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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성열 Nov 16. 2022

아무것도 안 하는 게 답일 때도 있다

진보와 혁신은 항상 합리적인가?

혁신이라는 미덕

진보, 개선, 혁신, 개혁. 언제부터인지 모르지만 이런 것들이 직장인들에게 행동양식의 근원처럼 여겨지고 있다. 제자리걸음은 퇴보와 다름없고, 새롭지 않으면 의미가 없다. 모든 성공과 합리적 결과의 밑바탕에는 진보와 혁신이 깔려 있어야 하며, 미래를 지향하기 위해서는 낡은 것을 깨부수는 개선과 개혁의 의식이 의무다. 거의 암묵적 룰이나 다름없다. 직장인 한 명부터 하나의 기업까지, 진보와 개혁 없이 더 나은 미래는 보장되지 않는다고 외치는 시대다. 


그 덕분에 지금의 상태를 유지하고자 하는 성향은 현상유지편향, 보수주의, 매너리즘 같은 부정적 의미에 갇혀 버렸다. 편리한 이분법 사고의 유혹을 이기지 못해서인지, 혁신의 미덕을 더욱 높이기 위해서인지는 알 수 없다. 그냥 그렇게 보편적 관념처럼 진보나 혁신 따위가 세상을 주관하고 있다. 


그 시각에서 보면 현재를 뒤엎어서 새로운 면모를 추구하지 않는 것은 편견과 게으름과 나약함의 증거이다. 성공한다는 보장이 없더라도, 한 걸음 더 진보하기 위해서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는 굳은 마음가짐이 직장인의 미덕이 된 지 오래다.


합리적 실패?

하지만 진보, 개선, 혁신 따위의 미래지향적 태도가 매번 합리적인 결과만 내놓지는 않는다. 때로 기존 질서의 전복을 바탕으로 한 혁신이나 개혁이 시스템의 혼란과 조직 내부의 갈등을 불러오기도 한다. 거창하게 '기업혁신' 수준까지 얘기할 필요 없다. 자잘한 시스템 붕괴나 혼란은 직장생활에서 흔한 일에 속한다. 내가 경험했던 몇 가지 사례가 있다. 


첫 번째 사례. 외부에서 영업담당 임원이 새로 영입되었다. 그 임원은 기술지원 부서의 업무보고와 업무지시를 직접 관장하는 시스템을 만들었다. 그전까지 기술지원 부서장이 총괄했으나 영업 담당 임원은 기술지원의 대응 속도를 높여야 한다는 이유를 댔다. 기술지원 부서의 직원들은 어떤 부분까지 보고를 해야 하고 지시를 받아야 하는지, 부서장에게도 보고를 하고 지시를 받아야 하는지 판단을 내리지 못해 갈팡질팡 했다. 게다가 하루아침에 뒷방 늙은이 취급을 받게 된 해당 부서장은 그 임원과 신경전을 벌였다. 


두 번째 사례. 부서장이 퇴사를 하면서 경영지원부서에서 일하던 기존 직원이 새로운 부서장으로 발령이 났다. 새 부서장은 기존 부서장이 했던 일일업무보고를 폐지하고 주간 업무보고로 대체했다. 매일 출근 직후 가졌던 짧은 부서만의 업무회의도 없앴다. 주간 업무보고가 있고 회의는 수시로 할 수 있는데도 기존 시스템을 고수하는 것은 오히려 버리는 시간이 많다는 논리였다. 


혁신의 실패 이유

두 사례의 결과는 이렇다. 첫 번째 사례의 경우 내부 커뮤니케이션은 엉망이 되었고 고객의 원성은 오히려 더 커졌다. 원래의 보고/지시 체계로 돌아오는 데는 석 달이 채 걸리지 않았다. 두 번째 사례는 즉시 결정하고 수행해야 하는 업무들이 지연되는 경우가 늘어났고, 부서원들의 정보공유 수준이 눈에 띄게 낮아졌다. 얼마 되지 않아 아침 업무회의가 다시 실행되었다.


이런 자잘한 혁신의 실패가 빈번하게 발생하는 것에는 이유가 있다. 완벽한 시스템이란 존재할 수 없다. 모든 시스템에는 단점이 있기 마련이다. 그 단점에만 집중하다 보면 모든 시스템은 진보, 개선, 개혁, 혁신의 대상이 될 수밖에 없다. 단점을 없애는 것은 좋다. 하지만 단점을 없애기 위해 시스템을 뒤집어엎으면 대부분의 경우 장점도 같이 사라진다. 이 점을 고려하지 않은 혁신은, 기존 시스템의 장점을 100% 대체할 수 있지 않는 이상 실패로 끝맺을 확률이 높다.


잘 돌아가면 그냥 두자

소규조수(蕭規曹隨)라는 말이 있다. 한나라를 세운 고조 유방이 죽고 나라의 제도와 법령을 마련한 승상(지금의 국무총리) 소하가 죽은 후 조참이 새롭게 승상 자리에 올랐다. 사람들은 조참이 혁신과 개혁의 정치를 할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조참은 그저 소하가 만든 제도와 법령에 따라서만 정치를 했다. 황제 혜제가 그 이유를 물었더니 조참은 지금 황제와 승상 보다 더 훌륭한 이전 황제와 승상이 만든 제도와 법령이 잘 돌아가고 있으니 굳이 건드리지 말고 쓰는 게 낫다고 답했다. 이 일화에서 나온 말이 '소하가 만든 법을 조참이 따른다'는 뜻의 소규조수다.


개혁, 혁신, 진보. 다 좋은 말이다. 하지만 강박처럼 여길 필요는 없다. 망치를 든 사람에게는 모든 것이 못으로 보인다고 했다. 모든 것을 혁신의 대상으로 삼으면 살아남을 시스템이 하나도 없다. 잘 돌아가는 것은 이유가 있는 법이다. 그 이유는 굳이 몰라도 상관없다. 때로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이 답일 때도 있다는 사실을 염두하자. 룰과 시스템으로 사람들을 이끄는 자리에 있다면 그 정도 여유는 꼭 챙기는 게 좋다. 조급하면 시야가 좁아지고 생각이 얕아진다. 얕은 생각의 혁신보다는 그냥 두는 게 나을 때가 직장에서는 의외로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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