열 수 없도록 현관문을 잠근 채 잠이 들었다(걸쇠는 이미 내가 잘랐지만 — 2화 참고 — 다른 장치가 있었다. 그나저나 취한 주제에 왜 이렇게 문단속에 철저한지. 그냥 잠그는 것도 아니고 이중 잠금이 주정인 것 같다. 내가 아는 어떤 분은 식구 중 한 명이 술을 먹고 현관 비번을 바꿔서.. 결국 자물쇠를 교체했다고 한다. 술만 먹으면 자물쇠 놀이에 빠져드는 사람이 의외로 많은지도 모르겠다.)
술에 취해 손에 피를 흘리며 집에 도착했지만 문은 열리지 않았다. 전화를 수십 차례 걸고, 벨을 수십 차례 눌렀지만 아무런 답도 없었다. 결국 나는 집에 들어가기를 포기하고 문자 한 통을 남긴 채 난방도 되지 않는 연구소에서 겨울밤을 보냈다.
다음 날 아침. 정신을 차리고 주위를 둘러보았지만 내가 보이지 않는다는 걸 알게 된 썬.
'헐! 말도 없이 외박을 하다니 이런 미친..' 하며 전화기를 들었다가, '아, 내가 미쳤구나.' 하며 잠시 반성의 시간을 가졌다고 한다.
+ 수십 번의 벨소리에도 불구하고 숙면을 취할 수 있었던 비결은 고진감래주와 막소사주를 섞어 마셨기 때문이라고 썬이 친절하게도 알려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