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강연수 Nov 12. 2021

걷기 in 서울 6

남산한옥마을

안녕하세요. 옛날 것만 쳐다보고 있으면 시간가는 줄 모르는 예비 문화해설사 강연수입니다.  


옛날 물건들을 들여다 보고 있으면 이 물건은 무엇에 쓰는 물건인지.. 이 물건의 처음 주인은 누구이고 마지막 주인은 누구였는지.  어떤 연고로 이 물건이 지금 여기에 있게 된 것인지..  질문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일어나서.  가만히 들여다보고 있으며 정말이지 상상의 나래가 하늘 끝까지 날아간답니다.

오늘 저는 한옥에 대해서 설명을 하도록 하겠습니다.

한옥은 집입니다.  집이란 사람이 사는 공간을 말하는 것이지요.  한옥은 주로 나무로 만들어져 있습니다.  

집을 만드는 순서는 우선 돌 받침대 주춧돌을 놓고 그 위에 나무로 기둥을 세우고 그 기둥의 머리 부분의 옆으로 서로 창방이라는 부르는 나무판으로 서로 연결을 해서 넘어지지 않도록 했습니다.  그리고 머리 부분의 위에 역시 나무로 된 보와 도리를 올려서 지붕의 기초을 잡습니다.  한옥은 주로 정면이 길고 측면이 짧은 게 일반적인데 정면 방향을 길게 지붕을 받치고 있는 부재를 도리라고 하고 측면방향으로 지붕을 받치는 부재를 보라고 부릅니다.   기둥과 보 그리고 도리가 서로 끼워져서 한옥의 구조를 가구식 구조라고 부릅니다.  이 가구 이에 기와를 깔기 위한 서까래를 걸고  그 위에 까만색 기와를 얹어서 지붕을 완성합니다.  

사용한 자재 중에 제일 큰 나무로써 지붕의 한가운데를 딱 잡고 있는 나무가 우리가 잘 아는 집안의 대들보입니다.  대들보에 가장 큰 나무를 사용하는 데 대들보의 크기를 보면 이 집이 좀 살았구나..  뭐 신통치 않았구나 하는 것을 한번에 알수 있습니다

지붕에 서까래와 기와를 깔 수 있도록 보와 도리가 설치가 되면 다음에는 방과 마루를 놓지요.  방은 그 밑에 구들을 깔아서 추운 겨울철 따뜻하게 보낼 수 있도록 온돌(구들)을 설치합니다.  온돌은 우리나라가 원조여서 영어사전에도 온돌 (Ondol) 이라고 표기된 난방시스템으로 풀이가 되어 있습니다.   마루는 더운 여름날 시원하게 보낼려고 나무로 바닥만 깔았습니다.  밑은 비어 있습니다.  그래서 한옥은 땅으로부터 바닥이 띄워져 있는 특징이 있습니다.   한옥은 이처럼 겨울과 여름과 같은 기온의 차이를 잘 극복할 수 있도록 만들어진 과학적인 구조의 집입니다.  

천우각

자 그럼 먼저 천우각에 대해서 해설을 해 보겠습니다.  천우각은 ‘정자’입니다.  정자 치고는 상당히 규모가 큰 정자 입니다.   마치 남원의 광한루나 병산서원의 만대루처럼 큰 정자입니다.  보시는 바와 같이 새로 만든 정자이고..  이곳에 천우각이 지어지게 된 계기는 영조때 김윤겸이란 분의 화첩인 금오계첩의 남산 계곡 그림에 천우각이라는 정자가 있었던 것을 참고 삼아 이곳 한옥마을 입구에 청학지라는 연못과 천우각이라는 정자를 지었습니다.  이 곳의 다른 건물에 비해서 천우각이 확연히 다른 점이 있을까요?   

