덜 나쁜 좋소기업 찾기
글 제목부터 말이 안 되는 거 눈치챘죠? 맞아요. 좋은 좋소기업 같은 건 없어요. 좋은 기업이 좋소 소리를 들을 리가 있나요. 여기서 말하는 '좋은 좋소기업'은 '그나마 덜 나쁜 좋소기업'이라는 의미에요. 기왕에 좋소기업에 가야 한다면 어떻게든 최악은 피하자는 거죠.
2023년 기준으로 620만 개가 넘는 사업체가 있어요. 그중에 99%의 사업체는 종사자가 99명 이하에요. 2,530만 명의 근로자 중에 1,900만 명이 그 99%의 중소기업에서 일을 하고요. 좋소로 불릴만한 기업들은 대부분 99%에 들어가 있을 거에요. 피치 못할 사정이든 선택이든 간에 1,900만 명 중의 한 명이 되어야 한다면, 좋소기업을 피하는 것이 제일 좋고, 피할 수 없다면 그나마 덜 나쁜 좋소기업을 골라야 하겠죠.
좋소기업인지 아닌지 알아내는 건 쉽지 않은 일이에요. '좋소기업 거르는 법', '좋소기업의 특징' 같은 얘기들은 많죠. 문제는 어느정도는 몸담고 있어야 알 수 있는 정보들이 대부분이라는 거예요. 진급체계가 어떻게 되는지, 못쓴 연차를 연차수당으로 지급하는지, 대표이사의 가족이 근무하고 있는지, 직원들의 이직이 잦은지, 업무 프로세스는 서 있는지, 여름휴가를 휴일과 겹쳐서 쓰는지, 정치질하는 직원이 많은지, 구내식당의 밥은 먹을 만한지, 제대로 된 명절선물은 지급하는지, 상사가 퇴근 후에도 카톡을 남발하는지, 퇴사는 깔끔하게 되는지. 다녀보지 않고는 모르는 정보들이 더 많죠.
정보가 워낙 부족하기 때문에 빨간약과 파란약을 고르는 것과 마찬가지인 상황이 벌어져요. 운 좋으면 괜찮은 회사에 들어가는 거고 재수 없으면 좋소에 몸을 담게 되는 거죠. 좋소기업 인증제 같은 게 있으면 좋으련만 그런 건 없잖아요. 있다한들 인증받으려는 정신나간 기업이 있지도 않을 거구요. 덜 나쁜 좋소기업을 찾는 건 그래서 의미가 있어요. 100% 완벽하게 거를 수는 없지만 최소한의 기준을 둬서 최악을 피하는 거죠.
면접관의 수준 = 회사의 수준
면접관의 수준이 그 회사의 수준이에요. 이력서 보면서 '아, 이 학교 나오셨네', '이런 경력도 있으시네', '이런 자격증도 있구나', '나이가 많으시네' 같은 말을 하면 일단 감점 때리세요. 이력서를 처음 본다는 거니까요. 면접 자리에 가서야 이력서를 본다는 건 면접 준비를 하지 않았다는 거예요. 그건 대충 아무나 뽑아서 쓰자는 의식이 깔려 있다는 얘기죠.
면접 자리에서 업무와 관련 없는 이야기가 많은 것도 좋소다움이죠. 특히 사장이나 임원급의 결정권자가 면접관으로 와서 자신의 영광스러운 과거를 읊어대거나, 이성 관계에 대해 꼬치꼬치 묻거나, 시국과 정치를 이야기한다거나, 자식 자랑을 한다거나, 이에 질세라 함께 들어온 사람이 옆에서 맞장구치고 있거나 하면 좋소구나 생각하세요.
앞에 있는 지원자가 원하는 수준으로 일을 잘할 수 있는지, 회사의 문화와 어울릴지 묻고 따져보는 게 면접이에요. 묻고 따질 준비가 없거나 정보를 캐낼 생각이 없다는 건 일과 사람에 관심이 없다는 얘기에요. 이런 수준의 회사에서는 직원이 아닌 부속품 대우 받을 가능성이 커요. 부속품은 아무 때나 내킬 때 갈아버리면 그만이죠.
