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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육아도 하는 변호사 Sep 25. 2024

11. 금옥 씨의 새집 8.

달러 할머니와 분선 씨와의 만남


"분선댁을 어아냐고?"


달러할머니신이 분선씨를 안다는 말 듣 놀란 표정을 짓고 있는 금옥 씨를 바라보았다. 리고는  그리 놀랐느냐는 듯 찡긋한 표정을 지어 보이며, 금옥 씨에게 투명하고 노란빛을 띠고 있는 녹차를 권했다. 금옥 씨는 둥그스런 얼굴  새겨진 놀란 표정을 거두고 양손으로 작고 새하얀 잔 안을 잡았다. 찻 잔 안에 찰랑 거리며 담긴 녹차를 한 모금 꿀꺽 마셔보았다. 녹차가 감추고 있던 고소 향 덕분에 금옥 씨 에 푸르른 따스함이 전해지기 시작했다. 차 한잔이 주는 다독에 요동던 마음이 슬그머니 평평해지고 있었다.


"그러니까, 보자... 몇 년 전이지. 분선댁이 서울로 올라와 오금동에 한 달 정도 머물 때였나. 그때 서울에서 보기 힘들게 비녀로 쪽진 머리에, 작은 체구에 방금 절에서 내려온 스님들이 입는 듯한 회색 빛을 띠고 있고, 분선씨 몸집에는 다소 커 보이는 승복을 입은 할머니가 동네 돌아다니는 모습이 눈에 띄었지. 머리 모양새며 차림새가 영 범상하지 않아 누굴까 궁금해 붙잡고 물었더니 날 보 웃더라고. 그러더니 막내딸 보러 서울에 잠시 왔다더구나. 그날 분선씨를 처음 만났지. 그날이 서울에 막 올라온 날인지는 모르겠지만 말이야."

달러 할머니가 금옥 씨에게 말했다.


"아... 맞아요. 시험지 일을 시작하기 전이니까. 그래요. 어르신. 3년 전이요. 서울에 혼자 와본 적 없 분 선 씨가 회색 보따리를 머리에 이고 양손에도 짐을 한가득 들고 속버스 타고 서울에 오셨어요. 서울 사는 딸네 집에 뭘 가져다준다고 고창에서 기른 참깨며, 김치며, 야채며 알밤이랑 이고 지고 오셨지요.  행길에 그 무거운 짐을 굳이 지고 오신 건 서울살이 하는 딸이 자꾸 안쓰럽기도 하고 마음이 쓰여서 그러셨겠지요?


사실 남편이랑 애들과 함께 상경하고 나서 엄마 분선씨를 못 보니 분선씨가 계속 생각났어요. 서울이 너무 낯설어서 더 그랬나 봐요. 낯선 서울 사람들도, 여기저기 삭막한 서울 풍경도, 서울을 가득 채우고 있는 특유의 차가운 공기까지 제 마음에 드는 건 하나 없었어요. 서울이 차디차게 느껴지고 그럴수록 분선씨가 있는 내 고향 고창이 더 그리워졌어요. 고창을 감싸 안고 있는 푸르른 내장산이며, 낮은 담벼락, 논과 밭에서 풍겨오는 뭉근한 흙내음, 천천히 거니는 그곳 사람들의 특유한 속도까지요. 그 안에 언제나 웃으며 어떤 조건도 없이 그저 우리 가족을 반기고 돌봐 주었던 엄마 분선씨가 있었어요. 서울에는 없는 그 모든 것들이 저 먼 고창에는 존재하는 것만 같았어요. 그래서 더 그것들이 그리웠나 봐요. 분선씨에게 전화할 때마다 '서울살이 팍팍하다, 서울에는 깍쟁이들 투성이다'라 서울살이에 대해 하소연만 늘어 놓았어요. 분명 즐거운 일들도. 있었을 텐데 말이에요. 그때마다 분선씨는 수화기 너머로 쏟아지는 처량해지고 너덜너덜 해진 이야기들을 그저 가만히 들어주었어요. 제 이야기가 끝나갈 때쯤이면 언제나 이렇게 말씀하셨지요.


