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ay 9 나헤라-산토도밍고 20km
어제부터 발목이 붓고 아팠는데 오늘도 나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고, 더 붓는 것 같아 불안했다. 발목이 점점 더 심해질까 봐.. 그래도 한번 걸어보자 하고 스틱 하나를 의지한 채 절뚝거리며 걸었다. 하늘은 흐릿하니 곧 비가 올 것 같았다. 여기를 걷는 동안 이런 날씨가 자주 반복되었다. 아침에는 흐릿하고 점심 무렵에는 엄청 쨍하고 맑은.. 우비를 챙겨 왔지만 아직까지 우비를 입어 본 적은 없다.
아침을 먹고 걷는데, 중국계 유럽인인 것 같은 여자 친구와 덴마크 청년이 함께 걷는데 나에게 말을 걸었다. 아마도 잘 못 걷는 게 안쓰러워 그랬던 건지 아님 혼자 걷는 게 외로워 보였던 것인지 이런저런 말들을 걸어왔다. 짧은 영어실력으로 소통을 하려니.. 정말 답답했다. 그래도 굉장히 착한 애들이었던 듯 보통 말 걸다가 얘기를 잘 못한다 싶으면 가볍게 인사만 하고 지나갈 텐데, 쉽사리 가지 않고 천천히 내 얘기를 들어주고, 이런저런 것을 물어보며 친근하게 대해줘서 고마웠다. 중국 여자아이는 슈쉬, 덴마크 친구는 몰튼이라고 했다. 외국 하이틴 영화 같은데 나오는 착하고 잘 도와주는 친구들 같은 느낌이었다. 나보다 열 살이나 어린 동생들이었다. 그 친구들과 대화하면서 즐겁기도 했고, 모자란 영어실력에 긴장되는 마음으로 함께 걸었다. 빠른 걸음으로 누군가와 대화하며 걷다 보니 그래도 좀 걸을만했다.
그들은 나보다 좀 일정이 빠듯해서 빨리 걸어야 한다고 했다.. 그렇게 친절한 두 친구들과 이야기하다 자연스레 거리가 멀어졌고, 천천히 걷기 시작했다.
걷다 보니 날이 맑아지기 시작했다. 갑작스레 맑은 하늘이 보이더니 아름다운 유채밭을 지나 걷던 길 동화 속에 나오는 봄 길의 마을을 지나치게 되었다. 다들 지나가면서 괜찮냐고 묻는 것이 고마웠다. 절뚝거리면서도 발목 부상으로 축 쳐진 마음이 점점 밝아졌다.
그러다 산토 도밍고로 가는 길에 만난 평야.. 물론 계속 평야를 지나긴 했지만, 이곳은 뭔가... 더 특별히 좋았다.
서울에서 사진으로 보며 정말 걷고 싶다고 생각했던 길. 내가 상상하고 좋아하던 산티아고 길의 모습이었기 때문에.. 감탄을 지으며 사진을 연신 찍기도 하고.. 동영상도 촬영했지만,, 이 자리에 서있는 느낌을 어떻게 담을 수 있을까.. 다시 생각해봐도 꿈속 같다. 이상하게 내가 지나갈 때는 사람이 별로 없었다. 그래서 더 꿈속 같았다.
해가 비치기 시작할 때 바람이 선선히 불고, 황금빛 밀밭이 계속 펼쳐져 있는 이 구간 혼자서 너무 행복했다.
그렇게 사진을 연신 찍고 있는데, 부산 친구 중의 한 명인 Y가 걸어오고 있었다. 부산 친구들은 셋이서 같이 다니는데, 걸을 땐 각자 걷다가 숙소에서 만나는 모양이었다. Y는 적토마처럼 앞만 보고 질주하는 청년이라 나랑 늘 비슷한 타이밍에 숙소에 도착하곤 했다. 나는 워낙 일찍 출발하니까 일찍 도착했던 거고.. 오늘은 내 걸음이 부진하여 따라 잡힌 모양이었다.