업무 시스템
업무분장서, 직무기술서, 업무매뉴얼이 있는지 확인하세요. 신입이라면 OJT(직무교육) 과정이 있는지, 경력이라면 인수인계 시스템이 갖춰져 있는지 추가로 확인하세요. 꼭 정형적인 형태가 아니더라도 상관없어요. 비슷한 목적의 시스템이 있는지 확인하는 거죠.
업무와 관련한 기본 시스템이 있다는 것은 일할 준비가 되어 있다는 얘기에요. 일할 준비가 안 된 회사는 중구난방으로 일을 시키죠. 한사람이 이 일도 하고 저 일도 하고, 같은 업무를 이 사람이 하고 저 사람이 하고, 퇴사한 지 몇 개월이 지난 선임자에게 전화를 걸어대고, 일하던 사람이 없어지면 다른 사람이 처음부터 다시 하고. 이런 식으로 일을 한다는 건 사람을 그냥 막 부린다는 거예요. 최소한의 체계도 없이 일을 하면 스트레스는 고스란히 직원 몫이죠.
면접을 볼 때나 근로계약서를 쓰기 전에 '나를 잘 써먹기 위한 시스템이 있는지' 회사에 물어보세요. '우리 회사는 그런 형식에 구애받지 않고 자유롭게 일을 하는 편입니다', '업무의 종류가 많지 않아서 그런 거 없이도 지금까지 잘해오고 있습니다' 같은 대답이 나오면 준비가 전혀 없다는 얘기죠. '안 그래도 필요한 상황이었는데, 입사하시면 한번 추진해 보시죠' 같은 소리가 나오면 뒤돌아볼 것도 없겠죠.
연봉의 내역
급여에 일한 대가 말고 다른 게 들어가는지 확인하세요. 연봉은 얼마로 합시다 해놓고선 그 안에 퇴직금, 상여, 수당 같은 것 다 때려 넣는 일이 좋소기업에서는 비일비재하거든요. 식비나 유류비 같은 것을 넣는 건 급여 일부를 비과세 처리하는 걸로 이해할 수는 있겠죠. 중소기업에서는 보통 그렇게들 해요. 하지만 다른 것들은 사전에 합의가 꼭 필요해요. 합의 없이 이것저것 다 때려 넣어서 연봉을 부풀리는 것은 사기를 치는 것과 마찬가지예요. 그런 기업은 상종을 하지 않는 게 좋아요. 경영자의 마인드가 빤히 보이잖아요? 특히 퇴직금을 연봉에 포함하는 기업에는 절대 가지 마세요. 사전에 합의했다는 이유로 불법까지 마다하지 않는 좋소기업의 대표주자니까요.
연봉의 규모
연봉이 동종 업계의 비슷한 사이즈인 기업에 비해 어떤지 확인하세요. 누가 봐도 급여 수준이 턱없이 낮다는 판단이 들면 거르세요. '회사가 성장하면 반드시 보상하겠다', '연봉은 업계보다 적지만 스톡옵션을 줄테니 퉁치자', '실력을 보여주면 언제라도 올려주겠다' 같은 얘기는 귀담아들을 필요 없어요. 몇 년째 그 소리를 하고 있었을 테니까요.
덤으로 연봉협상을 주기적으로 하는지도 물어보세요. '그런 거 없다', '딱히 정해진 것 없고 수시로 한다', 상황에 따라 다르다' 이렇게 말하면 관련한 시스템이 없다는 얘기죠. 회사 입장에서는 시스템이 없으니 안 해도 그만이에요. 그리고 그럴 확률이 좋소기업에서는 무척 높아요. 만약 대답을 않고 어물쩍 넘어가려고 하면 이렇게 물어보세요. '언제 연봉협상 마지막으로 하셨어요?'