 '금옥아 서울도 사람 사는 곳이. 네가 아직 정을 못 붙여서 그렇지 시간이 가면 네가 그렇게 징글징글하게 생각하는 서울이라는 곳도 다워질 것이다. 아직은 그곳이 네 마음속에서는 여전히 설어 그렇지, 조금만 지나면 괜찮아진다. 괜찮아져..'라고  하시며 서러움에 가득 찬 제 마음을 다독여 주었어요. 


 이야기에 매번 그렇게 답하던 분 선 씨였지만 낯선 서울에서 막내딸이 애들 셋을 혼자 어떻게  키우며 사는, 그 와중에 밥은 잘 챙겨 먹는 있는 궁금하고, 또 내심 걱정이 되셨었나 봐요. 서울에 온다는 말씀도 없이 갑자기 저희 가족이 서울에 올 때 적어드린 빛바랜 종이 한 장 들고 무작정 서울로 올라오셨더라고요. 분선씨가 서울 집에 갑자기 나타나서 많이 놀랐어요. 반갑기도 반가웠어요. 분선씨가 우리 집에 온 그날은 제가 서있 서울이 음으로 따뜻하게 느껴졌던 그런 날이었어요. 분선씨가 이고 지고 온 보따리에서는 제가 좋아하는 고창서 나는 풀냄새며, 흙냄새가 묻어 있었지요. 놀라며 분선씨에게 어떻게 연락도 안 하고 이 먼 길을 오셨냐는 이야기에 분선씨는 '별로 멀지도 않구먼.'이라고 말하며 사람 좋은 웃음만 허허 지으셨죠."


"그래,, 금옥이 말대로 분선씨가 사람 좋고 능청스러운 구석도 있는, 귀여운 할머니였지"

달러 할머니는 금옥 씨의 이야기를 들으며 분선씨가 생각났는지 슬그머니 미소를 지었다.


"서울로 올라오기 전 저희 가족은 창에 있는 분 선씨집 옆에 신혼살림 꾸리면서 살고 있었어요. 분선씨는 언제나 친구들을 한 아름 몰고 다니셔서 아침 일찍 친구분들이랑 우르르 우리 집으로 오셔서 손자 손녀들 봐주고 점심도 드시고, 저녁도 드시고 해 지면 오늘도 잘 놀았다고 말하며 집으로 돌아가시곤 했어요. 분선씨 옆에 살 때는 분선씨가 몰고 온 친구들 점심, 저녁상 차린다고 매번 바빠 사실 애들 얼굴은 한밤중에 손님들 모두 가고 아이들이 새근새근 잠들었을 때나 볼 수 있었죠. 그래서 그런가, 그때 분선씨가 있어서 애들 셋 키우는 건 아무것도 아니었어요. 그때는 제가 애들 셋을 키운 게 아니라 분선씨와 분선씨 친구분들이 애들 셋을 키웠던 거나 다름없으니까요."

금옥 씨는 그때를 생각하 그립다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맞아. 맞아. 주변에 사람들이 많아야 애들 키우기 편하지. 분선씨가 현명했네, 현명해. 옛날이랑 다르게 요즘은 마을이 없어지고 도시로 몰려들다 보니 모두 핵가족이다 뭐다 해서 결국 엄마랑 아이 둘이서만 전전긍긍하며 키우고 큰다고 얼마나 힘들어. 마을 사람 10명 몫을 엄마 하나가 다 맡고 있으니 엄마도 죽어나고 아이도 죽어나지. 지금은 폭풍우에 고립된 상태에서 엄마 혼자 애 키는 것 같은 세상이야... 쯧쯧" 달러 할머니는 온 마을이 아이를 키웠던 시절을 생각하다 지금을 떠올리, 안쓰러운지 혀를 찼다. 그리고는 아는 사람도 없는 서울에 어떻게 온 가족이 오게 된 것인지 금옥 씨에게 물었다.

 

"분선씨와 고창에서 평화로운 시간을 보내다가 셋째가 태어나고 셋째가 2살 될 때쯤 갑자기 남편이 서울에 있는 경찰서로 발령이 나게 되었어요.

