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는 우리가 헤어져야 할 시간
길지 않은 출판인 생애 동안 단 두 번의 계약 해지, 소위 말하는 드랍(drop)이 있었다.
한 번은 '어떤 책을 만들 것이냐'의 방향이 너무 달랐기 때문이었고 한 번은 '원활한 소통의 부재'때문이었다. 흔한 드랍 사유일 것 같지만, 생각보다 흔하진 않다.
내가 몸 담고 있었던 전문서 분야에서 드랍이 되는 가장 흔한 이유는 놀랍게도 '원고가 안 와서'다. 어느 정도 원고가 안 오면 출판사에서 먼저 때려치자고 하느냐, 그 기준은 출판사마다 다르지만, 대체로 2년 동안 원고가 코빼기도 보이지 않는 경우다. (가장 오랫동안 원고의 ㅇ도 볼 수 없는 상태로 계약을 유지한 경우로는 무려 5년까지 봤다)
처음 입사할 당시 3년 묵은 저자가 있다는 소식을 들으며 패기 가득한 신입이었던 나는 이렇게 생각했다.
'편집자 하기 나름이지'
그후 몇 년이 지난 지금도 그 생각엔 변함이 없다. 다만 전제 조건이 추가됐다.
'(기력만 있으면)편집자 하기 나름이지'
개개인에 따라, 출판사에 따라 천차만별이겠지만, 확실한 건 편집자 1명이 저자 1명만 주구장창 마킹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는 것이다. 축구처럼 11대 11로 공격수 수비수 등 여러 포지션을 나눠서 착착 내 역할을 잘해내면 되는 게 아니라 편집자 1명이 공 찼다가 태클 걸었다가 골대 막았다가 드러누워야 하는 경우가 다반사다. 종종 응급처치도 직접 해야 한다.
편집자 1명이 저자 1명을 기획하고 소통하며 원고를 받고 편집하고 출간하는 과정을 1명이랑만 한다면 편집자 연봉은 지금보다 더 박봉일지도 모른다. 정신은 A 저자에게 쏟아져 있더라도 몸은 B 저자의 원고를 편집하고 있어야만 1년 안에 4-5권의 책을 꾸준히 냄으로써 밥값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즉, 원고가 최소 2개까지는 맞물려 돌아가야 한다. 개인적으로 가장 많이 맞물려 본 경우는 5개까지였다. (탈고된 원고 3개 + 탈고 직전 원고 2개 + 탈고를 독려해야 하는 원고 서른마흔 개)
거기에 저자 관리 시스템은 누적 시스템이다. 즉, 한 명과 일대일로 붙어 책을 한 권 끝낸 뒤 '다음 저자 들어오세요'하고 새로운 저자가 들어오면 책을 끝낸 이전 저자는 집으로 돌아가고 평생 볼 일이 없는 사람이 되는 게 아니다. 나간 저자는 다시 대기실에 앉는다.
책이 출판된다고 모든 게 끝나면 좋겠지만, 사실상 2차전에 진입한 것에 불과하다. 판매 현황 보고, 마케팅 방안 제안, 독자 반응 보고 등 책 사후 관리를 위한 소통도 필요하지만, 무엇보다 다시 좋은 책으로 만날 가능성을 염두에 두어야 하기 때문이다.
저자 입장에서 편집자는 1명이다. 내 글을 책으로 만들어주고 책과 관련된 모든 일정을 관리해주는 일종의 매니저인 셈이다. 필요할 때 전화하고, 궁금할 때 카톡하고, 결과물이 늦는 것 같아서 메일을 보낸다. 그러나 협업하고 있는 저자가 열댓 명인 편집자에겐 저자들의 연락이 빗발치고 있는 상황이다. 심지어 전업 작가가 아닌 저자들이 대부분이라 거진 본인들의 업무가 끝난 늦은 시간이나 주말에 쉬던 중 연락하는 경우도 많다.
