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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명랑한 녀석 성휘 Mar 13. 2021

#27. 선입견에 미혹되다

스물여섯번째날:  곤사르(Gonzar)까지 28Km

[산티아고 순례길/ 프랑스길]

사리아(Sarria)부터 곤사르(Gonzar)까지 28Km


 조용하고 쾌적한 잠자리여서 그런지 일어나기가 버거웠다. 한겨울 뽀송뽀송하고 따뜻한 이불속에서 차가운 공기가 가득한 이불 밖을 벗어나기 싫어하듯, 침낭에 머리를 파묻고는 조용하고 쾌적한 공기의 이곳을 벗어나기가 싫어서 짧은 찰나에도 수많은 갈등이 스쳐 지나갔다.  더 잘 것인가 말 것인가? 쌓인 피로를 풀기 위해서는 중천에 해가 뜰 때까지 잠을 자고 싶지만 그래도 습관이라는 무서운 거라 버릇처럼 무거운 똥자루를 끌어올리며 출동 준비를 했다.
더 쉬겠다는 환이를 두고 혼자 걸어 나왔지만 몸이 천근만근 무겁기만 하다. 억지로 억지로 걸음을 걷는데 이건 마치 물에 젖은 솜뭉치처럼 묵직하고 둔탁한 발걸음이다.  좀비처럼 영혼 빠진 몸뚱이만 천천히 움직였다.
게다 사리아라는 동네가 제법 크다 보니, 이 동네를 빠져나가는 것도 꽤 오래 걸렸다. 그러다 보니 내 뒤에서 오랜 후에 출발한 환이에게 금방 따라 잡히고 말았다. 아무래도 나에겐 오랜 시간의 워밍업이 필요한 것  같아 환이를 먼저 보내고는 긴 시간  혼자 걸었다.





사리아 Sarria.
100km를 넘게 걸어야만 받을 수 있는 순례자 증명서를 위해서라면 시작점으로 삼기 좋은 마을이다. 그래서 많은 순례자들이 사리아에서부터 시작하기도 한다. 그래서인가 사리아에는 도시의 크기에 비해 엄청난 숫자의 알베르게가 존재하고 현재도 계속 새로 오픈하고 있다.
스페인의 수학여행팀이나 단체 순례자들도 이곳에서부터 시작하는지 신선한 공기를 가진 사람들이 그룹으로 떼 지어 다니는 것이 보인다.

사람이 단체가 되면 참 예의 없고 버릇없어진다. 그것은 국적을 불문하고 모두 그렇다. 단체로 움직이다 보니 홀로 움직이는 순례자들에게 위협이 되기 시작했다. 그래서인지 장기로 걸어온 여타 순례자들은 이제 막 시작한 뉴페이스들에게 불만을 갖기 시작했다.
'고작 100킬로 걷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겠느냐', '편한 호텔과 단체버스로 이동하는 것이 순례자의 태도라고 할 수 있느냐', 그리고 어린 학생들로 구성된 수학여행 순례자들에게는 '어린 학생들이 놀러 온 거처럼 그리 다니니 다른 순례자들에게 민폐를 주고 있다'와 같은 각종 불만들이 넘쳐났다.

  가급적이면 나는 불만을 가지지 않으려고 노력을 했으나 단체 순례객들이 위협적인 동작으로 내 주변을 걸어갈 때면 의기소침해지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이건 마치 경차를 타고 고속도로를 달려가는데 옆에 아주 큰 화물트럭이 쌩하고 지나가는 느낌이다. 그러니 무리 지어오는 그룹은 그 존재만으로도 주눅이 들었다.
그리고 또 하나, 이제 막 시작하는 순례자들에게는 신선한 에너지가 넘쳐났다. 그에 비해 난 햇빛에 변색된 옷과 피로에 찌든 몸뚱이, 푸석해진 피부와 머리카락, 느리고 느려 터진 발걸음으로 가고 있으니 의기소침한 마음에 초라함을 더했다.