그때는 아는 사람도 없는 서울, 눈감으면 코 베어 간다고 듣기만 했던 서울에 삼 남매를 우르르 데리고 가서 키울 자신도 없었어요. 물론 울에서 살 집 구할 돈도 당연히 었어요. 그때는 서울이 참 무섭더라고요. 그래서 남편 철이만 서울로 일하러 가고 저는 애들이랑 고창에 있으려고 했어요. 분선씨도 당연히 그렇게 하라고 하실 줄 알았는데, 남편 철이만 서울로 보내고 애들이랑 저는 고창에 있겠다는 이야기를 듣더니 크게 역정을 내셨어요. 서울에 가서 굶어 죽더라도 다 같이 서울로 올라가라는 것이 분선씨 생각이었어요.


가족이라는 것은 그렇게 떨어져 살면 안 되는 거라고 하시며, 너희가 뭐가 모라라서 그러는 거냐고 하시더군요. 그리고는 제 손에 분선씨가 한 푼 두 푼 모아 가지고 계시던 쌈짓돈을 쥐어 주시더라고요. 그렇게 떨어져 살 거라면 앞으로 제 얼굴 안 본다고 하시며 다 함께 서울로 올라가서 살라고 말하며 모질게 고창에서 셨어요. 결국 엄마 성화에 다섯 식구 모 서울로 오게 되었고요. 그때는 분선씨가 왜 저렇게 고집을 부리는 것인가 싶어 이해가 안 갔어요. 하지만 그때 분선씨가 모진 모습을 보이며 서울로 다 같이 가라 하지 않았으면 지금도 남편과 떨어져 아이들이랑 고창에서 살고 있었겠지요." 금옥 씨가 그때를 회상하며 말했다.


"분선씨가 그때 큰 결단을 했구먼. 분선씨도 그런 이야기를 했었지. 자기도 그때 딸이랑 살고 싶었다고. 왜 그렇지 않았겠어. 하지만 금옥이가 애들 데리고 서울로 올라가 정착하는 게 처음에는 고되고 힘들겠지만 언젠가는 겪어야 할 일이기에 시간이 지나고 보면 금옥이 아이들 모두 서울로 보내는 게 결국 우리 딸을 위한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고 하더구나." 달러 할머니가 분선댁의 이야기를 떠올리며 말했다.


" 맞아요. 어르신. 저 역시 지금 그때를 되돌아보니 분선씨 말이 맞았다고 생각해요. 살아보니 그렇더라고요. 사람이 한 발 내디뎌 보면 또 별것이 아닌 일이 있잖아요. 그런데 사람이라는 동물은 두려움이 많아서 새로운 것에 도전하기 위한 용기 낸다는 것이 참 어려운 일이더라고요. 용기라고 불리는 그 한 발이 말이에요. 그 한 발은 본능에 반하는 일이라 그런가 하는 생각도 들어요.  그래도 다행이었어요. 그때 분선씨가 우리 가족을 고창에서 모질게 쫓아준 덕분에 이렇게 큰 서울에 와서 작게나마 서울 땅에 발을 붙이고 살고 있으니까요.


그때 분선씨 딸네를 서울로 보냈지만 고창에서 저희랑 애들이 많이 보고 싶으셨을 거예요. 아이를 낳고 키우고 저를 키운 분 선 씨를 바라보니 그 당시에는 안 보였던 부모가 자식을 생각했던 그 마음이 보요. 이제는 막내딸이 조금 철이 들어서 그때 엄마 마음이 보인다고 말할 수 있지만, 그 말을 들을 분 선 씨는 더 이상 이 세상에 안 계시네요... 그래도 어디에선가 분선씨는 제 이야기를 듣고 계실 거예요...."

금옥 씨는 이 세상에 더 이상 존재하지 않고 만질 수 없는 분 선 씨를 생각하니 그리눈물이 하염없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달러 할머니는 눈물을 흘리는 금옥 씨에게 하얀 면 손수건을 건네주면 말했다.

"금옥아, 사람은 언젠가 떠나게 되어 있단다. 그래도 나 역시 분선씨가 많이 보고 싶구나. 내가 아는 분 선 씨는 참 정이 많고 사람을 아끼는 사람이었단다."