다른 점은 많겠지만 저는 단청이 확연히 다르다는 인상을 받았습니다.  조선시대만 해도 검소하고 청빈한 것을 중요한 덕목으로 삼고 살던 사람들이어서 울긋불긋한 단청은 궁궐이나 사찰 정도에 주로 쓰고, 사대부의 집에는 그다지 사용하지는 않았습니다.  단청은 불교의 연꽃문양이나 당초문 보상화 문양을 주로 사용을 한는데 집을 예쁜색으로 치장하는 데 그 의의가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단청의 색깔은 오방색이라고 불리우는 흑,백,청,황,적을 사용하는데 너무 선명하게 울긋불긋해서 그다지 현대인들이 좋아하는 컬러는 아니지요.  단청의 색을 제대로 즐기려면 바깥에서 쳐다보는 게 아니라 저 정자 안에서 바깥을 보는데 그 묘미가 있습니다. 안은 그늘이 지기 때문에 차분한 색을 칠해 놓으면 안에서 바깥을 보면 칙칙해 보입니다.  그래서 정자 바깥의 자연의 경치와는 사뭇 경계가 져 보입니다. 하지만 밝은 색을 칠해 놓으면 그늘이 지더라도 정자 바깥의 산이나.. 연못의 색깔 정도의 톤을 유지하기 때문에 천정이 산과 호수의 자연빛과 크게 다르지 않게 보여서 편안함을 줍니다.   한옥은 바깥에서 보는 것보다 안에서 바깥을 볼 때 훨씬 이쁘게 만든 집이 거든요.

천우각의 처마

그리고 이런 정자의 또 다른 멋은 처마의 곡선에 있습니다.  물론 다른 한옥들도 처마의 곡선은 다 예쁩니다.  하지만,  이렇게 시원하게 길어 뽑힌 지붕 처마의 끝이 버선코처럼 오뚝하게 올라간 것을 보려면 역시 이런 식의 정자가 제 맛입니다.

이런 처마 끝을 추녀라고 하는데 추녀의 각도가 올라가게 된 이유를 TV 에서 보고서 알게 되신 분들이 많지요.  추녀 쪽의 기둥으로는 그늘이 길게지기 때문에 기둥에 습기가 차면 쉽게 마르지 않아서 잘썩게 되는데 이것을 방지하고자 햇볕이 충분히 들도록 추녀쪽 처마를 올리게 되었답니다.

그런데 추녀쪽 처마코를 위로 올리고 처마의 가운데 부분의 잘록하게 유지하기 위해서는 많은 노력이 필요합니다.  나무가 알아서 그런식으로 휠리는 만무하기 때문에 이 휘어진 상태로 유지하기 위해서 많은 힘을 주어서 서까래를 붙잡고 있어야만 합니다.  이런 식의 휘어진 처마는 중국이나 일본 같은 곳에도 있기는 합니다만,  그곳에서는 역사상의 잠간 동안 유행하다가 없어진 양식이랍니다.  그런데 우리는 조선은 물론이고 아마도 고려시대에도 이런 식의 처마 양식이 있지 않았을까 하고 생각합니다.  조선은 500년동안 좀 산다고 하는 집은 반드시 이런 양식을 유지했고요.  왜 중국이나 일본에서는 잠간 유행하던 것이 우리땅에서는 적어도 500년 이상 버텼을까요.?

이런 예는 참 많습니다.  기와도 우리는 예전이나 지금이나 암기와 숫기와를 나누어서 사용을 하지요.