(주말에 회사에 있는 파일을 지금 당장 보내달라던 저자ㄴㅣㅁ도 있었다)
즉, 성실하게 착착 원고를 써가면서 일정을 체크하는 저자나, 탈고한 뒤 편집 일정을 확인하는 저자 또는 출간 직전 모든 일정을 보고하고 가장 친밀하게 소통을 진행해야 하는 시기에 놓인 저자 그리고 약속한 날짜를 매번 어기거나 연락이 제때 되지 않거나 매번 노트북을 잃어버리거나 매번 어디가 아프고 자주 개인 사정이 생겨 원고를 쓸 수 없다고 호소하는 저자들을 독려하기에 몸 하나는 야속할 정도로 부족하다.
사실 지금 당장 원고를 쓸 의욕이 충만한 저자를 독려하는 게 훨씬 일 처리가 수월하다. 내 책이 어떻게 나올지 관심을 보이며 눈을 반짝반짝 빛내면서 편집자와 한 마디라도 더 해보려는 저자와 소통하는 게 훨씬 마음도 편하고 의욕도 솟아난다. 어쩔 수 없이 사람 마음이 그렇다.
원고가 안 오면 책이 나올 수 없다.
쌀도 안 주고 밥을 지으라니. 불가능한 미션을 왜...?
계약을 해지하고 계약금을 돌려받고 그 돈으로 더 의지 충만한 신예 저자, 작가들과 책을 만들어가야 하는 게 상식적인 행보다.
그럼 방향성이 다르다거나 소통이 힘들다는 이유로 책이 드랍되는 경우는 어떤 상황까지 이르러야 가능한 걸까? 사실 이 얘기가 하고 싶어서 입이 근질근질했는데, 지금까지 일하면서 깨달은 한 가지 진리가 있다.
책의 퀄리티는 결국 저자로부터 나온다.
편집자가 발버둥쳐서 높일 수 있는 퀄리티에는 분명 한계가 있다.
내가 출판사에 입사해 난생 처음 기획한 책도 책을 처음 쓰는 저자와 함께였고 지금까지 출간한 대부분의 책이 '처음 책을 쓰는 저자'와 함께였다. 더군다나 교재, 역사, IT와 같은 전문서와 에세이, 소설과 같은 문학, 인문 분야 편집자가 원고에 개입하는 방식은 완전히 다르다. 난 운이 좋게도 전문서와 인문이라는 두 분야에 발을 걸쳐 다양한 저자들을 만나게 되었는데, 편집 접근 방식에 따라 나타나는 반응도 분야 특성 만큼 천지 차이다.
앞서 내가 먼저 포기하겠다고 선언한 두 책은 각각 전문서와 인문인데, 재미있는 건 두 저자에게 공통점이 있다는 것이다.
1. 책을 처음 쓴다는 것
2. 본인만의 색깔이 뚜렷하다(라고 생각하)는 것
3. XX 나는 나만의 길을 간다
2번까지는 흔한 케이스지만 여기에 3번이 합쳐지면 폭발적인 시너지를 내는데, 그 위력이 어느 정도냐면 편집자의 대뇌피질을 홀라당 태워버릴 정도로 강력하다.
네이버 사전에 따르면 대뇌피질은 기억, 집중, 언어, 사고 등 부위에 따라 여러 중요한 부분을 담당하고 있다는데 이 중요한 게 홀라당 타버렸으니 유독 평소에 하지 않던 말도 안 되는 실수가 잦아진다. 쉽게 말하면 심적으로 위축된 상태가 된다. 그러면 자연히 소통을 하는 데도 삐걱거리고 편집을 하는 동안에도 고민을 하게 되니 시간도 지체된다.
편집자가 이 모든 걸 이겨내는 방법은 단 하나다.
'원고의 퀄리티'
이 원고를 만났을 때 독자들 반응을 생각하며 조금씩 나아간다. 실제로 이런 식으로 책이 출간되었을 때 독자들의 반응을 얻고 나면 저자와 있었던 수개월 간의 앙금은 입 안에 들어간 참치 대뱃살처럼 녹아버린다. 물론 반응을 얻지 못해도 결과물을 위해 서로 피땀눈물을 흘렸다는 것을 알아주는 것만으로도 동지애가 생겨난다.
그럼에도 드랍을 했다는 것은 ...
이 매거진의 모든 글은 개인적 경험으로, 출판사마다 편집자마다 견해가 다를 수 있으며 시기에 따라 일부 내용에 변동이 있을 수 있음을 참고해 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