한참을 그리 걷고 있는데 경쾌한 발걸음의 한 남자가 지나간다. 한눈에 딱 봐도 중남미에서 온 사람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키는 별로 크지 않지만 다부진 몸에 긴 팔다리, 짧은 곱슬머리, 중남미인 특유의 탄력이 나는 몸놀림. 그리고 아찔하게 코끝을 찌르는 향긋한 남자 향수 냄새.
그의 외향보다 그의 남자 냄새가 내 속의 변태 감성을 깨웠다.
'오케이, 이 남자다!' 향기 좋은 이 남자를 쫓아가기 위해 난 속도를 올리기 시작했다.
난 향수 바르는 남자가 좋다. 아니 남자 향수가 좋다. 그래서 가끔 남자 향수를 바르기도 한다.
때때로 지하철에서 향기가 좋은 남자를 발견하면 그 옆에 서서 이동하는 내내 그의 향기를 즐긴다. 외향 따위는 보지도 않는다. 그냥 향기를 즐기며 콧구멍을 벌렁거릴 뿐이다.
  그렇다 난 향기 도착자이고 냄새 변태이다.
그 향기 좋은 라틴남자를 쫓아가기에는 그의 속도가 너무 버거웠지만 일시적이라도 그를 쫓아가느라 덕분에 제 속도를 찾기 시작했다. 


이날 처음 본 미국 할아버지와 같이 한 아침식사



 갈리시아 지방의 날씨는 참 고약하다고 했는데 그 사실을 증명이라도 하듯 비가 왔다 안 왔다 미친년 널뛰듯 날씨가 변덕이 심하다. 아침식사를 하러 들어간 식당에서 밥을 먹고 나오려니 비가 온다. 타이밍 한번 기가 막히게 안 맞는다. 결국 판초를 꺼내 입고 걷기 시작했다.
내가 밥 먹고 일어난 자리에 누군가 두고 간 물통을 발견했는데 그 누군가의 얼굴을 희미하게 기억하기에 물통을 돌려준 요량으로 들고 나왔다. 물이 꽉 차 있어서 가방의 무게를 더했지만 혹시라도 만나게 될 그 물통 주인이 갈증을 느낄까 봐 차마 물을 버릴 수가 없었다.  물통을 들고 하루 종일 주인의 행방을 찾았지만 끝끝내 찾을 수가 없었다. 나의 헛짓에 가방만 무거워졌다.





 오래간만에 비다. 카미노 초반, 수비리에서 팜쁠로나로 이동할 때 비를 맞은 것 이외에는 한 번도 비가 오지 않았으니 난 제법 날씨에 운이 좋은 편이었다.
빗속에 걸음을 걸으니 뭔가 기분이 꽁냥꽁냥 좋아진다. 어릴 적에, 감수성이 넘쳐나던 십 대 시절에는 비를 참 좋아했었는데, 어른이 되다 보니 비라는 것이 걸리적거리는 존재가 되어버렸다. 비 올 때 뭐 입고 나갈지 난감하기도 하고, 교통체증에 짜증이 나기도 했기에 내가 비를 좋아했다는 사실조차 잊어버렸는데....
  교통체증의 걱정 없이 걷고 있는 지금 나뭇잎 사이로 떨어지는 물 냄새와 풀냄새의 싱그러움에 마음과 발걸음이 가벼워졌다.
중간중간 아는 얼굴의 한국 처자들을 만나 같이 걷기도 하고 카페에서 커피를 나누기도 했다.
그러다 비가 더 세차게 내리기 시작했을 때, 걸음을 멈추기로 하고  한 작은 마을의 코너에 있는 식당에  들어가 바에 앉았다.
추위가 느껴져 따뜻한 우유가 담뿍 들어간 카페라테를 시켜놓고는 멍을 때리고 있었을 때 식당 들어오는 엠마가 나를 발견했다. 그리곤 그녀는 나의 옆자리에 앉았다. 그녀의 얼굴을 봤을 때, 난 너무 걱정이 되었다.
  얼굴이 확 가버렸기 때문이다. 가뜩이나 왜소한 몸은 더 작아 보였고 얼굴은 피골이 상접하도록 삐쩍 말라서 해골처럼 변해있었다.  며칠 전 식중독에 걸렸는지 하루정도 아주 힘들어했는데 그 이후로는 얼굴 상태가 점점 안 좋아졌다. 


