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자문을 끝까지 외운 사람은 많지 않겠지만 하늘 천 따 지로 시작하는 저 구절은 누구나 한 번쯤 읊조려 봤을 것이다. 그 옛날 천자문을 외우며 검을 현(玄), 누를 황(黃)을 가마솥에 누룽지라 한 꼬마의 장난기가 귀엽다. 그런데 이것은 '중국'의 천자문이라며 <우리나라 천자문>을 만든 분이 계시다는 것을 아시는지?
(우) 우리나라 천자문의 일부이다. 世宗正音 叔舟最功이라 쓰여 있다.
世宗正音 叔舟最功 (세종정음 숙주최공)
세종대왕이 정음을 훈민함에 숙주의 공이 최고였고
서예가 신덕선 선생님이 지은 <우리나라 천자문>의 일부이다. 우리가 흔히 아는 중국의 천자문이 아니라 ‘우리나라’ 천자문이다. 1천자에 우리나라 5천년의 역사를 담았다. 조국강토와 역사적 인물이 <우리나라 천자문>에 등장한다. 우리나라 천자문을 만든 의도와 의지에 놀랐고, 1천자에 우리나라 역사를 담은 독창적인 구성과 치밀함에 놀랐다. 한자를 많이 안다고 만들 수 있는 기획이 아니다. 도대체 이 분은 어떤 성장환경과 배움의 배경이 있는 분일까?
1945년 생인 선생님은 17세에 주역(周易)을 공부하셨다고 한다. 이웃 마을 주역에 정통한 나이 지긋한 어르신을 스승으로 모시고 왕복 40리 길을 오가며 주역을 배우셨단다. 그러나 이례적인 폭설로 찾아 뵙기를 잠시 쉬었던 어느 겨울, 눈이 녹았을 즈음 스승님도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접한다. 17세에 주역을 배우고자 했던 것이 남달라 여쭸다.
“고등학교 공부는 어떻게 하고요?”
“고등학교? 나는 초등학교 근처도 안갔어. 무학이야”
"초등학교만 졸업하신 것도 아니고 무학이라고요?”
"할아버지께서 학교에는 얼씬도 하지 못하게 했어. 대신 학문이 깊은 스승을 모시고 1:1로 배우게 했지."
학문이 깊은만큼 연세도 많았던 스승들은 스폰지처럼 빨아들이는 제자에게 더 많은 가르침을 전수하지 못하고 세상을 뜬다.
“이제 좀 알겠다 싶으면 다들 그렇게 돌아가셨어.”
본의 아니게 여러 스승을 거치며 다양한 학문을 공부하던 선생님은 붓글씨에 삶의 의미와 조국중흥의 사명이 있음을 발견하고 상경한다. 붓글씨를 배울 스승을 친구에게 부탁하며 ‘반드시 나이가 적을 것’을 첫 조건으로 걸었단다.
나이가 적어야 나를 오래 가르칠 수 있지. 오죽하면 그걸 첫 조건으로 삼았겠어.
서예수학 연마 66년, 풍수지리 연구 49년, 한국상고사/ 경전연구 수도 수행 45년이 그의 이력이다. OO 대학 00 전공 등으로 기술될 수 없는 남다른 인생을 보여준다.
그를 보며 ‘무극은 태극’이라는 말이 떠올랐다. 무학(無學)은 태학(太學)임을 그의 삶이 웅변처럼 말해준다. 세상의 기준에서는 무학이지만 스스로 높은 학문의 경지에 이른 것이다. 어릴 적부터 스승 찾아 삼만 리라 할 법한 많은 곤란을 겪었지만, 결국은 스스로의 힘으로 배움의 한 경지를 이뤄냈다. 붓글씨를 위한 그의 집념에 가까운 열정은 단 하나의 도구로 설명이 끝난다.
철로 만든 붓!
붓글씨에 인생을 걸기로 다짐한 어느 날, ‘철붓’을 주문제작했다고 한다.
돌판에 철붓으로 획을 긋고 계신다.
그는 돌로 된 커다란 판에 철붓을 그으며 운필력을 키웠다. 돌판에 긋는 철붓의 쇳소리를 듣자니, 폭포 아래 피를 통하는 소리꾼들의 처절한 발성이 들리는 것 같다. 소위 스펙이라고는 전혀 없는 그가 청와대를 출입하며 정치인들의 서예지도와 수많은 절들의 현판을 쓰는 명실상부 대한민국 붓글씨의 일인자가 되었다.
자녀교육의 괘, 산수몽 - 山水蒙
그의 필사적인 배움의 과정은 주역의 4번째 괘 <산수몽(山水蒙)>을 떠오르게 한다. 산수몽의 괘상은 밑에는 '물(☵)'을 상징하는 '감괘'가 있고 위에는 '산(☶)'을 상징하는 '간괘'가 있다. 산 밑으로 물이 흐르는 이미지다. 물은 산 꼭대기에서부터 아래로 흘러왔을 터이다. 그런데 물 안개가 피는지 산의 형태가 자욱하니 몽롱하다. 그래서인지 이 괘상의 이름(괘명)은 어리석을 몽(蒙)이다. 하여 산수몽(山水蒙).
