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을 찾아서
인문학적 요소가 고갈됨과 함께 찾아온 사유의 얕음이 나에게 찾아왔다.
더불어 내가 계속해서 해오던 일과 함께 새로운 시작을 알리는 일까지 함께 병행했다. 그러는 바람에 사유의 얕음을 깊음으로 가져가기에는 책을 읽을 시간도 사유를 하기 위해 만나야 할 사람도 공부도 할 수 없었다.
그렇게 1년여의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하루하루 바쁨과 치열함의 공존 속에 지쳐 갈 때쯤이었다. 길을 걷는데 5살 정도로 보이는 어린아이와 엄마의 모습이 보였다. 아이는 세발자전거를 열심히 타고 있었고, 엄마는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 무심코 바라본 아이의 얼굴에는 웃음을 한껏 머금은 행복한 표정이 보였다. 그리고 까르르까르르 웃는 목소리가 들렸다. 엄마와 눈을 마주치며 존재여부를 확인하는 듯 또다시 자전거를 타고, 웃고 눈 마주치기를 반복했다. 나는 속으로 아이는 참 행복하구나...라고 생각했다.
그 순간 나는 질문하나 가 떠올랐다. "행복하세요?" 이 질문 하나가 그동안 잊고 있었던 소소했던 행복들을 다시 생각나게 했다. 그리고 지금 나는 행복한가?라고 나 자신에게 묻고 있었다.
많은 사람들이 행복을 이야기할 때 혼용해서 사용하거나 느끼는 감정을 가지고 이야기할 때가 많다. 즉 재미가 있는 것들, 즐거웠던 것들, 맛있던 기억들 등등의 일련의 사건을 기억한다. 그 가운데 일어났던 재밌고 즐거웠던 일이 있다면 그것을 행복이다라고 생각하기 마련이다. 하지만 감정을 파편화시키고 어휘를 해체시켜 보면 행복은 곧 즐거움과 재미가 아닐 수 있다. 즐거운 것은 즐거운 것이고 재미있었던 것은 재미있었던 것이다. 그것이 일종의 좋은 경험으로 남는 것이고 우리는 그것을 행복하다고 혼용해서 사용하고 있는 것이다. 게임에서 승리를 하면 그 만족감이 배가 되고 재미가 있고 몰입이 된다. 이것은 흥미로운 것이고 재미있는 것이다. 거기다 승리라는 쾌감을 가져다주는 것이지 그것이 곧 행복하다는 아니다. 그렇다면 행복하다는 어떤 것일까?
고대 그리스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는 에우다이모니아(그리스어: εὐδαιμονία [eu̯dai̯moníaː])라는 말을 통해 행복을 설명하고 있다. 여기서 에우는 좋은 이라는 뜻이고 다이모니아는 영혼이라는 뜻이다. 합치면 좋은 영혼을 가진 사람이 행복한 사람이다라는 해석이 될 수 있겠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에우다이모니아가 최고의 선이라고 이야기한다. 최고선은 좋은 것일 수도 있고 뛰어난 것일 수도 있다. 어쩌면 탁월함이라고도 볼 수도 있겠다. 그리고 훌륭하다고도 표현될 수 있겠다.
좋은 영혼을 가진 사람이 행복한 사람이고 그것이 훌륭하다고 한 문장으로 정의 내릴 수 있다. 그렇다면 좋은 영혼을 가진 사람은 어찌하여 행복하다고 볼 수 있을까? 좋은 영혼은 종교에서 말하는 맑은 정신으로 수행을 하는 사람들인가? 아니면 매일 아침 맑은 정신으로 일어나 명상을 하는 사람을 좋은 영혼이라고 할 수 있을까? 그것도 아니라면 술과 담배 온갖 나쁜 것들의 유혹에서 이겨낸 사람들을 좋은 영혼이라고 할까?
나는 좋은 영혼이란 타인을 향해 있는 마음이라고 생각한다. 맹자의 사단에서 측은지심을 이야기할 때의 마음이라 생각한다. 측은지심은 물가에 어린아이를 내놓은 마음이라 한다. 행여 잘못될까 행여 물을 먹을까, 넘어지진 않을까 하는 것들 말이다. 타인을 향해 있는 마음을 우리는 관심이라고 부른다. 즉 궁극적으로 배려가 있는 삶, 나눔이 있는 삶이 행복하다고 볼 수 있고, 좋은 영혼을 가진 사람이다라고 볼 수 있다.
그것의 시작은 타인을 향한 관심으로부터 나온다고 본다. 그럼 타인을 향해 있는 마음을 가지려면 기본적인 절차가 필요하다. 내가 스스로를 알지 못한 상태에서 타인을 바라볼 수 있을까? 내 마음의 여유가 없고, 내가 지금 어떤 상태인지를 파악하지 못했는데 타인에게 관심을 가지는 것은 앞뒤가 맞지 않다. 그래서 행복하세요?라는 질문에는 오로지 자기 자신을 알고, 긍정성을 확보해야 한다. 마음의 여유가 생겼다는 말은 내가 존재와 세상을 바라볼 수 있는 여유가 생겼다는 말이기도 하다. 그런 면에서 세발자전거를 타는 아이는 니체의 어린아이와 같다. 온전히 놀이와 망각의 여유에서 자신의 행복과 엄마라는 타인을 동시에 돌보고 있다.
내가 나를 알고 긍정적일 수 있을 때 우리는 타인을 향한 마음이 발현되고 그것이 곧 좋은 영혼으로 가는 길이라고 생각한다. 내가 이런 말들을 사유할 때 혹은 사람들과 이야기할 때 봉사활동을 예로 드는 분들이 많다. 물론 타인을 향한 마음이 봉사의 삶일 수 있으나 배려와 나눔은 항상 봉사의 형식이 아니라는 것도 기억하길 바란다.
순진무구한 어린아이의 망각이 우리를 긍정의 길로 인도하고 그것이 우릴 더 많은 마음의 여유로 데려다줄 것이라 생각한다.
그래서 여러분은 행복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