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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집안의연구자 Feb 21. 2023

취생부인 뎐 #4

한밤의 지하철

1.

대학에 가서 들은 농담 중 하나는, 술을 먹고 신촌역에서 지하철을 탔는데 자다 깨보니 다시 신촌역이어서 '아, 내가 한 바퀴를 돌았구나'하며 다시 잠들었다가 다시 깨어 보니 다시 신촌역. 이렇게 다시 자고 다시 깨고 다시 신촌역이기를 몇 번 반복하다 크게 깨달은 바 있어 정신을 차려 보니 신촌역 플랫폼에서 자고 있더라는 것. 그때는 그게 농담인 줄로만 알았다. 그러나,


그렇다. 우리 집에는 그런 사람이 산다. 썬은 수개월 전 지하철 2호선 시청역에서 만취한 상태로 플랫폼 바닥(벤치가 아니다)에서 자다 시민의 신고로 출동한 역무원에게 연행, 아니 구조되어 잠을 깼고 용케도 집에 왔다. 술을 먹어도 어떻게든 집에는 온다. 신기하다. 그러나 집에 오는 길이 늘 쉬운 것은 아니다.


농담인 줄로만 알았던, 신촌역으로 영원회귀하는 전설 속 취객을 몸소 재현하며 놀라움을 안겼던 썬은 내가 생각지도 못했던 사실을 일깨워주기도 했다. 지하철을 타고 내릴 때마다 듣는 안내 방송, ‘우리 역은 열차와 승강장 간 거리가 머니 조심하라’는 방송은 과도한 염려 혹은 형식상의 안내라고만 생각했다. 그러나 비가 억수같이 쏟아지던 어느 밤 썬은 역시나 술을 먹었고 지하철에서 내리다가 서울교통공사가 그렇게 염려하던 그 일을 해내고 말았다. 열차와 승강장 사이 그곳에 발이 빠진 것이다. 플랫폼 벤치에 가까스로 도착한 썬은 나에게 전화를 걸었다. “빨리 와.”


전화를 받고 가니 플랫폼 벤치에 졸고 있는 취객이 있었다. 모르는 사람이었다면 좋았겠지만.. 이 취객은 걷지 못했고 알고 보니 취해서 그런 게 아니라 다리를 다친 것이었다. 괜히 하는 안내 방송이 아니었다. 나는 취한 썬을 업고 빗속을 헤치며 응급실로 갔다.


2.

썬은 택시를 싫어한다. 술을 마셔도 꼭 지하철을 탄다. 그래서 구로디지털단지역 인근에 살던 시절 썬은 합정역(당시 사무실 근처)에서 지하철을 타고 여섯 정거장 뒤에 내리질 못해 지나친 다음, 삼성동까지 간 뒤 그곳에서 택시를 타고 집에 왔다. 그러니까 애초에 합정역에서 탔으면 할증 요금이 붙기 전에 저렴하게 올 수 있는 그 거리를 마다하고 굳이 막차를 타고 먼 곳까지 간 다음에 할증 요금을 내고 택시를 타는 이유는 무엇일까.

어쨌든 썬은 택시를 싫어한다. 그래도 서울에 살 때는 여차하면 택시를 타겠지만, 경기 남부로 이사한 뒤로는 그것도 더 어려운 일이 되었다. 그래서 더욱더 지하철에 집착하게 되었는데..


상황은 대략 이렇게 전개된다. 금요일 밤 대림역(오래된 단골 마라탕 집이 있다)에서 2호선을 탄다. 미션은 사당역에 내려 광역버스를 타는 것. 그러나 지나친다. 역시. 정신을 차려서 깨면 성수동쯤이다. 전화기를 본다. 남편(나)이 건 부재중 전화가 대략 10통 정도 있다. 전화를 건다. 아직 지하철을 타고 갈 수 있다고 말한다. 그런 다음 전화기로 시간표를 확인한다. ‘그래, 나에겐 아직 서울대입구행 2호선이 있다.’ 다시 반대로 가는 지하철을 탄다. 나는 시간을 계산하여 사당역에 도착하기 직전에 전화를 한다. 썬이 전화를 받는다. 알겠다고 말하고 다시 잔다. 그리고 종점(서울대입구)에서 내리지 않는 썬을 어느 시민이 깨운다. 전화기를 본다. 남편이 건 부재중 전화가 12통 정도 있다. 전화를 건다. 아직 갈 수 있다고 말한다. (제발..) 다시 전화기로 시간표를 확인한다. ‘그래, 나에겐 아직 삼성행이 있다.’ 다시 지하철을 탄다. 그리고 ..


그러니까 썬은 사당역을 중심으로 끝없는 진자 운동을 한다. 대림 ➝ 성수 ➝ 서울대입구 ➝ 삼성 … 멈추지 않는 바이킹을 탄 사람처럼 이 취객은 내리지 못하고 잠이 든 채 서울 남부를 왕복 운동한다.


밤은 깊어가고, 썬은 오지 않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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