"괜찮아?"
"응, 괜찮아"
"얼마나 걸어왔어?"
"30km"
이제 겨우 10km 걸어온 나에 비해 그녀는 벌써 30km를 걸어왔다고 했다.
"뭘 먹기는 제대로 먹고 다니는 거야?"
"응. 이제야 좀 먹기 시작했어"
그녀는 며칠 전에 체한 이후로는 제대로 된 곡기를 먹지 못한 것 같다.
 식당의 메뉴를 보니 렌틸콩 수프가 있길래 그녀를 위해 수프를 주문했다. 그리고 난 케이크와 커피 한 잔을 더 시켰다.

"더 갈지 여기서 멈출지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
"30km나 걸어왔다며, 멈춰야 하는 게 낫지 않을까?"
"이제부터는 내리막길이니깐 더 가도 무리하지 않을까 하는데...."
"몸 생각 좀 해, 그래서 되겠어?"

 더 갈지 이곳에서 쉴지 갈피를 못 잡는 그녀가 난 걱정이 너무 되었다. 그래서 잔소리를 늘어놓기 시작했다.
"엠마야, 너 혼자잖아. 너 몸을 아는 것은 너밖에 없어. 너 여기서 쓰러지면 누가 너를 돌봐주겠어. 그리고, 네가 영어를 잘하는 것을 알지만 여기 스페인 땅이야. 스페인 사람들 영어 잘 못해. 말도 안 통하는 곳에서 아프면 어떡할 거야?"
"나 스페인어 알아들어, 루마니아 말과 비슷해서 알아는 듣는 다니깐"
그녀는 자존심을 세웠다. 그녀가 스페인어를 알아듣는다는 것은 과장이다. 스페인어든 루마니아어 든 라틴어에서 유래가 되었는지 어미가 비슷하여 일맥상통하는 부분이 있다고는 들었다. 그렇지만 그냥 상황 보고 추측하는 수준이지 알아듣는 것은 아니다. 그냥 우리가 자막 없이  한국어와 비슷한 단어들이 많은 일본 드라마를 봐도 대충 뭔 짓거리를 하는지 눈치채는 수준으로 알아듣는 것뿐이다. 그리고 그녀는 카미노 길을 걸으면서  스페인어 공부를 막 시작했다. 그래도 그녀는  자존심을 세웠다.

"너만 알아들으면 뭐 해, 너의 병명을 제대로 말할 수도 없잖아. 의사소통도 제대로 못하면서 아프면 어떡할 거야? 너를 돌봐줄 사람은 여기에 아무도 없어. 네가 네 몸하고 대화를 해야지 그리 고집만 피우면 어쩔 거야? "
내가 그녀에게 잔소리를 늘어놓고 있는 이유는 그녀의 해골같이 변해버린 얼굴 때문만은 아니다. 그건 바로 그녀가 '암 환자'였기 때문이다.








  엠마는 유방암을 앓았다고 했다.
몇 년간 약물치료와 방사선 치료를 했지만 진전은 없었고, 끝내 유방 절제 수술을 받았다고 했다. 그렇게 암을 극복하고는 까미노 길에 올랐다. 완치는 되었고 휴식기간을 가졌다고는 하나 저 가려린  몸으로 이 먼 길을 걷는다고 하니   대단한 여자이다. 정신력도 강하고 용기도 대범한 여자이다. 그 작은 체구로 그 모든 것을 맞서 싸우는 작은 거인이라고 할 수 있겠다.
그렇지만 지금은 너무 오버하는 것처럼 보인다. 본인이 강하다는 것을 보여줘야 직성이 풀리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지금은 고집보다는 현명한 대처가 필요할 때 같았다.