그런데 일본에 가보면 그들의 기와는 암수한몸입니다.  암기와, 숫기와의 기능을 한꺼번에 가지도록 기와를 개량해서 사용을 한 것이지요. 우리나라도 일제강점기 이후로 지은 기와집들을 보며는 일본식 개량기와를 많이들 사용을 하지요.  일본사람들이 예전 백제에서 전해준 기와를 그대로 사용하지 않고 개량을 한 이유는 가격이 쌓고 시공이 손쉬운 것 때문이었습니다.  조선시대에 일본을 여행한 우리 조상들의 기록에도 일본의 개량기와 대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하지만 우리 조상들은 개량기와를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일본식 기와가 우리나라에 들어오게 된 것은 구한말과 일제강점기에 일본인들이 집단적으로 우리나라에 거주하게 되면서 부터 였습니다.  강제적이었던 것이지요.   처마의 곡선처럼 전통식 기와를 고집한 우리 조상들의 숨은 의도는 무엇이었을까요?  중국인과 일본인 혹은 서양인들과 비교되는 한국인들의 특징 중에 멋부리는 것을 좋아한다는 게 있습니다.  물론 제 말을 동의하시는 분도 있을 것이고 아니라고 하시는 분도 있겠지만, 저는 우리나라 사람들이 다른 외국인들에 비해서 바깥으로 들어나는 자신의 모습에 신경을 훨씬 많이 쓴다는 생각을 늘 하고 있습니다.  맵시나 꾸밈새 같은 것에 유달리 집착을 하지요.   개량기와가 암만 가격이 싸고 편해도 처마를 일직선으로 하는 것이 훨씬 집의 내구성을 올리고 건축비를 절감할 수 있어도.  모양이 맘에 들지 않으면 끝끝내 받아들이지 않는게 우리나라 사람 특징 중에 한가지인 거라는 생각을 해 봅니다.


자 그럼 남산한옥마을의 첫번째 집 옥인동 윤씨 집부터 가보도록 하겠습니다.

윤덕영은 경술국적으로 대표적 친일파 중에 한사람입니다.  친일인명사전에도 이름이 올라가 있습니다.

일제로부터 귀족 작위을 받은자로 재산이 상당했던 자로 옥인동 지역(현재 서촌)에 대저택을 지었습니다.  지금 보시는 건물은 윤덕영이 살던 집이 아니라 옥인동 지역에 있던 윤덕영의 소실의 집을 서울시가 이리로 이전해 온 것입니다.  원래 집은 상당히 오래된 집이라 부재들도 이미 다 삭아버려서 이리로 가져오지는 못했지만 세심한 고증을 거쳐서 기존 집의 형태를 그대로 이리로 가져왔습니다.

옥인동 윤씨 가옥의 사랑채 마루

이 집의 특징은 형태가 안채와 바깥채가 각각 ‘ㄷ’ 형태로 서로 맞물려서 ‘ㅁ’ 자로 완성이 되었고, 그 덕택에 마당을 한가운데두고 안채와 사랑채, 행랑채 부엌을 돌아가면서 설치를 한 중부이북의 전통 한옥 형태를 띠고 있습니다.  그리고 여성의 공간인 안채에 비해서 남성의 공간인 사랑채가 상당히 작습니다. 원래 이 주택이 인왕산을 배경으로 해서 계단을 제법 올라가야 하는 위치 있었던 것을 생각해 보면 사랑채에서 바깥쪽을 내다보는 맛인 일품이었을 것으로 생각이 됩니다만, 사용빈도는 그다지 많지는 않았나 봅니다.  

한옥은 문이나 창을 상당히 크게 사용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벽을 이루고 있는 공간이 별로 없지요.  그래서 개방감을 상당히 좋고 안에서 바깥을 쳐다보고 바깥의 경치를 즐기는 즉 차경에는 특화된 집이입니다.  하지만 그 만큼 개인의 프라이버시는 좀 희생이 되는 구조라 할 수 있습니다.

유리가 아직 공급되기 전의 집들이라 주로 창과 문에는 창호지를 붙여 놓았습니다.  나이 좀 지긋하신 분들은 녹말풀 쑤어서 문살과 창살에 창호지 붙이던 기억이 있으실 것 같은데 어떠세요?  해 보신 분??