"맞아요. 어르신. 분선씨가 서울에 왔을 때 덕분에 웃을 일이 많았어요. 차갑기만 했던 서울 사람들이 그렇게 따뜻한 사람이라는 사실도 분선씨 덕분에 알았으니까요." 금옥 씨가 그때의 시간을 기억하며 말했다.


금옥 씨는 낯설고 날 선 서울에서 다정했던 분 선 씨와의 시간들을 잊고 있던 기억에서 끄집어냈다. 먼지가 한참 쌓여 있는 기억. 두껍게 쌓여 있는 먼지를 털어내니 그때 서울에서 분선씨와 웃음 지었던 일상이 떠올랐다. 금옥 씨가 잠시 머리 깊숙한 기억들 속에서 잠시나마 따스함을 느끼고 있는 사이 달러 할머니가 또랑 또랑한 목소리로 말을 이어 나갔다.




"금옥아, 니도 참 좋았겠다. 좋아하는 엄마가 서울에 왔으니. 그런데 그때 나 역시 그랬지. 우연히 분선씨를 알게 되었단다. 분선씨와 저 앞 오금 공원에서 우연히 마주쳤어. 지금도 봄이 오면 공원 둘레에 철쭉이 끝없이 피어나지. 그때의 기억으로는 그 해 봄 철쭉은 더 유난이었어. 봄 내내 철쭉에서 발하는 화사한 자주 빛으로 쨍쨍하게 공원을 비추었으니 말이야.

공원에는 오전 11시쯤만 되면 인생 막바지에 이제는 무엇을 해야 할까 막연한 마음과 풀리지 않는 고민과 권태와 공허를 마음에 품고 있는, 하지만 겉으로는 싱싱해 보이는 늙은 사람들이 옹기종기 모여있었지. 다들 거기 모여서 특별한 일을 하지는 않지만 그저 비슷한 처지의 사람들 얼굴에 쓰여 있는 시름을 보며 그것만으로 위안을 얻는 거야. 나와 비슷한 사람이 존재한다는 사실만으로 인간은 생각보다 큰 위로를 얻거든."

달러 할머니는 씁쓸하면서도 당연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런데, 어르신. 어르신은 공원에 나와 있는 사람들과는 다르시잖아요. 돈도 많으시고 거기에 이렇게 멋진 집까지 말이에요. 그런 어르신은 왜 공원에 나가 계셨던 거예요?" 금옥 씨가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물었다.


"다른 사람들이 생각할 때, 아니 네가 생각할 때도 이 노인네는 돈이 끝도 없이 많으니 가진 것이 너무나도 많아 권태와 공허의 공기로 메워진 공원에서 위로 따위는 받지 않을 것 같으냐? 그렇지도 않아. 금옥아, 내가 많은 부를 가지고 있더라도 난 인간일 뿐이야. 그렇기에 우리가 떠받들고 우러러보는 돈이 손에 들어오더라도 돈은 인간이 가진 지독한 지루함과 끈적이는 권태까지 해결해 주지는 않았어. 그래서일까, 그냥 나와 비슷한 시간을 살고 있는 이제 인생의 마지막에 다다랐다고 생각하는 어두운 얼굴을 가진 사람들이 모여있는 광장에 들어서면 내 안에 요동치던 복잡하면서 권태로운 마음이 누그러져. 그들을 바라보면서 나만 그렇지 않구나. 그래도 저들보다 나는 괜찮은 인생이구나 하면서 스스로 위로하는 거지.


조금 비겁한 것 같으냐? 그래도 나 또한 누군가에게 그렇게 위로를 주지 않았을까. 오전이면 이제는 딱히 할 일도 없고 나를 찾는 사람들이라 봐야 돈이 필요해 잠을 이루지 못해 밤새 두 눈이 시뻘게진 사람들뿐이라, 그것도 보기 싫었. 그래서 늙은 사람구경 한다면서 매번 거기 가서 서성거렸지. 거기서 나랑 놀아줄 친구가 있었던 것은 아니고 그냥 살아 있는 사람 구경했지."


