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르투살이
전날부터 감기 기운이 있나 싶게 목이 까슬했다. 자는 동안 성대 촉촉하라고 얼굴에 스카프를 덮고 잤던 밤을 지나 알람에 눈을 뜨고, 몸을 뒤채다 결국 비척비척 일어났고, 노트북을 챙겨 최애 카페로 갔다. 자리에 앉자마자 바로 프리랜서 일을 하기 위한 테스트를 치렀고, 어려운 영어 과제에 난감해하면서 어찌저찌 합불을 예측할 수 없는 결과물을 제출했다. 그리고 후다닥 알바를 하러 갔다.
다른 친구가 있을 줄 알았는데 아나가 있었다. 평소보다 더 반갑게 인사할 수 있었다. 봉 지아, 브라질 친구들한테 전하는 자그마한 마음이다. 난 포르투갈식 포어를 하기 때문에 보통은 봉 디아 라고 한다. (두 나라는 같은 언어를 쓰지만 두음 법칙이 다르게 작용한다.)
옷을 갈아입는 동안 어쩐 일인지 빈지노의 달리 반 피카소가 흘러나왔다. 내가 이전에 재생했던 게 알고리즘에 의해 나온 건가? 어리둥절해하고 있는데 아나가 다가오면서 슬쩍 웃었다. 아, 너가 틀었어?
내가 그 노래, 그 아티스트를 좋아한다고 말한 걸 기억한 것이다. 갑자기 세상에 대한 감각이 조금 선명해졌다. 좋은 기분과 더불어.
또, 어쩐 일인지 국카스텐 이야기도 나왔다. 아 기억났다. 피크 케이스 형태의 목걸이를 하고 갔는데 아나가 발견해 그게 뭐냐고 물은데서 설명이 주저리주저리 시작된 것이다. 이건 피크 케이스야, 좋아하는 밴드가 이벤트로 준 사인 피크를 받았었어, 그건 락페스티벌이었어.... 그 사인 피크를 꽂으려고 산 건데 사실 피크는 여기 안 들고 왔어.. 아나의 계속되는 질문은 마치 그때의 순간을 하나씩 다시 좇아가보라는 이정표 같았다. 난 그 이정표들을 따라 살아있음을 느꼈던 순간으로 더듬더듬 돌아갔다. 다정한 질문 세례에 잠깐 혼미했다가 이상하게 눈에 뭐가 차오르는 것 같기도 했다. 이내 사라지긴 했지만.
그리고 그녀는 국카스텐의 노래를 틀어달라고 했고, Vitriol을 재생했다. 리듬을 타고 온기를 전달하는 그녀의 마음은 근래 들어 맛볼 수 있는 몇 안 되는 달콤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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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고서 거의 퇴근이 가까워졌을 때, 맨투맨을 전달해 주러 온 진영도 잠깐 만났다. 사실 윗 단락의 내용과 진영을 만난 것 사이엔 몇 시간이 존재하지만 시시껄렁한.. 또는 그냥 일하는 존재로서 분주했던 누군가의 일상일 뿐. 손님을 마주하고, 배가 고파서 배고프다 외치고, 사장님과 소통하고, 인보이스 발행 이슈를 해결하고, 재고를 체크하고...? 그러고서. 그러고서 진영을 만났다. 이미 어둑어둑해졌을 때였고, 잠시동안만 건네받고 바로 헤어졌지만 이전부터 계속 서로 옷을 주고받고 있는 상황이 좀 재밌고 이웃사촌 같다는 생각을.. 그 순간에 한 건 아니고, 지금 글을 쓰면서 하고 있다.
퇴근 시간이 됐고, 맨투맨을 부둥켜안고 왠지 모를 약간의 우울감을 안고서 추운 포르투 길거리를 나섰다. 퇴근 이후에는 항상 마땅히 갈 카페가 없어서 고민을 해야 한다. 갑자기 구글맵에서 새로 보는 카페가 눈에 걸렸다. 영업시간 8시까지, 여기 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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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목이 아파도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마시고 하릴없이 시간을 보내다 그냥 집에 돌아왔다. 오는 길에 라멘이 먹고 싶었지만 속이 더부룩할 것도 걱정되고, 돈도 아껴야 해서 그냥 집으로 왔다. 오는 길엔 핀란드 산다는 이름 모를 낯선 이와 실없는 대화를 했고, 언니랑 통화를 했고, 들어오면서 부엌에서 마주친 엘리노오라랑 이레나가 내 옷이 귀엽다고 해주고, 할머니는 독일에 있는 마리아랑 안부를 전하게 한 뒤 새 전등을 주었다. 언니랑 계속 통화를 하면서 전등을 갈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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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 목이 까슬하다. 마음에도 겨울이 온 듯 때로는 내가 차갑고 때로는 타인이 힘들다.
그래도 겨울이기에 따뜻한 온기에 행복할 수 있는 거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