예전에 중국에 살았을 때 북경에 있는 중국박물관에 몇차례 구경을 간적이 있습니다. 나라가 크고 역사 깊기 때문에 우리가 상상도 못할 여러가지 진귀한 문화재들이 전시가 되어 있는 곳입니다.  그곳에 갔을 때 인상적이었던 것이 한가지 있었는데 그곳에는 중국국내에서 만들어진 오래된 역사적으로 가치가 있는 물건들 뿐만아니라 외국에서 중국으로 들어온 문물들,  일종의 수입품들도 전시가 되어 있습니다.  여러나라에서 들어온 물건들이 있었는데 우리나라.  즉 한반도에서 중국으로 들어간 제품은 딱 한가지가 있었습니다.  그게 뭔줄 아시겠습니까?  고려자기나 불화도 아니고.. 신라의 금은세공품도 아닌,  바로 한지 였습니다.  우리나라 닥나무를 두드려서 만든 한지가 조선반도에서 들어온 수입품 중에 유일하게 북경박물관에 전시되어 있었습니다.  다른 어떤 것보다도 한지의 품질이 중국의 어떤 종이보다도 질적으로 우수한 면이 있었던 것이지요.  우리 한옥의 창과 문에는 창호지로 한지를 사용합니다.

한지가 질기기도 하고 열도 잘차단하고,  심지어 습기를 빨아들이는 역할까지 해서 집,.. 특히 방안의 온기와 냉기를 보존하는 데 아주 훌륭한 역할을 한 것 같습니다.

이렇게 바깥으로 나와 있는 기둥을 툇기둥이라고 하고 그 밑에 마루를 툇마루라고 합니다. 문과 창의 구분은 문은 밑으로 문지방 말고는 다른게 없어서 이동시에 걸치지 않게 되어 있고,  창은 아래쪽이 머름이라고 해서 열었을 때 팔을 괴고서 바깥을 내다 보게 되어 있습니다.  창이나 문을 보면 확실히 이 집이 바깥에서 안을 보는 집이 아니라 안에서 바깥을 보았을 때 맛이 제대로 나는 집이라는 것을 알수 있습니다,  계단으로 올라오는 것도 모자라서 안채의 기단은 상당히 올라가 있어요.  이런 집은 확실해 대청이나 기단석 댓돌 위에서서 아래를 쳐다보는 게 멋입니다.  이집에 살던 윤덕영의 소실댁은 저 대청마루 앉아서 무슨 생각을 했을까요?


자.. 윤덕영의 집을 나와서 그의 동생이자 역시 유명한 친일파 윤택영의 집으로 이동을 하시지요.

윤택영은 조선의 마지막 황제 순종의 황비 순정효 황후 윤씨의 부친입니다. 조선병합을 도왔고 이왕조의 부원군이라고 해서 일제로부터 후작의 지위까지 받고 많은 재산을 이루었지만 채무왕이라는 별명처럼 씀씀이가 너무 헤프고 욕심이 많아서 결국 엄청난 빚을 지고 북경으로 도망가서 거기서 객사를 했답니다.   그는 유명한 친일파였는데 그의 아들인 윤홍섭은 독립운동을 했던 분이고 딸인 순정효 황후 윤씨도 일제에는 많이 비협조적이었던 분으로 유명하십니다.

집이 재실로 불리는 것은 이 집이 여염 살림집이 아니라 윤씨 일가의 사당이 있는 집이어서 그렇습니다. 집은 순정효 황후 윤씨가 황후로 간택이 되자.  순종황제가 그 집안의 사당에 참배를 해야 할 일 생겨서 부랴부랴 경희궁의 자재로 제기동에 새로 지어진 건물입니다.  집의 형태가 재실이라는 특징 때문에 사당을 제일 안쪽으로 두고 그 아래쪽으로 안채와 사랑채를 길게 연결하고 있는 구조라서 제각각인 전통한옥 중에서 가장 독특하게 원(元)자형으로 된 길상문자(吉祥文字)를 이루고 있습니다.