그 식당이 알베르게도 겸업하고 있어서 그녀가 그곳에 숙박을 하려 할지 말지 주저하고 있었다. 결국 작은 목소리로 그리고 아주 천천히 느린 속도의 스페인어로 떠듬떠듬 주인장에게 예약을 문의했다.
비 때문에 손님이 밀어닥쳐 정신없는 주인장에게 그녀의 목소리 따위는 들리지도 않았고, 그녀가 떠듬떠듬 스페인어 단어를 조합해서 말하는 것을 기다려 줄만큼 주인장의 인내심은 밀려오는 주문에 사라졌다.
"이곳 주인은 나를 받아줄 생각이 없나 봐, 다시 걸어가야겠어"
엠마는 가끔 신파 드라마에 나오는 비련의 여주인공처럼 청승을 떨었는데 지금 내 눈앞에서 그녀의 청승 게이지가 하늘을 찌르는 것이 보인다.
"뭔 소리야, 도대체 이 몸을 하고 어디로 더 가겠다고. 무리하지 말고 차라리 푹 쉬어.  네가 지금 제일 필요한 것은 휴식이야. 그리고 이 집 순례자를 위한 저녁 메뉴가 아주 맛있데. 여기서 든든히 많이 먹고 푹쉰 다음에 내일 많이 걸으면 되잖어"
이 해골 같은 얼굴을 하고 오늘 또 길을 나선다면 길에서 초상을 치를지도 모를 일이었다.
결국 목소리 크고 말이 속사포로 빠른 내가 주인장을 불러 순식간에 그녀의 투숙 절차를 밟았다.

비가 좀 잦아들었기에 출동을 하기론 한 나는 그녀의 알베르게 앞에서  그녀와 헤어졌다. 헤어지면서도 걱정이 너무 되어서 잔소리를 늘어놨다.
"몸조심해야 돼, 너무 무리하지 말고"
알았다고 인사하는 그녀를 돌아보고 또 돌아봤다. 걱정스럽다. 여태 지나쳤던 까미노 길 위의 무덤들, 길에서 죽어간 순례자들의 무덤들이 머릿속으로 스쳐 지나갔다. 극단적인 생각일지는 모르겠지만 내가 아는 얼굴이 그중 하나가 되는 것은 원치 않는다.
그동안 그녀가 나를 불편하게 만드는 일이 많았지만 이때까지만 해도 나는  그녀를 걱정하는 마음이 한가득이었다. 





 게으름을 피워서 인가 오후 3시가 훨씬 넘어서야 포르토마린Portomarin에 도착했다. 이곳 포르토마린도 제법 큰 도시이다. 이곳에서 지낼까 하다가 이곳에도 사리아처럼 사람이 많을 거라 예상이 되니  별로 지내고 싶지가 않다. 게다 다 늦게서야 몸이 예열되었는지 체력이 올라오기 시작했다. 시간이 많이 늦긴 했어도 다음 마을로 가야겠다며  다시 길을 나섰다.

포르토마린을 벗어나자 촉촉한 공기를 품은 오솔길을 가진 언덕이 나오기 시작했다. 다음 마을인 곤사르까지 앞으로 8km를 더 가야 했는데 이런 이쁜 길을 올라간다고 생각하니 기운이 펄펄 날기 시작했다. 갈리시아 지방의 산은 정말이지 한국의 산을 많이 닮았다. 오르막 내리막이 지루하지 않게 배치되어있고 나무 군락지도 뭔가 한국의 종류와 많이 닮아있다. 예전에 한국에서 체력과 다이어트를 위해 트레킹을 자주 했었는데 그때의 숲과 나무들이 생각이 나서 기분이 왠지 좋았다. 우중충한 날씨와 가을 날씨 같은 차가운 공기도 기분을 좋게 했다. 게다가 그 길에 아무도 없었다.
조용하고 촉촉한 숲 속 길을 오직 나 혼자만이 걷는다고 하니 기분이 쫄깃쫄깃 너무나 좋다.
그래서 신나게 걸었다. 한두 방울 떨어지는 비를 맞으며 노래를 흥얼거리며 걸어갔다.
그 날씨, 그 공기, 그 냄새..
어쩜 그 길이 내가 까미노 길에서 제일 좋아하는 길인지도 모르겠다.

곤사르에 도착하기도 전에 비가 세차게 오기 시작했다. 마음 같아서는 곤사르를 지나 다음 3.5km 떨어진 다음 마을까지 가고 싶었는데, 그놈의 비로 어쩔 수 없이 걸음을 곤사르에서 멈추기로 했다.
28명 지내는 공립 알베르게에 다행히 자리는 남아있었다.
샤워를 하고 빨래를 세탁기에 올려놓고는 알베르게 앞 식당에 갔다.
식당에 들어가니 아는 얼굴들 또 있다.  하비안드레다.