몽(蒙)은 어둡다, 어리석다라는 뜻이 있다. 아직 지식과 지혜가 부족하여 천지를 분별하지 못하는 어린 아이를 생각하면 된다. 천자문을 뗀 후 어린 아이들이 배웠다던 <동몽선습(童蒙先習)>과 <격몽요결(擊蒙要訣)>은 바로 주역의 ‘몽(蒙)’괘에서 유래한 말이다. 아이들에게 깨우침을 주어 어리석음에서 벗어날 수 있는 현명한 교육은 무엇일까.
스승 찾아 삼만리 - 匪我求童蒙 童蒙求我 비아구동몽 동몽구아
주역은 6획으로 된 '괘상'(이미지)과 '괘명'(네이밍)이 있다는 것은 알았다. 그런데 여기에 괘상과 괘명을 풀이하는 '괘사'라는 것이 있다. 키 비주얼(괘상)에 따른 슬로건 정도로 이해하면 되겠다. 산수몽의 괘사는 다음과 같다.
비아구동몽 동몽구아(匪我求童蒙 童蒙求我)
동몽(童蒙)은 어린 학생이다. 내가 어린 학생을 구하는 것이 아니라(비아구동몽, 匪我求童蒙) 학생이 나를 구한다(동몽구아, 童蒙求我)는 것이다. 요새는 학생을 유치하는 학교, 학원이 많지만 예전만 해도 그렇지 않았다. 훌륭한 스승을 찾아 제자가 되려는 이들의 이야기는 예전에 더욱 많다.
배움에 뜻이 있는 사람은 깨달음을 줄 스승을 찾아 헤매인다. 결국은 그 스승이라는 파랑새는 자신의 내면에 있음을 끝내 발견하게 될 지라도, 스승을 찾는 고된 여정과 방황이 내면의 발견을 더욱 돋보이게 한다. 신덕선 선생님은 젊은 시절 스승을 찾아 방황하였지만 결국 그를 서예의 대가로 만든 것은 ‘철붓을 돌에 새기는’ 그의 굳은 신념과 집념에 있었다.
스스로 스승을 찾고 끝내 독학으로 한 영역의 대가가 된 신덕선 선생님은 정작 자녀 교육을 어떻게 했는지 궁금해졌다.
“나는 애들 교육에는 크게 관여하지 않았어. 나의 길과 아이들의 길이 다르니까. 다만 아들놈한테 내가 경전 강의하는 것을 녹음해 달라고 했지. 내 강의를 들으라고 한 게 아냐. 1시간 30분동안 녹음해서 편집하는 작업에 대해 용돈을 주겠다고 했지. 그런데 그 놈이 녹음, 편집한답시고 테이프를 여러 번 듣기를 반복하더니 어느 날 갑자기 잠도 안자고 전공 공부를 하더군. 그러더니 대학을 수석으로 졸업했어. 동양고전을 듣다가 문리가 트인 거지. 자녀교육에 대해서 할 수 있는 이야기는 그 뿐이야.”
처음은 알려주나 거듭 물으면 알려주지 않는다(初筮 告 再三 讀 瀆則不告)
산수몽의 괘사, "처음은 알려주나 거듭 물으면 알려주지 않는다(初筮 告 再三 讀 瀆則不告)"를 살펴보자. 초서(初筮)는 직역하면 ‘처음 점을 친다’는 뜻이나 여기에서는 맥락상 ‘처음 배울 때’로 해석하면 되겠다. 처음 배울 때는 알려주지만(告) 거듭(再三) 물으면 욕되게 된다(讀, 더럽힐 독). 욕되니 알려주지 않는다로 해석할 수 있겠다.
교육은 결국 스스로 깨우칠 수 있도록 안내하는 것이다. 처음에는 부모와 스승의 도움이 필요하지만 궁극적으로는 스스로의 깨우침이 있어야 한다. 스승을 찾아 헤매이고 스승에게 질문하며 배울 수 있으나 점점 스승 의존도를 낮춰 스스로의 깨달아야 한다.
신덕선 선생님의 경우야 극히 이례적인 사례라 하겠으나, 배움에의 의지와 간절함은 스승을 찾아 헤매이는 것에서 볼 수 있으며(匪我求童蒙 童蒙求我 비아구동몽 동몽구아), 그렇게 스승을 찾았다 하여도 스승에게 의존해서는 안될 것이며(初筮 告 再三 讀 瀆則不告, 초서 고 재삼 독 독즉불고), 하기 싫은 공부는 억지로 시키지 말되 스스로 깨우치는 공부야말로 그 끝이 길할 것이다(困蒙 吝, 童蒙 吉 곤몽 린, 동몽 길).
철붓을 들고 오늘도 수련하듯 붓글씨를 쓰는 선생님을 보며 스스로 깨닫는 모습이 가장 참된 교육이자 배움임을 깨닫는다. 스승이라는 파랑새는 내면에 있다. 그러한 깨달음은 산에 어린 물안개를 걷어내어 저 편의 푸른 산을 또렷하게 볼 수 있도록 해줄 것이다. 어리석은 몽(蒙)의 상태가 맑아지며 물 위에서 날아오르는 파랑새의 날개짓이 보이는 것 같다.
스승이라는 큰 산을 겪으며 내려온 물은 바다를 향해 흘러야 한다. 이제 하산해야 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