높이 솟은 솟을대문을 지나서 안으로 들어오면 사고석으로 이루어진 화방벽 반담 담장을 거쳐서 오면 특이한 구조의 집터를 마주하게 됩니다.  이 집터의 특이한 점 안채와 바깥채가 긴 대청마루를 사이에 두고 붙어 있는데 상당히 길게 떨어져 있습니다,  일반적으로는 보통 사대부의 집은 정문에서 들어서면 먼저 바깥채가 먼저 보이고 바깥채를 지나쳐서 더 들어가면 여성들의 공간 안채가 나오는데 이집은 솟을 대문을 지나서 곧장 들어오면 바깥채는 있는 줄도 모르고 지나쳐서 안채부터 보게 됩니다. 안채와 바깥채 사이에는 가운데 마당이 공간이 있는데 계속 문을 닫아 놓아서 볼 수가 없고 이렇게 돌아서 안채까지 와서 안채랑 바깥채 사이의 긴 마루를 보고 다시 장독대를 보고 사당으로 올라가는 동선입니다.

장독대 바로 옆에 솥을 걸수 있는 화로대가 있는데 재사 때 사용하도록 만들어진 것으로 보입니다.  집의 크기에 비해서 부엌이 협소해서 살림집은 아니라는 것을 알수 있습니다.

사당이 높은 곳에 위치하고 있어서 여기 올라오면 지붕을 잘 볼 수 있습니다.  한옥지붕은 여기 사당처럼 앞뒤로만 마주보게 기와지붕을 올린 맛배지붕이 있고 좌우로 지붕을 된 지붕이 팔자같다고 팔작지붕. 여기서 없지만 처마 끝을 들어지는 추녀마루 없이 그래로 내려오는 우진각 지붕등이 있습니다.  사당이나, 릉의 정자각 처럼 엄숙한 분위기를 내는데는 주로 밋밋하지만 장중한 맛을 주는 맛배지붕을 많이 씁니다.  하지만 맛배지붕의 좌우는 비와 햇볕에 바로 노출이 되는 구조인데 이것을 보완하기 위해서 저렇게 풍판을 대어줍니다.  풍판 위에 이어진 판을 박공이라고 하고 박공의 중심부에는 지네철이라는장식을 붙여서 박공이 튼튼히 이어져 있다는 표식을 했습니다.


안채와 바깥채의 구분을 어떻게 하는지 아세요?  안채는 여성들의 공간이니 필수가 부엌입니다  부엌이 달려 있으면 안채인가보다 하고 생각하심 됩니다. 바깥채 혹은 사랑채라고 불리는 공간은 남성의 공간이었습니다.  사랑채를 표시하는 대표적인 장치가 여기 있는 누마루입니다.  누마루와 방 사이는 단을 두어서 누마루는 지면으로 보다 더 떨어지게 만들었습니다. 마루와 방은 아래에 구들이 있는지 없는지를 통해서 구분이 됩니다.  바깥채에 주로 거주하는 바깥양반은 여기서 손님들을 맞거나 책을 읽거나 하면서 소일을 했을테지요.  우리나라 전통한옥에서 가장 멋진 공간이라고 생각되는 누마루는 여름 한철에 글을 읽고 있다가 문득 고개를 돌려쳐다본 바깥의 풍경을 그윽하게 쳐다보는 게 가능한 공간입니다.  물론 글을 읽는게 다는 아닐것이고 찾아온 벗이랑 밤새도록 술잔 돌리며 이야기를 나누는 것으로도 최적의 장소였음에 틀림없습니다.

자 이제 또다른 친일파 민영휘의 관훈동 민씨 주택으로 이동을 하겠습니다.

명성황후와 그 조선왕실의 외척세력으로 조선이 망하는데 한몫을 단단히 했던 민씨 일가 중에서 민영휘는 상당히 이재에 밝았던 사람이었던 것 같습니다. 오랜 관직생활에서 마련한 재물을 더욱 늘여서  관훈동 일대의 땅과 집들을 사들였다고 합니다.  현재 이집은 그가 관훈동 일대 4000여평에 지우고 모았던 수많은 집들 중에 대표적인 3채만 이곳에 남산마을에 옮겨서 지어놓은 것입니다.  이 집은 사랑채와 안채 사이에 내외담을 쌓아서 남녀간 구분을 확실히 했고 안채 뒤로는 별당채를 두었습니다.  

