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10.17 '왜 해야돼?'라는 질문이 필요없는 일
지구 육아 혼자 해 보니까 어때?
아내가 새로이 회사 일을 시작한 지 일주일 쯤 지났을 때, 지구를 재우고 저녁을 먹으며 나에게 물었다. 그에 대한 대답은 다양할 수 있는데, 힘들다 혹은 할 만 하다 혹은 재미있다와 같은 스펙트럼을 가지고 있을 것이다. 나는 진심을 담아 재미있다고 이야기했고, 그 근거로 다음과 같은 말을 덧붙였다.
다른 일도 아니고, 지구 돌보는 일이잖아.
물론 기존에 익숙해져 있던 회사일을 하는 것과 달리, 육아라는 생소한 분야에서 스스로의 의사 표현도 하지 못하는 4개월 아기를 혼자 돌보는 것은 어려울 수 있고 아내도 그런 측면에서 물어본 것이리라 생각한다. 물론 애로사항도 많지만 큰 관점에서 보았을 때 여전히 나는 육아가 재미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과거에야 돈을 벌어오는 회사일을 진짜 일로 치고 육아 및 가사일은 당연히 해야 하는 아내의 의무(?) 쯤으로 여겼지만, 지금 그런 이야기를 하면 큰일 난다. 수치적으로 '가사도우미 이모님을 풀타임으로 고용하면 얼마얼마다' 혹은 '아내가 직장을 그만두면 발생하는 기회비용이 얼마얼마다'와 같은 계산으로 가사일의 가치 평가가 용이하게 된 부분도 있지만 그 저변에는 육아 및 가사노동을 회사에서의 노동과 다름 없는 일로 인정해 주도록 조성된 사회적 분위기가 있다.
나도 물론 육아를 철저히 '업무'로 받아들였기에 육아휴직이 단순히 회사일을 쉬는 기간이 아니라 육아라는 새로운 직무를 수행하는 기간으로 생각했다. 손에 익은 노트북과 각종 툴들, 유관부서와의 협업이나 아이데이션, 기획과 스프린트 진행 등 기존 회사에서 하던 업무를 잠시 내려놓고 젖병과 쪽쪽이, 모빌 등을 동원하여 지구가 무사히 하루를 잘 보내는 것이 내 임무였던 것이다.
업무라는 큰 틀로 보면 회사일과 육아는 정말 차이랄 게 별로 없는 게, 목표가 있고 그것을 달성하기 위한 전략을 수립하고 기존의 방법을 개선함과 동시에 새로운 방법을 도입하여 최종적으로 성과를 만들어 내는 것이 업무이다. 그러므로 나는 분야와 직무가 다를 뿐 육아휴직 후에도 업무를 계속 하고 있는 상태이고, 그러한 새로운 도전(?)은 언제나 환영이다.
다만 그 와중에 발견한 큰 하나의 다른 포인트가 바로 미션(Mission)의 차이였다.
회사일을 하면서 항상 갈증을 느꼈던 부분이 '내가 왜 이 일을 하는가?'에 대한 답을 찾는 것이었다. 사회초년생 때에는 상급자가 시키니까, 조직에 도움이 되기 위해서 등의 이유로 당연히 일을 해야 했었고, 어느정도 짬이 찼을 때에는 진급을 위해, 혹은 내 커리어를 위해 일을 해왔던 것 같다. 하지만 그러한 결론들이 항상 미봉책에 그치는 것 같은 찝찝함이 들었던 것이 사실이다.
반면 지구 육아 업무는 미션이 더할 나위 없이 확고하다. 지구는 내 아들이고, 지구가 건강하게 잘 자랄 수 있도록 아빠로서 케어를 하는 것이 당연하다. 이 미션은 절대 바뀔 일이 없으며 의심의 여지도 없다. 그러다 보니 지구 양육과 관련된 어떤 일을 해도 마음이 편하고 나아가 재미있다. 내가 하는 일들이 절대 무의미하지 않으며 내 미션을 수행하는 데 있어 필요하다는 사실을 확신하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내가 짚어낸 차이점이 누구에게나 동일하게 적용되는 것은 아니다. 누군가는 회사일 혹은 사업에 명확한 미션을 가지고 있고 그것이 무엇보다 중요할 수 있으니까 말이다. 그저 나의 관점에서는 육아가 주는 미션의 확고함이 크게 다가왔을 뿐이다.
이렇게 생각을 정리하니 한결 머리가 맑아졌다. 미션을 따라 육아에 집중하고 그로부터 파생되는 여러 업무를 잘 수행한다면 육아휴직 기간은 그 언제보다 알찬 시기가 될 것이다.
그러니, 내일 하루도 무사히 잘 해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