살아 있는 사람이라는 단어가 달러 할머니의 입에서 나올 때 달러 할머니는 희미한 웃음을 지었다. 녹차를 입안에 한 모금 머금고 달러 할머니의 이야기를 듣고 있던 금옥 씨는 어르신이 나를 앉혀 두고 놀리는 것은 아닐까 생각했다. 누구나 부러워하는 수많은 재산을 가지며 떵떵 거리며 사는 달러 할머니의 삶이 권태롭고 공허할 뿐이라니. 금옥 씨로서는 그 말이 실감이 전혀 나지 않았다.


"금옥아, 사람이라는 것이 그렇더라. 너도 아파트 계약금 구한다고 이리 뛰고 저리 뛰고 악착 같이 일하고, 언젠가는 해 뜰 날이 와서 돈이 많아지면 그저 행복할 것 같으냐?" 알 수 없다는 표정을 짓는 금옥 씨에게 달러 할머니가 물었다.


"예, 어르신. 어르신도 아시겠지만 사실.. 누구나 부러워하는 아파트 청약에 당첨되고 구름 위를 걷는 것 같았어요. 하지만 이내 현실을 깨닫게 되었지요. 그것은 아무리 손을 뻗어도 닿을 수 없는 상상의 것이라는 것을 말이에요. 그런 생각까지 미치자 지금까지 버둥거리며 일해온 시간들이 바보같이 느껴졌어요. 이상하게 매일같이 잠도 못 자고 열심히 살아왔는데 왜 손에는 아무것도 없을까 하고 말이에요. 그래서 다시 어제를 돌아보고 한 달 전을 돌아보고 일 년 전을 돌아봤어. 하지만 다시 보고 다시 확인해 보더라도 그 시간 들 속에는 하루하루 피터지도록 일하고 있는 제가 있을 뿐이었어요. 지금까지 열심히 살아가는 것이 정답이라고 생각했는데 아파트 계약금도 구할 수 없는 스스로를 발견하니 정답을 모르는 삶을 사는 기분이 들더군요.  어르신처럼 돈이 많았다면 이런 걱정 따위는 하지 않았겠지요? 하지만 그런 생각 역시 제 것이 아닌 것을 욕심내는 생각일 뿐이기에 어떠한 의미도 없고 그저 나를 계속 가라앉히는 망상일 뿐임을 깨달았어요."  금옥 씨가 결연한 표정을 지으며 대답했다.


"하하, 그래. 금옥이가 이번 일로 많은 것을 배우고 있구나. 그래서 생각은 어떻게 바뀌었지? 아니면 여전히 그냥 망연자실하고 있는 것인가?" 달러 할머니가 재미있다는 표정으로 금옥 씨를 바라보았다.


"어르신, 꿈이라고 하는 건 허황된 것일 수도 있지만 그것을 이루기 위해 노력하는 한 발을 내딛는 순간 그것은 밤하늘에 반짝이는 수호별이 된다고 생각해요. 그런데 우리는 그 한 발을 내딛지 못해요. 그 한 발을 내닫는다고 해도 현실이 바뀌지 않을 것이라 생각하고, 현실의 벽이 너무나 높고 두껍다고 생각하니까요. 하지만 내 앞에 있는 문이 정말로 높고 두꺼운 벽인지, 내가 평생 뛰어넘을 수 없는 벽인지는 실제로 내 발을 움직여 내디뎌 볼 때만 알 수 있는 게 아닐까요. 막상 한발 내디뎌 보니 내 앞에 있는 문이 자동문일 수도 있고, 형식적인 종이문일 뿐이었을 수도 있으니까요.


 그래서 저는 겁먹고 포기하지 않기로 했어요. 주저앉아 있는 지금 저에게 필요한 건 돈이 아니라 용기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으니까요. 그래서 막상 열릴 것 같지 않은 문을 향해 한발 한발 내딛고 있어요. 결과가 어떻게 되든 그건 끝나봐야 아는 게 아니겠어요? 그건 그때 가서 생각할 거예요. 기회가 주어 졌다면 그 시간 안에서 제가 할 수 있는 것을 할 거예요. 그것이 이 삶을 살고 있는 저의 역할이니까요."

금옥 씨가 눈을 반짝이며 말했다.


"그래,  금옥아. 너를 보니 내 젊은 시절을 보는 것 같다. 하지만 말이다. 금옥아, 그래도 잊지 않기를 바란다." 달러 할머니가 금옥 씨를 바라보며 말했다.