관훈동 민씨 가옥

사랑채와 안채의 구분은 누마루 혹은 부엌의 유무로써 남성과 여성의 공간을 구분해 내듯이 하는 것이라고 미리 말씀을 드렸습니다,  사랑채의 경우는 저렇게 마루 아래를 비워놓아서 여름철 시원하게 사용이 가능한 누마루가 있습니다.  그리고 누마루 밑에 들마루를 보관하기도 했습니다.  여름철에 큰 느티나무 아래에 평상(들마루)에서 수박 한통까서 먹고, 누워서 매미소리 듣는게 참 좋았습니다만….여튼

그리고 안방과 건넌방 사이에는 큰 마루인 두었습니다. 대청을 넓게 사용하려면 각 방의 문을, 열어들개문을,이렇게 들어올려서 걸어 두게되면 방과 방사이가 시원하게 뚫리며 넓은 공간이 나타납니다.  원래 이정도로 넓은 대청공간은 오직 궁궐에만 허락이 되었습니다  조선말이 되면서 왕의 권위가 많이 추락하게 되었고 더군다나 조선말이 되면 왕을 무시하는 양반들까지 나타나게 됩니다  여기 민영휘도 4000여평의 집에 궁궐을 능가할 만한 집을 지어놓고 살았나 봅니다.  

한옥에서 마루라는 공간은 특히 재미있습니다.  한옥의 마루는 요즘 아파트의 마루랑은 다릅니다.  마루가 바깥과 직접 접하고 있고 바깥에서 방으로 들어가는데 반대로 방에서 바깥으로 나오는데 반드시 마루라는 공간을 거쳐서 나가고 들어오는 구조입니다.  전혀 다른 두개의 공간을 이어주는 공간입니다.

마루라는 말이 순수한 우리말이고 뜻이 언덕이라는 것을 잘 아시지요.  마루는 높은 곳, 귀한 곳이라는 뜻이 있답니다.  흔히 양반댁 안주인을 마님이라고 부르는데 원래 말은 ‘마루님’, 혹은 ‘마루하’ 라는 말이 줄어서 마님이 되었답니다.  집안에서도 마루에 앉아서 바깥이 쳐다보는 존재는 높은 사람이라고 주로 안방마님이지요.   

한자로도 마루는 마루 종 宗자를 씁니다.  마루 종자는 종묘사직, 혹은  종가집이나 종손 등을 이야기할 때 쓰는 한자이지요.   예전 마루에는 집에서 가장 높은 신은 성주신이 있던 공간이고.  유교 전통에서 제사를 지낼때는 마루에서 지냅니다.  그리고 집에 사당을 모실 만한 공간이 없으면 대청마루 한가운데 제례의 공간을 마련해 두지요.   일본 전통 가옥 구조에서도 마루의 한켠을 도고노마 라고 해서 조상신이나 집안의 신을 모시는 공간을 두고 특별한 장식을 해 두지요.  두나라 가옥구조에서 마루에 귀하고 신성한 한 존재를 모신다는 점은 일치합니다.

안채의 뒷편에는 시집가지 않은 딸이나, 며느리에게 안살림 다 할머니,  갓 결혼해서 신혼살림을 채린 아들내외가 살던 별당채가 있습니다.

이렇게 툇기둥을 두고서 그 안쪽 공간을 방옆으로 복도 같은 공간을 툇마루라고 부릅니다, 그리고 이런 툇기둥이 없이 바깥이 지어진 작은 마루를 쪽마루라고 부릅니다.  마루는 다시 그 바닥의 모양에 따라 우물정자를 닮았다고 해서 우물마루,  길게 널찍한 나무판을 대어준 장마루 등으로 나눌수 있습니다.

내외담 끝의 일각문을 지나면  ‘ㄴ’ 자 형태의 안채가 나옵니다.  이 집의 안채는 엄청난 크기의 대청마루를 자랑합니다.  소위 십칸 대청이지요.  그리고 대갓집 답게 부엌 역시 상당히 큰 규모의 집입니다.

