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육비를 상환하라는 계약서를 쓴 자식의 사연이 언론에서 소개된 적 있다. 성인이 되자마자 부모님은 자신을 양육한 비용을 상환하라고 요구했다고 한다.
그 부모는 매달 200만 원씩 20년에 나눠서 갚으라고 계약서까지 받아냈다. 그리고 자식이 돈을 주지 않으면 직장에 쫓아가 행패를 부려서라도 어떻게든 뜯어 갔다.
하지만 부모에게는 자식을 키울 의무가 있다. 이건 도의적인 것뿐 아니라, 법에서도 명시하고 있는 부분이다.
그래도 다행인 건 자식에게 양육 비용을 갚을 의무는 없다는 것이다. 계약서를 썼다고 하더라도 민법 제103조에 의해 ‘선량한 풍속 기타 사회질서에 위반한 사항을 내용으로 하는 법률행위'에 속해 무효가 된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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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경제적 여유가 없는 부모가 자식에게 돈을 요구하는 사연은 그리 특별한 게 아니다. 같이 살기 때문에 생활비를 낸다는 수준 그 이상의 갈취가 공공연하게 일어난다.
자신에게 돈이 있는 걸 알면 부모가 어떻게든 빼앗으려 해 경제적인 부분을 완벽히 숨긴다는 사람, 돈을 빌려달라고 하고 갚지 않아 골치를 썩는 사람들이 여럿이다.
부모가 자식에게 이렇게 당당하게 돈을 요구할 수 있는 이유는 분명히 있다. 우리는 탄생과 함께 부모에게 빚을 지기 때문이다.
태어나기 전까지 엄마의 육체를 괴롭히고, 태어나서도 한동안은 혼자서 제 몸도 케어할 수 없다. 아무리 못난 부모라도 아이를 먹이고 재우고 하는 일의 노동만큼은 했다. 그리고 그 일이 얼마나 힘든 일인지 잘 알고 있다. 완전한 타인이라면 하루라도 할 수 없는 일이다.
그런 사실을 알기 때문에 자식도 마냥 쉽게 이런 요구를 거절할 수가 없다. 어릴 적 자신이 가장 사랑하던 나의 부모가 돈 때문에 힘들어하는 걸 눈앞에서 생생히 지켜봐 왔다.
김대수 뇌 과학자가 유퀴즈에 나와서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뇌는 이기적이기 때문에 누구를 위해서 내가 헌신하고 희생한다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한다. 그건 엄마의 육체에서 독립한 아이를 향해서도 마찬가지다.
그런데 그게 가능한 사람들이 분명 우리 주변에 많다. (남의 엄마라든가, 친구네 아빠라든가.)
불가능을 가능으로 만드는 로직은 이렇다. 사랑을 통해서 나아갈 수 있는 뇌의 영역이 확장된다. 남을 위해 나를 헌신하고 희생할 수 있는 건 ‘내’가 확장되었기 때문이다.
뇌 속에서 남이던 자식이 사랑을 통해 곧 나의 일부가 된다. 이렇게 자식까지 나의 영역이 확장된 사람들에게는 자식을 위한 일이 곧 나를 위한 일이 된다. 나를 위해서는 나를 희생할 수 있다.
모성애나 부성애라는 것은 결국 부모가 자신의 영역을 자식까지 넓히기에 생기는 감정이 되는 것이다.
그러나 반대로 생각해 보면, ‘나’의 영역이 자식까지 넓혀지지 않은 부모에게 자식은 남보다도 못한 사람이 된다.
육아라는 내키지 않는 강제 노동을 할 수밖에 없게 사람. 성인에 비해 잘하는 것이 단 하나도 없는 쓸모없는 작은 인간. 거의 20년을 한 푼 벌어오지 못하면서 쓰기만 하는 돈 먹는 하마.
아직까지도 자식이 ‘남’의 영역에 머물러 있는 부모들에게 자식은 이런 존재다. 자신의 젊음과 돈을 빼앗아간 존재.
게다가 본인이 중요하게 여기던 걸 자식 때문에 포기해야 하는 상황이 있었다면, 그 원망은 이루 말할 것이 없을 것이다. 남을 위해 인생을 바쳐야 하는 운명만큼 지독한 것은 없을 테니까.
억울해하고만 있을 수는 없다. 젊음은 이제 못 찾는다고 하더라도, 돈은 받아낼 수 있다. 그동안의 노동에 대한 임금이 체불되었지만, 이제 자식에게 경제적인 능력이 생겼다.
그러기에 그들은 당당하게 자식에게 말한다.
‘키워준 값' 내놔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