"어르신, 어떤 것을 잊지 말아야 하나요?" 금옥 씨가 물었다.


"삶을 대하는, 삶을 바라보는 너의 태도는 정말 훌륭하다. 하지만 그 속에서도 이를 악물고 일해 세상에 있는 돈을 모조리 네 곁으로 두고 나면 너에게 어떤 일이 일어날지에 대해 항상 생각하고 경계해야 한다. 너에게 일정 수준을 넘어서는 돈이 생기면 어떤 일이 일어날 것 같으냐. 아주 며칠 동안은 행복하겠지. 달콤한 꿈에 젖어 네가 살고 있는 이 세상이 너를 향해 웃고 있는 것처럼 느껴질 거야. 하지만 네 생각과 달리 그 환희는 오래가지 않을 거야. 돈이 주는 환희란 손님이 지나가면 너에게 다른 손님이 찾아올 것이야. 그런데 그 손님은 누구나 만날 수 있는 손님은 아니기에 특별하지" 달러 할머니가 씩 웃으며 말했다. 인자한 얼굴 위로 섬뜩한 기운이 지나갔다.


"어르신, 손님이요? 누구나 만날 수 없는 손님이라고요?" 달러 할머니의 싸늘한 미소를 본 금옥 씨는 흠칫 놀라며 되물었다.


"그래, 그건 보이지 않는 손님이야. 하지만 너의 마음속 깊숙이 들어가 자리 잡게 되지. 너도 모르는 사이에 말이야. 권태, 공허, 불안. 그것이 손님의 이름이야. 그것들을 다스리는 것은 지금처럼 돈 한 푼을 악착같이 모으는 네가 지금 느끼는 처절함과는 또 다른 감정이지. 가난이 주는 고통은 그저 버티면 되지만 권태, 공허, 불안이라는 감정은 아주 다루기가 까다로운 친구들이야. 그저 죽지 않고 버티는 것 만으로는 감당이 안되거든. 그 감정을 느끼는 수준에 이른 사람들은 이제 버티지 못하겠으니 죽음을 선택하겠다고 할 수도 없으니." 달러 할머니는 지독한 녀석들을 생각하듯 몸을 부르르 떨었다.


"어르신, 그러면 그런 마음들이 저를 사로잡았을 때는 어떻게 해야 하나요?" 금옥 씨는 알고 싶었다. 지금의 자신은 그런 감의 소용돌이를 느낄 수 있는 부자와는 전혀 거리가 멀었지만 어쩌면 나에게도 나중에는 권태, 공허, 불안이라는 손님이 찾아와 문을 두드릴 것 같은 예감이 들었기 때문이다.


"나도 젊었을 적에는 하루 두 끼 아니 한 끼도 못 먹는 날들의 연속일 때가 있었어. 그때는 곯는 배에 정말 죽는 게 낫겠다는 마음이 들었지. 아니 정말 죽을 수도 있는 상황이었지. 내일이라도 굶어 죽어도 이상할 것이 없는 시간이었으니까. 그렇게 굶어서 생을 마감하면 자유로워질 수 있을 것만 같았어. 하지만 인간이 가진 생명은 그렇게 쉽게 끊어지지 않았지. 그렇게 하루하루를 버텼고, 운이 좋았는지 하늘이 내가 불쌍했던지 이유는 알 수 없어. 어느 날부터 수많은 돈들이 나를 찾아오기 시작했어. 그리고는 나와 오래오래 함께하고 싶다고 말했지. 그렇게 많은 돈들이 내 곳간에 차곡차곡 쌓여갔지. 마치 디즈니 영화에 나오는 스쿠르지가 황금이 가득 쌓인 창고에서 데굴데굴 구르는데 그 모습이 내 모습 같았어.


그런데 어느 순간 세명의 손님이 우리 집 문을 두드렸어. 그들은 자신들을 권태, 공허, 불안이라고 소개하며 하룻밤 묵어가길 원했지. 그때는 몰랐어. 그들을 손님으로 받아서는 안된다는 것을 말이야. 그들이 주는 고통을 표현하자면 끝날 것 같지 않은 끈적끈적한 고통이야. 그 고통들은 밤 낮이 없어. 심지어 날이 어두워지면 새벽 동이 틀 때까지 나를 괴롭혀. 어둠 속에서 이들과 씨름하면서 싸우지만 난 이미 알고 있지. 그 고통들은 떼어 내려해도 떼어 낼 수 없는 올가미라는 것을 말이야. 발버둥 칠수록 더 마음을 옥죄어 오고 숨을 쉴 수 없거든."

