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과나무 전지를 하다
어쩌다 농부가 되어 꽃을 자른다. 전지는 모진 일. 종일 꽃눈을 자르고 돌아오면 손이 저리다. 날은 벌써 덥고 꽃눈은 저만큼 부풀었는데 어쩌다 나는 농부가 되어 이 이른 봄날 종일 꽃눈을 자르고 있다.
자르지 않으면 내가 잘릴 테지. 자르지 않으면 꽃은 꽃마다 피어 죄 탁구공만한 사과로 맺힐 테니 그 사과 팔아 아이 운동화 사고 태권도장에도 보내야하는 일은 대략난감일 터. 그러니 꽃눈을 잘라야하는데
그래도 꽃을 자르는 건 섭섭한 일. 겨우내 가지를 치고 꽃눈을 땄으니 그만 섭섭해도 되겠는데, 피지 못하는 게 어디 사과꽃뿐이랴 싶은데
꽃은 피어야 꽃이지. 온 밭이 환해야 사과꽃이지. 온 밭이 환하고 온 산이 환하고 온 천지가 환해서
하이고매 저 열매를 언제 다 솎을까나 더러 울리다가
어느 비온 날 후두둑
자취 없이 꽃 지고 잎 지고 사과꽃 지는 풍경 따위는 모른 척 풀이 자라고
깜빡 졸았더니 봄이네 싶은 봄을 맞아야할 터인데
꽃은 무슨 꽃. 종일 꽃눈을 자르다 돌아오는 저녁. 아이고, 디다 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