마당 공간 역시 충분한 안채는 앞쪽에 마당공간을 두고 뒷편으로는 정원을 두었습니다.  여름철이면 햇볕에 뜨거워진 마당의 공기는 하늘로 올라가고 뒷편의 시원한 공기 뒤편에서 앞편으로 희박한 공기를 채우려 내려오면 대청에는 시원한 바람이 일게 됩니다.  작은 공간내에서 기압의 차를 이용해서 바람을 만들어내는 정말 자연친화적인 건물이 한옥입니다..

넓찍해서 전통혼례 예식장으로 쓰이는 민씨 가옥의 건물을 지나면 사고석 예쁜 담장 끝으로 오위장 김춘영의 소박하고 아담한 가옥이 있습니다

조선 후기에 오위장(五衛將) 벼슬을 지낸 김춘영이 1890년대에 지은 집입니다. 오위(五衛)는 조선시대 중앙 군사조직을 말한다. 지금 건물은 종로구 삼청동에 있던 것을 한옥마을로 옮겨 복원한 것으로 대문채, 사랑채, 안채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사랑채는 대문채와 연이어 돌출되어 있으며 사랑방·대청·건넌방으로 짜여져 있고, 안채는 ㄷ자형 평면으로 서울지방의 일반적인 주택 구조를 따르고 있는데 대청을 중심으로 오른쪽에 건넌방, 왼쪽에 안방·부엌·마루·광을 두었다. 대문에 들어서서 왼쪽에는 문간방이 1칸 있습니다.


전체적으로 조촐한 양식을 보이는 집으로 안방 뒷쪽 벽을 독특하게 쌓아 집의 격식을 한층 더 높이고 있습니다.


이집의 재밌는 점은 사랑방에서 안방과 건넌방 혹은 안방, 건넌방에서 사랑방으로 고개만 들면 바로 보이는 구조라는 점입니다.  지금까지 여러 양반 집들을 보셨습니다만,  조선시대의 결혼한 부부들이 생활하는 공간이 완전히 구분되어 있다는 것을 아실수 있습니다.


유교적 영향도 있을 것이고 살아보며는 부부 사이라도 집안에서 독자의 공간을 가지고 지내는 게 편하다는 이유일 수도 있을겁니다.  하지만 남녀가 유별해도 부부라는 게 젊을때나 나이를 먹었을 때나..  지금 뭐하고 지내는지 궁금할 때가 있지 않습니까?   제가 직장관계로 인천에서 생활하고 있고 가족들은 포항에 있는데 어쩌다 한번씩 집에 가도 반가운 것은 잠시이고 한집안에서도 각자의 공간에 흩어져서 지냅니다.  좁은 공간이지만 방들이 각각 분리가 되어있고 밥을 먹거나 TV를 볼때 정도 같은 거실에 있지요.  저도 제방에서 주로 컴터를 보거나 책을 보거나 하는데,  가끔 아내가 뭐를 하고 있는지 궁금합니다.  그렇다고 옆에가서 간섭하기도 싫고..  그런 면에서 이 집은 그런 욕구를 충족하기 좋은 집이라는 생각입니다.  아내가 뭐하고 있나.. 심심해 하고 있지는 않나.. 넌져시 쳐다보기 좋은 집안 구조입니다.   물론 보여주기 싫으면 창을 닫아 버리는 그만이기 합니다.

 저는 이 집을 들어오는 골목길을 좋아하는 데요.  민씨 가옥 담장이 김춘영 가옥과 만나면서 예쁜 골목길이 만들어져 있습니다. 담장도 돌담이라 예쁜 돌담길이 생겨났습니다. 이런 골목길을 고샅이라고 부릅니다.  우리가 대부분 아파트나 맨션등에서 거주하기 전의 거주형태를 기억하는 한국인들이 정취 중는 골목길이라는 게 있지요. 나중에 나가실 때 앞을 보시면 이 골목길이 만들어내는 정취에 깜짝 놀라실 겁니다.