"뭐야? 너네들 여긴 어쩐 일이야? 오늘 Portomarin에서 지낸다고 하지 않았어?"
"뭐 그냥 여기까지 왔지"
까미노 길에서 자주 부딪히는 것이 늘 있는 일지만 변덕이 죽 끓는 듯한 나의 하루 걸음걸이와 똑같이 다니는 이 두 아재의 인연은 질기고도 질기었다.
"혹시, 나한테 위치 추적기 달아놓은 거 아니야?"라는 나의 말에
"네가 늦게 왔으니 네가 우리한테 달아놓은 거겠지"
오늘은 아무도 모르는 이들과 밤을 보내겠다는 예상과는 달리 아는 면면들이 있어 묘하게 안심이 되었다.
게다 한쪽 구석 테이블에서 스파게티 면발처럼 길쭉한 브라질할배들이 나를 반겼다. 여행 초반부터 나를 아주 티 나도록 이뻐해 준 할아버지들이다. 할아버지 3인방과 그중 한 할아버지의 아들이 같이 다녔는데 그중 두 분은 교수님이라고 했다. 그리고 그 교수님 중 한 분은 한국에 교환교수로도 한 학기 다녀오셨다고 했다. 나의 뼈가 으스러져라 안아주시는 할아버지들 품에서 포근함이 느껴진다. 






하비안드레와 함께하는 저녁식사.
핸드폰에 식당 와이파이를 연결하니 문자메시지가 촤르르 뜬다. 어제부로 스페인의 유심 카드의 유효기간이 만료되어 이젠 와이파이로만 인터넷을 연결할 수 있었다.  그중 엠마에게 온 문자도 있다. 그녀는 한 번도 나에게 문자를 보낸 적이 없었다. 오늘 그녀의 문자기 낯설긴 하나 의중을 알 수 있다.
아까 낮에 만났을 때도, 내가 어디까지 가며, 하비안드레는 어디까지 가는지 형사 취조하듯 그녀는  나를 조졌다. 그냥 궁금해서 묻는 투가 아닌 신경을 곤두세운 질문이기에 나도 부담스러웠다. '확실히는 모른다'라고 대답했지만 (나도 내가 어디로 갈지 모르는데 어찌 알겠는가?)  대개는 그들이 어디 있는지는 그들이 먼저 도착해준 뒤에 나 나에게 문자를 주는데 심 카드가 만료된 이 시점에는 서로 연락하는 방법은 와이파이가 터지는 알베르게나 식당밖에 없었다.

예전부터 느꼈는데 그녀는 내가 그 두 아재와 다니는 것에 엄청나게 신경을 썼다.  오늘도 그런 그녀의 태도에 사실 짜증이 살짝 났다. 난 사람 관계가 경쟁 모드로 변하면 피한다. '즐길 수 없으면 피하라'라는 것이 나의 모토이다.  적당한 승부욕이 있어야지 사람이 발전도 있는데, 먹는데만 승부욕을 부리니 체중만 발전이 있고 나머지는 그냥 꽝이다.
신경 쓰는 것 자체를 싫어해서 경쟁 모드로 인해 머리가 아픈 것보다 피할 수 있으면 피해서 마음의 평화를 얻고 사는 사람이다. 그런데 엠마는 나와 경쟁을 하려 했다. 그전부터 그런 눈치가 보였지만 나 스스로가 모른척했다. 그리고 마음 한편으로는 엠마가 그렇게 유치한 사람이 아니라고 그녀를 두둔하고 변명했었다.
아까 포르토 마린을 지나치고 온 것도, 사실은 마음 한편으로는 두 아재를 부딪히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난 그들이 포르토마린에 지낼 거라고 예상했었다) 아재들과 부딪혀서 그녀에게 또 취조를 당하느니 혼자 있는 게 더 편하다고 생각했기에 치고 나온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그녀의 문자에서 그녀의 민낯을 알아버렸다.
내가 '나는 곤사르에 있고, 지금 그 두 신사 분과같이 있다'라고 답장했을 때, 그녀에게 폭풍 같은 문자가 도착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문자에는 잔뜩 비꼬임도 있었다. 그리고 난 병신같이 뭔가 변명을 하고 있었다. 그럴 의도는 아니었는데 두 아재를 만났다고, 그리고 이때까지도 난 그녀의 안부를 걱정하는 답문을 보내고 있었다.

