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자 배우에게 주어지는 역할은 범죄의 피해자, 남자에게 사랑받는 여자, 자식을 둔 엄마가 대부분인 것 같다. 드라마나 영화에서 엄마가 주요 역할을 맡았다면 그 캐릭터의 설명은 뻔하다. 어떠한 성격이나 가치관을 가진 엄마든 ‘자신의 목숨까지 기꺼이 바칠 만큼 자식을 사랑하는’의 수식어구는 꼭 붙어 있을 거다.
특히 한국에서 엄마는 무조건 자식을 사랑하는 것처럼 여겨진다. 그래서 엄마의 감정적인 대응이나 의도적인 괴롭힘도 모두 사랑의 서툰 표현이라고 해석해 버린다. 하지만 아이보다 자기가 우선인 엄마도 있고, 자식을 사랑하지 않을 수도 있다.
자식을 사랑하더라도 그 감정이 한 아이를 잘 키울 만큼 충분하지 않을 수도 있다. 자식을 사랑하는 감정이 충만하지만 책임감은 따라 주지 못할 수도 있고, 변덕이 심해 사랑과 미움의 감정이 왔다갔다 할 수도 있다.
충분히 자식을 사랑하더라도 엄마에게 일어난 개인적인 일이 영향을 미칠 수도 있다. 자식을 사랑하는 사람이더라도 회사나 다른 인간관계에서 겪은 일로, 그 감정마저 완전히 고갈되어 그날따라 자식도 꼴 보기 싫었을 수 있다.
엄마는 나를 사랑하지 않았을 수도 있다는 점, 사랑했더라도 감정의 양이 일정하지 않았을 수 있다는 점, 엄마에게도 개인적인 일이 있다는 점을 온전히 받아 들인다면, 이해되지 않는 부분들이 짜맞춰지는 경험을 할 거다.
엄마가 언젠가 TV 프로그램에 나오는 아이들을 보며, 나와 동생이 어릴 때 예쁜지 모르고 키웠다며 후회섞인 말을 했다. ‘예쁜지 몰랐다' 정도로 표현했지만, 사실은 엄마가 우리를 사랑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고백하고 있는 거라는 걸 알았다.
당연히 마음이 아팠다. 내가 정말 사랑했던 사람이 나를 사랑한 적 없었다는 사실을 직면하는 건 꽤 마음이 쓰라린 일이었다.
그런데 쓰라림이 지나가자 말로 설명할 수 없는 자유로움이 느껴졌다. 너무 오래도록 가슴에 맺혀 있어 한몸인 줄 알았던 응어리가 쑥 내려가는 느낌이 들었다. 이해되지 않았던 게 이해되고, 내 감정에 대한 죄책감이 사라지고, 두려움이 해소되는 순간이었다.
사랑의 이름으로 이해되지 않던 순간들이 많았다. 전혀 다른 색깔의 표현을 어떻게든 사랑이라고 해석하려다 보니 개념 자체에 혼돈이 왔다. 어떻게든 합리화시키려다 보면 이상한 결론으로 치닫는 경우도 많았다.
사랑은 위험하고 고통스러운 거구나. 엄마가 날 사랑하는 데도 이렇게 문제가 많다니 나는 정말 잘못된 인간이구나. 엄마에게 사랑을 받는 데도 이렇게 힘들어 하다니 나는 고마움을 모르는 사람이구나.
엄마가 상처를 준 이유는 딸을 사랑하지 않아서일 수 있다. 부족해서일 수도, 그날은 사랑하지 않았을 수도 있다. 엄마도 인간이기 때문에 감정이 들쑥 날쑥 한다. 이해되지 않게 상처받았던 걸 나에 대한 문제로 여기거나 특별한 이유가 있다고 생각하지 않아도 된다. 사랑해서 그랬다는 이유로 내 상처에 죄책감을 가지지 말자. 엄마가 어떠한 감정을 가졌든 나는 힘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