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로페셔널한 약사님을 만나고 옴
환절기가 되니 어김없이 알레르기 증상이 심해졌다. 특히 밤마다 눈이 많이 가려웠는데, 원래 늘 가렵긴 했지만 정도가 심해지니 병원에 갈 때가 되었다.
안과 의사 선생님은 내 눈을 보더니 이렇게 말했다.
“아이고~ 많이 참았다~”
조금 더 참을 수 있었지만, 너무 늦지 않게 병원에 왔다고 생각했는데, 그렇지 않았나 보다.
“사람들이 이해를 못 해요~ 긁지 말라고 하는데, 간지러워서 참기가 힘들지~”
친절하다는 리뷰를 보고 간 것이었는데, 환자의 아픔에 공감해 주는 친절은 오랜만이었다. 진료는 짧았다. 알레르기 때문에 병원을 한두 번 다닌 것도 아니고, 나도 약이나 받아올 심산으로 갔던 거라서 진료가 짧을수록 오히려 좋았다.
약국에 갔더니 나보다 먼저 온 노인 두 분이 앉아 계셨다. 그중 어떤 남성 분은 내가 들어오고 난 후 조금 지자 자기 약이 나오지도 않았는데 데스크로 갔다.
“무좀약 있어요?”
“아휴~ 당연히 있지요~”
약국에서 별 걸 다 묻는다는 느낌이다. 약사님은 무좀약을 가져왔다.
“이거 어디 거예요?”
“00 제약이요. 우리는 00 제약 거 놔요.”
우리 약국에서는 괜찮은 회사의 제품을 취급한다는 자부심이 느껴졌다.
“그전에 약을 발랐는데, 낫지를 않아가지고.”
“아버님. 발톱 무좀이라는 게 뭐예요. 발톱에 곰팡이가 생긴 건데, 그걸 없애려면 어떻게 해야겠어요?”
약사 님은 단호하게. 그렇지만 아버님을 무시하지도 않게 설명을 늘어놓았다. 말에 끊김도 없고 술술, 정확한 단어를 쓰면서 또박또박, 목소리도 꽤 컸다.
약간 닥터 슬럼프의 아리처럼 생긴 그분은, (나보다 나이가 많으신 분께 하는 표현으로 적절하지 않다고 생각하긴 하지만) 참 똘똘해 보였다. 똑똑하거나 스마트하거나 뭔가 그런 표현으로는 조금 부족한, ‘똘똘함'을 의인화한 것 같은 그런 느낌이었다.
할아버지는 약사 분의 이야기를 들으면서도 무좀약을 들었다 놨다 하며, 구입을 망설이셨다. 가격도 비싸고, 그전의 약처럼 효과가 없을까 봐 걱정하시는 것 같았다.
하지만 그 약사는 할아버지를 보채지도, 판매를 위해 효과를 부풀려 말하지도 않았다. 그냥 무좀과 약에 대한 정보를 귀에 꽂히게 이야기해 줄 뿐이었다.
그사이 보조를 해주시는 분(이 분이 약사일 수도 있다. 자세한 관계는 모르기 때문에, 편의를 위해 이 글에서는 이렇게 칭했다)이 다음 손님을 위한 약을 가져다가 놔주었다. 그러자 그 약사 분이 능숙하게 긴 약봉투를 접으며, 할아버지께 이렇게 말했다.
“저번에 약 드셨을 때는 어땠어요? 괜찮아지셨어요? 하루에 세 번 먹어야…”
“엉? 나 이것도 먹어야 돼요?”
무좀약을 사려던 할아버지가 당황하며 물었다. 옆에서 보조하시던 분도 당황해서 이건 다음 손님 거라고 알려 주었다. 옆에서 지켜보던 나는 웃음이 터졌다. 보조하시던 분이 나와 눈을 맞추며 같이 웃었지만 약사님은 별다른 동요도 없이 실제 약의 주인을 불렀다. 그리고 할아버지의 무좀약이 놓인 곳의 옆에 약을 놓았다.
“저번에 약 드셨을 때는 어땠어요? 괜찮아지셨어요? 하루에 세 번 먹어야…”
아까 할아버지께 말했던 것과 거의 똑같은 내용을 실제 약의 손님에게 뱉었다.
‘와, 대응이 매뉴얼화되어 있구나.’
흥미로웠다.
물론 바로 전에 하려던 말이니까 같은 내용이 나와야 정상이지만, 바로 전에 말과 억양, 말투까지 거의 같은 걸 보니 준비가 되어 있는 무언가를 이야기하고 있는 것 같았다.
병원에 많은 건물의 약국이다 보니 진료 과목이나 상태에 따라서 다르게 준비되어 있을 것이고, ‘저번에 약 드셨을 때 어땠는지'를 묻는 걸 보면, 장기 복용하는 사람을 위한 멘트도 따로 준비되어 있는 것 같았다.
할아버지는 고민하시더니 결국 무좀약을 사가셨다.
약사님은 발톱이 새로 나는 걸 확인할 때까지 약을 계속 발라야 한다고 강조했는데, 그렇게 하시려나. 내가 다 걱정이 되었다.
그다음은 내 차례. 약봉투 위에는 안약 두 개가 올려져 있었다. 약사 분은 코딩되어 있는 인쇄물을 내 앞에 놓았다. 인쇄물에는 안구 그림과 알레르기로 고통받는 다양한 일러스트들이 있었다.
코딩된 인쇄물이 클립으로 엮여 있는 걸 보면, 뒷장에는 아마도 백내장 수술을 한 사람을 위한 페이지, 다래끼가 난 사람을 위한 페이지도 있을 것 같았다.
그 약사 분은 그림을 손가락으로 짚으며 설명을 시작했다.
“자, 눈을 비비거나 바람이 세게 불거나 하면 이 부분에 상처가 나겠죠? 안구의 피부와 같은 부분인데”
자신의 팔을 내밀어 피부를 문지르며 나에게 보여주었다.
“여기 팔의 피부가 벗겨지면 어떻게 되겠어요?”
“아파요..”
내가 순순히 대답하니 그 약사 분이 피식 웃으셨다. (드디어 웃었다.) 내 안약이 올려 있는 약봉투에는 ‘만 38세'라고 적혀 있었다.
“그렇죠. 그러면 안구도 아프겠지요?”
나잇대에 맞게 말하는 속도가 정해져 있는 건지, 노인 분들에게 말할 때와는 다르게 아주 빠르게 주의사항을 일러주었다.
대략 다음과 같다.
술, 담배, 커피, 밀가루를 먹지 말 것
바람이 눈에 오도록 하지 말 것
밤에 잠이 안 오더라도 7시간 이상은 눈을 감고 있을 것
안약을 넣을 때 윗눈꺼풀을 까서 상처 내지 말고, 아래쪽만 내려서 넣을 것
조도 차이가 있으므로 스마트폰을 절대 어두운 곳에서 하지 말 것
잠을 잘 때는 꼭 불을 끄고 잘 것
나는 빠르게 들려오는 주의사항을 집중해서 들었다. 알레르기는 완치가 아니라 관리를 계속해야 하는 거라는 말도 잊지 않으셨다.
약값 4,100원.
보조해 주시는 분께 결제를 끝낸 후 고개를 들었는데, 그 약사분은 이미 조제실로 들어갔는지 찾아볼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