그런데, 안드레의 말 한마디가 나를 빡치게 했다.
"엠마 말로는 너 때문에, 네가 못 가게 해서 지금 갇혀있는 기분이라는데?"
무슨 타자 신공인지 그녀는 나와 안드레에게 동시에 문자를 보냈는데 (하비는 SNS를 하지 않는다) 엠마 안드레에게 보내는 문자의 내용은 나를 교묘하게 깎아내리는 것이었다. 
해골바가지 같은 몰골이 걱정이 되어 사람 살리는 심정으로 안위를 염려해주었더니 돌아오는 것은 나를 향한 원망과 험담뿐인 것이었다.

그랬었다. 그녀는 지난날에도 계속해서 사람들 앞에서 나를  교묘하게 깎아내리고 면박을 주고 있었었다. 그런데도 난 계속 모른척했다. 대충 눈치를 깠는데도  그녀의 인성이 그렇게 바닥이 아니라며 스스로에게 그녀를 두둔하고 있었던 것이었고, 그녀의 까임을 그냥 당하고 있었던 것이다. 뭐 질투야 인간 본능이니 어느 정도 이해를 해준다마는 그녀의 행동은 질투 이상의 시기와 집착이었다. 


남녀가 같이 있는 자리. 여자 1호가 남자 1호가 맘에 드는데, 남자 1호는 여자 2호에게 호감이 더 가는 눈치일 때, 여자 1호가 한마디 건넸다. "남자 1호 오빠, 여자 2호 정말 쌍꺼풀이랑 코 성형수술 잘 된 것 같지 않아? 너무 이쁘지?"
여자 2호가 이쁜 것은 의느님의 결과물이라는 것을 '이쁘다'라는 포장과 함께 돌려 깎기를 하는 것이다. 비유를 든 것뿐이지만 실제로 이런 유사한 돌려 깎기를 우린 주변에서 자주 볼 수 있다.

엠마도 그랬다. 뭔 소리인지 기억이 잘 안 나지만, (사실 그녀가 나에게 한 악의의 말들과 행동들을 미주알고주알 다 나열하고 싶지만 참으련다) 그녀는 이 두 아재나 조던 앞에서 나를 은근히 돌려 깎기 해서 나를 끌어 내려야지만 직성이 풀렸었는데, 눈치가 둔치인 나는 당시엔 그냥 마음만 불편할 뿐 무엇 때문인지 꼭 집어서 몰랐었다.
'그녀는 암 환자이었다', '그녀는 암을 이기고 온 멋진 여자다'라는 선입견에 싸여 그녀가 나에게 상처를 주는 동안에도 그녀를 두둔하고 있었던 것이다.
'암을 이기고 온 그녀가 그럴 리는 없어', '그런 멋진 여자가 그런 유치한 의도를 가지고 나를 대하진 않았을 거야'

가끔 우리는 단순한 이분법에 속고 산다. '부자는 못된 짓을 많이 해서 부자이다', '가난한 자는 약자이고 불쌍한 사람이다' 같은 동화 속에만 나오는 획일화된 이분법 말이다.  그래서 성실하게 돈을 벌어 부자가 된 사람들을 못된 사람이라고 매도도 하고, 범죄자인데도 가난하다면 약자로 취급하는 오류를 범하기도 한다.