자 다시 예쁜 돌담길 고샅을 지나서 마지막 집인 삼각동 도편수 이승업의 가옥으로 가보도록 하지요.

도편수 이승업은 고종때 경복궁 중건 공사에 참여했던 당대 최고의 목수였다고 합니다.  한옥은 대부분 나무로 이루어진 집이어서 한옥공사판에 목수의 우두머리는 실질적으로 공사판의 최고 우두머리라고 할 수 있습니다.  더군다나 재료가 완전히 다듬어지지 않은 상태에서 공사판에 도착을 하고 재료의 길이나 상태에 따라서 그때 그때 집의 형태를 바꾸기도 하고 주위 경관과 어울리게 만드는 일이나,  주위 경관을 효과적으로 차경할 수 있도록 집의 구조를 다듬는 일은 거의 대목의 눈매에 의존한다고 할 수 있어서 대목의 실력이나 감각이 한옥건축의 성패를 좌우합니다.   요즘같이 설계사무실에서 대부분을 결정하는 것과는 좀 다른 형태의 집짓기 였습니다.

이집도 전체를 다 가져온 것은 아니고 그나마 보존이 잘 되어있던 안채와 사랑채만 이리로 가져와 지었습니다.  집을 이곳에 안치는 과정에서 이곳의 형태에 맞게 좀 수정한 것이 있어서 완전히 예전 형태를 보여주지는 않지만 그래도 목수가 자기 살집을 지은 것 답게 웬만한 양반가의 집들보다는 예술적이로나 건축적으로 훨씬 뛰어난 집입니다.


중문과 월문이 없어져 버려서 예전의 형태를 짐작할 수가 없습니다만,  이집의 특징은 들어오는 공간에 중문을 두어서 대문에서 가까이 있는 안채를,  사랑채를 들런 다음 월문을 통해서 들어오게 만들어 놓았습니다.  안채와 사랑채는 담으로 구분이 되어 있습니다만, 그리고 안채는 마당에서 ’ ㄴ’ 자로 보입니다만,  실제는 왕릉의 정자각 처럼 정 丁자 형태를 뛰고 있습니다.

사랑채보다 안채에 많은 공을 들여서 만들어 졌습니다.   이 집을 직접 설계하고 시공을 한 입장인 도편수 이승업이 아내를 생각해서 안채에 더 많은 비중을 두고서 집을 지은 것 같습니다.

무엇보다 이집의 재미는 난간에 있다는 생각을 합니다  보통 툇마루 공간에 난간을 설치하지 않는 게 일반적인데 이집은 마치 궁궐처럼 툇마루를 돌아가면서 예쁜 난간을 설치했습니다.   도편수 이승업의 감각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


안채의 한쪽은 맛배지붕 반대편은 팔작기붕 날개체는 다시 맛배지붕..  전체의 건축이 그 쓰임새와 바깥과의 조화를 이루도록 만든 대목의 실력입니다.


정말이지 그때 그때의 형편에 맞게 용이주도하게 융통성을 발휘하고 있습니다.  이런 점은 요즘 한국인들의 모습이 어디에서 비롯된 것인지 이해가 되는 부분이기도 합니다.


자 이제 남산 한옥마을의 다섯채의 집들..  집주인이 친일파고 뭐고 하는 것은 좀 떠나서..  우리의 건축..  특히 구한말, 일제강점기에 근대건축으로 완전히 넘어가기 전에 우리 전통을 최대한 살린 건축물들을 보셨습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궁궐의 건축도 제일 훌륭하고 생각을 합니다만,  이곳 남산 한옥마을의 건축물들이 더 많이 우리 전통가옥의 모습을 보여주고 우리 조상들이 건축물 즉 생활공간에서 강조하고 싶었던  생각을 읽을 수 있다는 생각을 해 봅니다.  


여러분들은 어떻게 보셨는지요.


 


작가의 이전글 걷기 in 서울 5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