달러 할머니의 얼굴에 그림자가 드리어졌다. 달러 할머니에게 그런 고통이 있으리라는 사실을 알지 못했던 금옥 씨는 달러 할머니의 고해성사에 할 말을 잃었다.


"어르신........"


"너도 지금처럼 악에 받쳐 일하고 돈이 너를 선택한다면 나처럼 많은 돈을 손에 쥐게 되겠지. 그때 내가 말하는 이 고통스러운 감정의 굴레에서 빠져나오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사실 이 굴레는 뫼비우스의 띠 같아서 말이지. 아주 지독해서 빠져나올 수 없지만 방법이 하나 있지" 노인이 빙긋 웃으며 물었다.


"네, 어르신. 그래도 저도 혹시 어르신처럼 많은 돈을 얻게 될 가능성이 있으니 그 방법을 듣고 싶어요." 금옥 씨가 간절히 말했다.


"허허, 금옥아. 그때 분선씨가 금옥이 자랑을 많이 하기는 했지만 생각했던 것보다 더 기특하구나." 노인이 웃으며 말했다.


"권태와 공허란 어떤 것일까? 그건 우리가 아는 풍요라는 느낌과는 많이 다르지. 풍요라는 감정은 물질적 풍족함과 정신적 풍족함이 함께하는 감정이지만, 공허와 권태는 모든 것이 완벽하게 갖추어진 풍요라는 감정에서 정신적 풍족함이 빠져있어. 보통 사람에게는 세상이라는 것이 전쟁터 같아서 하루하루 헤쳐나가는 것이 커다란 일이지.


하지만 그 시간이 힘겹다고 해도 그것이 또 살아가는 재미거든. 그게 삶이니까. 혼자가 아니라 아끼는 가족과 사랑하는 사람들과 함께 하는 그 시간들이 주는 기쁨은 그 무엇과도 대신할 수 없지.


 사랑하는 사람들과 부대끼며 살아가는 사람이라면 설령 가진 돈이 부족하다고 해도 정신적으로는 누구보다 풍요로운 사람일 거야. 살아가는 재미가 있지. 하지만 나같이 이미 모든 것을 다 이루어 놓아서 더 이상 성취할 것도 이룰 것도 없고 함께 할 사람조차 없는 사람은 어떨 것 같으냐? 여기서 더 많은 돈을 가진다고 해도 더 이상은 풍요의 단계로 들어설 수 없어. 정신적 풍요가 없는 상태라 그저 공허하고 권태로운 시간만 흐를 뿐이지.


그러니 금옥아, 지금처럼 악바리처럼 돈을 모으는 것도 좋아. 지만 네 곁에서 너를 사랑하고 응원해 주는 사람들을 잊지 않아야 할 거야. 앞으로 새로운 일을 시작하게 된다면 사람들에게 덕을 쌓을 수 있는 구에게나 옳은 일을 하도록 해. 그렇게만 한다면 내가 말한 공허와 권태, 불안이라는 무시무시한 손님과는 거리를 둘 수 있을 거야. 아니 아예 네 곁에 못 오겠지." 달러 할머니는 누구나 아는 이야기를 거창하게 했다고 말하며 멋쩍게 웃어 보였다.


"네 어머니 분선씨처럼 말이야. 아참, 아참 분선씨는 돈에는 눈이 어두웠지. 돈에는 관심도 없었던 사람. 앞으로 네가 지금 내 앞에 있는 금옥이에 분선씨를 합한 사람이 되면 좋겠데 앞으로의 네 모습이 궁금하구나.


 아참, 내가 또 쓸데없는 이야기를 했네. 내 정신 좀...  봐라. 그래. 내가 분선씨를 서울에서 어떻게 알게 되었는지 이야기하고 있었지."


*메인 이미지:pinteres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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