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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잼써 Jan 23. 2024

안 먹겠다는데, 엄마는 왜 굳이 김치를 보내는 걸까

이런 웹툰을 본 적이 있다. 딸은 독립해 엄마와 떨어져 산다. 가끔 엄마가 택배로 반찬을 보내주는데, 대부분 먹지 못하고 버려진다. 


딸은 엄마가 괜히 힘들게 요리하지 말았으면 한다. 버리게 되니 그만 보내라고 하면, 엄마는 괜찮으니 남으면 버리라고 한다.


하지만 딸 입장에서는 그렇게 안 된다. 제발 보내지 말라고 빌다시피 하는데 엄마는 말로만 알았다고 할 뿐이다. 결국 또 택배를 받았는데, 이번에는 김치다. 딸은 인내심에 한계를 느꼈다.


딸은 김치를 반송하기로 했다. 엄마의 정성을 버리지 않아도 됐고, 김치를 보내지 말라는 게 그냥 하는 소리가 아니라는 메시지도 전할 수 있는 방법이다. 엄마가 원하는 대로 더 이상 따르지 않겠다는 의지도 보여주었다.

그런데 택배 박스를 든 딸의 눈에 눈물이 맺히기 시작한다. 자신을 이해해 주지 않는 엄마에게 서운한 감정이 들어 한없이 눈물을 흘린다.


엄마에게 서운한 감정이 드는 건 알겠는데, 도대체 왜 우는 걸까? 내 MBTI가 T라서 서운함이 크면 울 수도 있다는 사실을 이해 못 한 게 아니다. 서운함과 함께 섞여 있는 다른 감정을 이야기해 보자는 거다.


단순히 자신의 의견을 받아주지 않아 서운했다고 포장하기에는 딸의 감정은 너무 강했다. 딸은 엄마가 ‘자신을 위해서’ ‘내키지도 않는’ 노동을 했는데, 그걸 저버리는 것에 대한 죄책감도 들었을 거다.


하지만 하지 말라는 데도 굳이 계속하는 건 이유가 있다. 엄마는 반찬을 ‘자신을 위해’ ‘즐겁게’ 만들었다. 엄마에게 반찬 만들기는, 자신이 할 수 있는 일로 자식을 기쁘게 만들 수 있는 몇 안 되는 일이다. 


여기서 오해하면 안 되는데, 그 일이 자식을 실제로 기쁘게 했는지와는 별개다. 엄마 자신이 자식을 기쁘게 할 수 있는 존재라는 걸 확인할 수 있는 일이라는 뜻이다.


나이가 들고, 자식은 자리를 잡아갈수록 엄마가 자식에게 해줄 수 있는 일은 점점 줄어든다. 엄마가 한눈만 팔아도 목숨이 위태로웠던 신생아 시절, 화장실까지 따라다니며 자신의 애정을 갈구하던 유아기, 엄마가 말하는 건 전부 다 정답인 줄 알고 뭐든 물어보던 어린이 시절, 엄마에게 관심이 떨어졌지만 용돈을 받기 위해서 말을 듣는 척이라도 하던 사춘기 시절. 이 모든 게 지나 버렸다.


자식에게 더 이상 엄마가 필요하지 않다는 걸 잘 받아들이는 사람도 있지만, 어떤 엄마는 그걸 잃고 싶어 하지 않는다. 특히 엄마의 역할을 할 때만 자신의 존재감을 확인해 왔던 사람이라면 더욱 미련을 놓기 어렵다. 자식은 고통받더라도, 통상적으로 ‘자식을 위한 일'로 알려진 일을 하는 자신에게 만족감을 느끼고 그 느낌을 포기하지 못한다.


이런 상황에서 반찬은 중요한 매개체가 된다. 집밥은 자식이 완벽히 독립한 후에도 엄마를 찾게 한다. 자식을 위한 반찬을 만들면서, 엄마로서 아직 자식에게 도움이 되는 사람이라는 걸 확인받을 수 있다. 게다가 반찬의 궁극인 김치는, 그걸 확인하기에 가장 좋은 아이템이다. 자식들이 가장 맛있는 김치는 우리집 김치라고 하는, 자부심의 결정체의 반찬이다.


딸이 그렇게나 강하게 자기 의견을 피력했는데도 또 김치를 보내는 건, 김치가 딸보다는 엄마 자신의 성취감을 얻기 위한 일이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양도 많은 것이다. 김치를 고작 도시락 반찬통만큼 보내는 걸로는 성취감을 채울 수 없지 않겠는가.


그걸 알면 이 일은 엄마의 자존감을 지켜줄지 말지 선택하는 일로 바뀐다. 엄마가 힘들게 만들어서 보낸 김치를 버리는 나쁜 딸이 될 수밖에 없도록 내몰리는 일이 아니다.


엄마를 위한 일에 자신을 곤란하게 만드는 게 싫다면 이 딸처럼 반송하면 된다. 이 선택은 나를 위한 것이므로 내가 다치지 않도록 감정을 최대한 담지 않는다. 그렇게 중요하지 않은 사람이 불필요한 물건을 보내면, ‘고맙지만 사양할게요'라고 이야기하듯이 한다.


엄마는 쉽게 포기하지 않을 거다. 나도 담담하고 메마른 거절을 반복하면 된다. 딸이 아무리 난리를 치더라도 김치가 자식에게 도달했다면, 김치를 만들어준 엄마라는 타이틀을 얻을 수 있다. 하지만 김치가 되돌아오면 그 목표를 달성할 수 없기 때문에 전달 경쟁은 우리의 승리로 끝날 거다.


만약 엄마의 성취감을 지켜주고 싶다면 김치를 그냥 받으면 된다. 엄마의 성취감은 딸이 김치를 받고, 맛있게 먹었다는 반응을 얻으면 끝난다. 엄마표 김치가 감정적으로 할 일은 다 끝나기 때문에 그 김치는 이제 일반적인 김치가 된다. 따라서 다른 사람에게 주거나 중고시장에 팔아도 된다. 여의치 않으면 음식물쓰레기 봉투에 버리면 된다. 몇백 원으로 엄마의 감정을 지켜주는 거다.


음식 낭비가 되기 때문에 거부감이 들 수 있다. 하지만 인간의 존엄성과 자존심을 위해서 얼마나 더 많은 낭비가 이루어지고 있는지 알아야 한다. 괜찮은 사람으로 보이고 싶어서 예쁜 옷 한 벌을 사는 것보다 덜 낭비된다. 적어도 음식물쓰레기는 옷보다 더 잘 썩는다. 


혹은 인간적이지 않은 대응 방식이라고 생각할지 모르겠다. 하지만 엄마와 나는 서로 다른 사람이고, 다른 욕구가 있다. 엄마와 나의 관계에서 생기는 엄마의 욕구도 인정해야 한다. 엄마에게 성취감을 느끼고 싶어 하는 욕구가 있는데도 불구하고, 그 일을 아예 시도조차 못하게 하는 게 더 인간적이지 못한 일이다.


엄마가 원하는 걸 다 받아줄 필요는 없다. 하지만 엄마가 그런 욕구를 느끼는 것에 문제 삼지는 말아야 한다. 엄마가 내 뜻대로 완벽히 움직여 줘야 한다는 생각에 힘든 건 아닌지 생각해 봐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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