나도 그랬다. 암을 이겨냈사실과 인성과는 전혀 상관이 없는 것인데 난 그녀가 암을 이겨냈으니 인성을 좋을 것이라 착각했고, 그녀가 계속 나에게 싹수없는 행동을 할 때에도 내가 뭔가 오해했다고 생각한 것이다. 금방이라도 부서질 것 같은 작고 여린 몸매의 그녀는 천사 같은 얼굴을 하고는 나의 마음에 상처를 계속해서. 그것도 집요하게 주고 있었는데도 내가 분위기 파악도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던 내가,  눈치 없고 둔감한 내가, '그녀가 나를 싫어한다'라는 사실을 확실히 안 것은 목적지인 산티아고에 도착했을 때였다.
시간의 흐름상 이 사건은 산티아고에 도착한 날에 기술해야겠지만  나의 찬란한 산티아고의 에피소드에 그녀의 험담을 읊어대는 게 부정 타는 일이라 여기서 기술하겠다.
내가 산티아고에 입성하는 날 그녀도 시간 간격을 두고 도착했다. 그녀가 우리를 따라잡기 위해 얼마나 고군분투했는지는 도착한 날 엉망이 되어버린 그녀의 모습으로 예측할 수 있었다. 
아, '우리'가 아니지. 그녀는 하비안드레와 함께 산티아고에 입성하려고 고군분투한 것이리라.
  이른 아침부터 난 종착지인 산티아고에서 하비안드레를 만났고, 한참을 방황하며 놀고 있었을 때, 파김치가 되어 온 엠마를 길에서 만났다. 그리고 바로 산드라여수를 만나 12시 순례자를 위한 미사를 드리려고 기다리고 있었다.

그때 엠마가 나에게 말을 건넸다.
"나 아까 니 한국 친구들 만났는데, 너 그들한테 가봐야 하는 거 아니야?"
"어? 한국 친구들? 오늘 도착하는 한국 친구들은 아무도 없는데!"
"아니 봤어, 니 한국 친구들 말이야, 아무래도 넌 그쪽으로 가봐야 할 것 같아"
"오늘 오는 내 한국 친구들 아무도 없어"
내 뒤에 오는 팀 중에 가장 빨리 오고 있는 한국 친구들은 다음날 도착하기로 한 귀염둥이 삼 인방밖에 없었다. 나머지는 다 이틀 간격 삼일 간격으로 거리가 벌어져있었다.
"아니 봤다니깐, 여자 두 명. 나랑 같이 산티아고에 왔어. 아무래도 넌 그쪽으로 가봐야겠다"
누가 도착했든 간에 내가 누구와 같이 있는 것은 내 선택인데 그녀는 자꾸 나를 그쪽으로 가보라고 등을 떠밀었다.
내가 아니라고 계속 말해도 그녀는 집요하게 나를 몰아세웠다.
만약 나라면, 아니 보통의 순례자라면  그리고  다른 순례자를  봤다면 같이 성취감을 나누고자 모두 함께 만나자고 제안했을 텐데, 그녀는 나를 등 떠미는 형색으로 볼 때 그녀는 내가 싫은 것이다. 나를 떼어 놓고 싶은 것이다. 그러니깐 하비안드레하고만 산티아고의 입성을 축하하고 싶었던 것이다.

집요하게 있지도 않는 내 친구에게 가라고 나의 등을 떠밀 때, 보다 못한 하비가 한마디 했다.
"아, 나 그 두 여자 친구들 알아. 그 친구들은 대만에서 온 순례자야"
"아, 그래? 미안"
  순간 처음엔 엠마가 '인종차별주의자'가 아닌가 의심했었다. 동양 애들은 동양 애들하고 만 놀아야 된다고 금을 그어 놓는.... 그래도 그녀가 그 정도로 바닥인 친구라고는 믿고 싶지 않다.
그냥 내가 싫은 것이다. 자신을 잘 챙겨주고 배려해주는 두 아재들을 자신만 소유하고 싶었던 것이었고, 나를 그녀의 경쟁상대로 삼았던 것이다.

그녀의 실체를 알아버린 그 이후, 그녀는 까미노 길에서 내가 좋아하지 않은 유일한 순례자가 되었다. 싫어한다고 표현하기에는 내 카미노가 더러워질 것 같다. 그냥 좋아하지 않는다고 표현하겠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선한 마음으로 까미노 길에 오른다. 그렇지만 순례길 역시 사람이 있는 길이다.  모든 것이 다 그러하겠지만 사람이 있는 곳엔 사랑과 믿음도 있고 반대로 음모와 배신도 있다. 그녀가 나에게 보여준 시기와  증오는  나의 까미노에 살포시 상처를 주었다.
그리고 그것엔 내 책임도 있다. 선입견에 내가 속지만 않았다면 처음부터 엠마의 시기와 질투를 제압할 수 있었을 것이다.
선입견에 미혹당한 내 실수가 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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