여기서 서로 사진을 찍어주기로 하였다. 산티아고 가는 길 검색해보면 나오는 그럴싸한 뒷모습 샷 같은 거.. 그런 건 좀 남겨줘야지 않나 싶으니까.. 그동안 찍어 줄 사람이 없었는데, 잘 됐다 싶어 각자 기념샷을 찍어 주고 있는데 지나가던 외국인이 우리가 친구인 줄 알고 찍어주겠다며 둘이 서보라고 한다. 같이 사진 찍기엔 어색한 사이인데.. 굳이 거절하기도 뭐해서 함께 기념샷을 찍었다. 찍힌 사진을 보니 넘 억지로 찍는듯한 Y의 표정이 재밌어서 추억으로 간직하고 있다.
조금 천천히 머무르며 만끽하였다. 오늘은 일찍 도착한다는 것은 아예 포기했다.
지나치기 싫은 이곳을 지나가고, 다시 걷다 보니 뜨거운 태양이 내리쬐기 시작했고, 몹시 무더워졌다. 그래도 매우 충만해진 느낌이어서 컨디션이 좋아졌다. 이곳에 와서 덥고 다리 아프고, 문득 외로울 때도 있지만 그때그때마다 주어지는 행복이 있다는 것이 신기했다. 그래서 힘들어도 참 걸을만한 길.. 하지만 여기도 결국엔 지나쳐야 되는 곳이다..
숙소에 도착하니 눈에 익은 익숙한 인물들이 있었다. 일본 친구 미와도 있었고, 아주머니들도 오셨고,, 내가 도착한 후 부산 친구들도 막 들어오는 참이었다.
오늘 숙소는 수용인원이 꽤나 많은 큰 숙소였다. 그래서인지 수련회에 온 기분이었다. 도착해서 침대를 배정받는데, 방 한가운데 놓인 2층 침대가 너무 높아서 무서웠다. 게다가 왼쪽에는 난간이 있는데 오른편에는 벽에 붙이는 용인지 난간도 없다. 방 가운데 있는 2층 침대에 난간이 없다니.. 구르기 잘하는 사람은 떨어질 수도 있겠다 실제로 떨어져서 병원에 갔다는 사람도 있다고 들었다.. 아무래도 무서워서 짧은 영어로 바꿔달라고 다시 요청했지만, 안된다고.. 알아서 다른 사람과 바꾸라는데.. 그럴만한 변죽이 없어 왼쪽 난간에 몸을 묶고 자야겠구나 싶었다. 그래도 나는 긴장하면 구르거나 하는 타입은 아니어서 다행이었지.
이곳은 주방이 크고 식당도 컸는데, 그래서 요리를 해 먹는 사람들이 많았다. 오븐 같은 것도 있었던 듯.. 여기 한국인 부부도 한 커플이 있었는데, 감자수제비를 해 먹었다나.. 식재료를 사 오면 얼마든지 뭔가 먹거리를 할 수 있을 것 같았지만, 요리를 할 여력이 없었다. 사랑의 힘이 아니면 할 수 없다. 여기 한국사람들도 꽤 있어서 같이 요리해먹으면 좋았겠다 싶은데, 너무 힘들고 피곤해서 슈퍼에서 대충 사 가지고, 레인지에 데워서 먹었다.
어제 아주머니 두분도 계셨는데, 두 분께 요리를 해드리고 싶은 마음이 들었었다. 자녀가 없으시다고 하니 왠지 뭔가 식사라도 만들어드리고 싶은 마음이 들었던 거 같다. 집에서 엄마한테도 요리를 잘 안 하면서.. 남한테 괜한 선심인 듯싶기도 하지만.. 이분들이랑 종종 마주칠듯하니 그런 기회가 있겠거니.. 하고 오늘은 너무 피곤하니 대충 때웠다.
10시가 넘어서 침대에서 떨어지지 않길 간절히 바라며 잠이 들었다.. 내일은 발목이 좀 나아지길 바라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