근로계약서 미작성
어찌어찌 입사는 했는데 회사가 근로계약서 작성을 하지 않겠다는 의지를 보이면 얼른 나오세요. 회사가 근로계약서를 쓰지 않으려는 이유는 간단해요. 마음대로 부려 먹고 그에 대한 법적 책임은 지지 않겠다는 거죠. 근로계약서에는 근로자의 최소한의 권리가 기재되어 있어요. 그런 근로자의 권리를 보장하지 않겠다는 꺾이지 않는 마음으로 회사는 근로계약서 작성을 미루는 거죠. 법으로 규정한 근로자의 권리마저 인정하지 않는 기업은 좋소 중에서도 탑티어에요. 납득할 만한 이유가 없으면 인사하고 바로 나오는 게 현명하죠.
근로계약서의 내용
근로계약서 내용도 중요해요. 필수로 들어가야 할 내용이 빠져 있는지 먼저 확인하세요. 노동부에서 나온 표준 근로계약서에 보면 반드시 들어가야 할 내용들이 있어요. 근로계약 하기 전에 미리 봐두면 좋겠죠. 또, 협의하지 않는 내용이 들어갔거나 협의한 것과 다른 내용이 들어갔는지도 꼼꼼히 보세요. 면접 때는 연봉을 이렇게 주겠다, 직급은 이걸로 하겠다, 담당 업무는 이거다, 근무 장소는 어디다, 휴일 근무는 수당을 준다고 얘기해 놓고서는 막상 근로계약서를 쓰려고 보면 다른 얘기를 하는 경우가 있어요. 질이 안 좋은 좋소기업에서 자주 하는 짓이에요. 근로계약서로 옭아매 놓고 마음대로 부려 먹겠다는 속셈이 빤히 보이죠. 이런 회사에는 발을 들여놓는 순간 사람 대접 못 받아요. 처음부터 엮이지 않는 게 최선이죠.
차악이 차선이 되는 날까지
앞에서도 말했지만, 좋소기업은 직접 경험해봐야 좋소인줄 아는 경우가 태반이에요. 홈페이지에 있는 대범한 기업 비전과 미션, 면접관이 말하는 무지갯빛 사업 전망과 미래의 회사 모습은 있어 보이려고 하는 것에 지나지 않아요. 진짜 회사의 모습은 그 속에 들어가야 보이는 법이죠. 그래서 직접 몸으로 부딪쳐봐야 '아, 여기가 말로만 듣던 좋소구나' 하는 거예요.
그나마 사전에 걸러낼 수 있는 실마리가 있다면 활용해야죠. 빨간약 파란약 놓고 한쪽에 올인하는 식으로 직장을 구할 수는 없는 일이잖아요. 직장이라는 것은 한번 발을 들이면 빼기가 쉽지 않아요. '조금만 있으면 퇴직금 받을 수 있는데', '조금만 더 버티면 2년 채우는데', '다음 달이면 승진시켜 줄 거 같은데' 하다가 속은 속대로 썩고, 어중간한 커리어만 덜렁 남아서 이도 저도 못 하게 되죠.
좋소가 좋소지 다르면 얼마나 다르겠냐고 할 수도 있겠죠. 하지만 10개가 나쁜 곳보다는 5개가 나쁜 곳이 그나마 낫지 않겠어요? 살아보면 그렇거든요. 모든 것에서 최선을 선택할 수 없으니까 차선도 선택지의 하나가 되죠. 그런 차선도 고를 수가 없는 상황일 때는 차악이라도 수긍해야죠. 어찌 됐든 그래도 최악보단 나으니까요. 그렇게 차악을 거듭하다 보면 최선은 아니어도 차선까진 갈 수 있지 않을까요?
당신의 최선을 위한 첫째 걸음인 '최악 보다 차악'을 응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