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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쉬 Sep 15. 2021

건강하게 자본주의 살아가기

숲속의 자본주의자 - 박혜윤

 저 푸른 초원 위에 그림 같은 집을 짓고 사랑하는 우리 님과 한 평생 살고 싶어.

 

  위의 가사를 보고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푸른 초원의 땅 값은 얼마이며, 집을 짓는데 드는 돈과 사랑하는 사람과 결혼하는 모든 비용은 얼마나 들었을까? 대부분의 사람은 엄두조차 못 낼 것이다. 경제 양극화가 더욱 심해지는 가운데 "숲속의 자본주의자"의 저자는 걱정을 하기보단 자신이 행복하게 자본주의 경제체제 안에서 주체적으로 살아가는지 우리에게 알려준다.


 은퇴나 시골 생활을 준비했던 것이 아니었다. 쓰기만 하고 살아도 될 만큼 돈을 모아둔 건 절대
아니었고, 그렇다고 자연 속에서 자급자족 경제를 일궈보자는 거창한 목표도 없었다. 단지 우리는
전과 같은 모습으로 일하기 싫었다.

 

 돈을 벌지 않고 살 수 있을까? 명문대 출신 기자, 한국사회 안에서 그들의 지위를 가장 잘 표현하는 말이다.

멋진 정장을 입고 커피를 마시며 거리를 누비는 사람들이 생각이 나는가? 왜 저자는 한국사회에서 누구나 꿈꾸는 것들을 내려두고 미국의 변두리의 시골로 떠났을까. 저자는 가족들과 함께 이전까지 지속하던 노동에서 벗어나 완전히 새로운 모습으로 살아간다. 유기농 호밀을 갈아 오랜 시간과 공을 들여 먹을 빵을 굽는다. 블랙베리가 나는 철에는 가족 모두가 열매를 따서 먹는다. 야생의 블랙베리는 시거나 떫다. 또 어떠한 맛도 느껴지지 않을 수도 있다. 저자는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재배된 맛이 아닌, 야생에서 살아남은, 그들이 가진 블랙베리 그대로의 맛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인다. 먹을 것을 재배하기 위해 농사를 짓는 행위가 동물을 해치고, 작물을 지키기 위해 어쩔 수 없이 뿌려지는 농약과 울타리 속에서 '친환경적인 농사'가 불가능하다는 것을 깨닫는다. 반죽의 촉감, 발효되는 시간, 구워지는 냄새 이 모든 것들을 행복이라고 부른다.


우리는 왜 실패에 그토록 상처 받고, 결과적으로 배우지 못하고 덮어두게 되는 걸까. 그것은 아마도
기대한 결과를 얻지 못해 실망하고, 남들에게 창피하고, 대가들은 노력이 헛수고가 됐다는 슬픔이나 분노 때문일 것이다.


  삶을 바라보는 시선을 바꾸자 어려운 문제들이 줄줄이 해결되었다. 비단 누군가에 대한 분노, 그것의 원인을 누구나 말해주었지만 결국 해결하는 방식은 스스로가 찾게 되었다. 저자는 한 이야기로 예를 든다. 어느 가난한 마을에서 바구니를 만들었다. 마을 사람은 돈이 많은 변호사에게 바구니를 팔고자 했다. 하지만 변호사는 구매를 거부한다. 마을 사람들은 자신의 마을을 다 굶겨 죽일 거냐며 분노한다. 우리는 마을 사람과 같이 분노하고 있지는 않는가? 열심히 노력하고 스펙을 쌓는데 내가 원하는 직장, 나를 원하는 직장은 없는가. 또는 직장에서 이렇게 열심히 일을 하는데 왜 아무도 알아주지 않을까? 가만히 생각해보면 아무도 내게 그러한 요구를 하지 않았다. 설령 요구하였다고 한들, 그들은 내게 합당한 대가를 약속했는가? 저자는 권리라고 믿는 것도 자신이고, 요구하는 것 역시 자신이라는 점에서 분노의 원인을 찾는다. 마치 내가 만든 바구니를 안 사주자 분노하는 마을 사람처럼, 그 사람의 요구 의사와 상관없이 나는 제공하고 받지 못한 대가에 대해 분노한다. 자연은 우리에게 제공하지 않는다. 단지 우리가 그들에게서 얻어갈 뿐이다. 저자는 그렇기에 좋은 세상을 만들겠다는 욕망 역시 자신의 것이고, 그런 자기 이상에서 오는 실망과 분노 역시 마을 사람과 같다고 말한다. 저자는 자연에서 삶의 방식을 얻었고 그렇게 살아간다.


가난에도 참을 수 있는 가난이 있고 참을 수 없는 가난이 있다. 이 시대가 겪고 있는 가난이 바로 참을 수 '없는' 가난이 아닐까 싶다. 가난이 한 인간의 자격과 가치를 판단하는 기준이 되고 인격적 모욕이 되어버렸다. 모든 경험과 물건에 돈의 가치가 매겨지는 순간 그 돈의 숫자는 냉혹한 평가의 기준이 된다.

 

  밑 빠진 독에 물을 붓는 콩쥐를 생각해보라. 콩쥐는 그 상황을 어떻게 벗어났는가? 두꺼비가 나타나 그 독을 막아주었다. 콩쥐는 밑 빠진 독을 가득 채웠다고 한들, 그 삶에서 벗어났는가? 콩쥐가 원님과 결혼하여서 행복해졌는가? 결국 질투에 눈이 먼 팥쥐에 손에 죽어버린 콩쥐를 보면서 이런 생각을 한다. 누군가와 상황이 변하여 자유해질 수 없다는 점이다. 가난이 상대적이라면 끓이지 않고 계속 가난해질 뿐이다. 카뮈가 말한 것처럼 사치품이 우중충해지는 가난 속에서 얻는 진정한 자유를 말해준다. 저자는 가난을 미화하고자 하지 않는다. 단지, 참을 수 있는 가난에 대한 기쁨과 자유를 나누고 싶어 한다.

 

 숲 속에서 건강한 자본주의자로 사는 저자의 가족들은 오늘도 자신이 진짜 욕구하지 않는 것을 사는 행위를 멈추고 세상이 욕망케 하는 것을 넘어서서 나를 기쁘게 하는 것들에 집중하며 살아간다. 오늘도 야생의 풀과 통밀을 갈아 만든 빵, 블랙베리를 먹으며 가족들은 자신들에게 집중하고, 세상과 연결되고, 분노와 욕망에서 벗어나 즐겁게 살고 있다.



좋은 글을 소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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