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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민규 Jun 30. 2018

내 삶의 주인이 된다는 것

죽음, 삶, 그리고 행복에 관하여 (2)

죽음, 삶, 그리고 행복에 관하여

2부: 삶


대한민국이 속한 F조는 '죽음의 조'였다. F조에 속한 팀들을 살펴보면 전 월드컵 우승팀인 '세계 최강' 독일, 북중미 최강자이자 월드컵 '16강 단골손님'인 멕시코, 그리고 북유럽 '전통의 강호'로써 큰 체격을 앞세워 특유의 선 굵은 축구를 선보이는 스웨덴까지, 조 '최약체'로 평가받는 한국 입장에서 애초에 쉬운 상대라고는 없었다. 조추첨이 끝났을 당시 전문가들 사이에서 "1승도 쉽지 않은 조 편성"이라는 비관론이 나온 게 이상하지 않은 이유다.


그리고 우리가 우려했던 상황은 가혹한 현실이 되어 다가왔다. 한국이 1, 2차전에서 스웨덴과 멕시코에게 2연패를 당하며 F조 꼴찌로 떨어져 버린 것이다. 그 과정 동안 대표팀을 향한 국민들의 비난은 거세져만 갔고, 특정 선수에 대한 원색적인 야유는 도를 넘어선 인신공격 수준까지 이르렀다. 설상가상으로 벼랑 끝에 몰려있는 대표팀의 F조 최종전 상대는 16강행을 확정 짓기 위해 총력을 다할 명실상부 세계 최강의 팀이자 디펜딩 챔피언인 독일이었다.


FIFA 랭킹 1위 대 FIFA 랭킹 57위 팀의 경기였고, 몸값 총액이 약 1조 1432억 원에 달하는 팀과 몸값 총액 약 1099억 원의 팀의 대결이기도 했다.



이 승부에서 ESPN이 자체 알고리즘을 통해 계산한 한국의 승률은 고작 5%에 불과했다. 수치의 비교만으로도 확연히 보이는 열세가 너무 냉정하리 만큼 분명해서였을까, 아니면 괜한 기대 뒤에 찾아올 실망이 두려워서였을까, 우리 국민들 중 그 누구도 섣불리 16강 진출에 대한 기대를 겉으로 들어내지 않았다. 그저 질 때 지더라도 한국 축구가 가지고 있는 투혼을 마지막 경기에서 후회 없이 발휘해주기를 바란다고만 연신 되뇔 뿐.


하지만 이런 상황 속에서도 우리 대표팀은 '기적'을 이뤄냈다. 최종 스코어 2 대 0. 월드컵에서 아시아 팀에게 단 한 번도 패배한 적이 없는 축구 강국 독일을 대한민국이 격침시킨 것이다. '최약체'로 평가받던 팀이 이루어낸 그야말로 '통쾌한 반란'이었다.


독일전 골을 넣고 환호하는 대표팀 선수들과 스텝들


이 믿을 수 없는 결과에 우리 국민들뿐만이 아니라 온 세계가 열광했다. 한 외신은 "한국의 퍼포먼스는 월드컵 존재 이유를 보여준다"라고 평가했고, 또 한 번 전 세계 축구팬들은 축구를 통해 말로는 설명할 수 없는, 수치로는 계산할 수 없는, 그 묘하고도 헤아릴 수 없는 '힘'을 목격했다. 축구공은 둥글기에, 이처럼 축구에선 가끔 누구도 예상치 못했던 일이 일어난다. 이런 짜릿함과 감동을 느끼기 위해 이맘때면 우리는 성별과 종교, 언어와 문화, 심지어는 사상과 체제까지 초월해 축구에 열광하게 되는 것이다.


조현우의 눈부신 선방들, 그리고 경기를 마무리 한 손흥민의 이를 악문 전력질주까지. 우리가 그 당시 느꼈던 그 강렬했던 전율은 앞으로도 기분 좋은 여운으로 남을 것이다. 또한 우리 대표팀이 이번 대회에서 세운 놀라운 기록들 역시 역사로 남아 오랜 시간 동안 우리에게 회자될 것이다. 하지만 이게 다는 아니다. 이번 월드컵은 이런 빛나고 황홀한 순간들만 남긴 게 아니라, 우리 사회의 어둡고 추악한 면들도 분명히 드러냈다. 그런데도 빛만 보고 그림자는 외면하는 건, 수비나 압박은 나 몰라라 하고 공격만 하려는 '병장 축구'와 다를 바 없다. 




우리는 축구에 열중하다 보면 이중잣대를 들이미는 스스로와 종종 마주하게 된다. 적어도 나는 그렇다. 우리 선수의 거친 태클은 전술의 일부인 반면, 우리 선수를 향한 상대 선수의 거친 태클은 곧바로 인성의 문제로 결부시킨다. 또 우리 팀에게 유리한 심판 판정은 경기의 일부라고 대수롭지 않게 넘기지만, 우리 팀에게 불리한 심판 판정은 경기의 일부는커녕 경기 자체를 망치는 주범이기 때문에 경기가 끝나고 나서도 집요하게 물고 늘어진다. 그리고 이러한 잣대는 꼭 상대팀에게만 국한되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가끔 우리 선수들과 감독, 그리고 팀 전체에게도 이러한 다른 잣대를 적용한다.


"밥 먹고 공만 차는 놈들이 저것밖에 못해?"


"내가 이런 플레이를 보려고 4년을 기다렸나."


축구를 보다 보면 종종 무심코 내뱉게 되는 말들이다. 하지만 이런 말을 하는 우리 대다수는 밥 먹고 공만 차는 게 얼마나 힘들고 고된 일인지 상상조차 하지 못한다. 또 우리는 사실 그들의 플레이를 볼 월드컵만 기다리며 4년을 보내지도 않는다. 정작 지난 4년을 이 순간만을 기다리며 준비해온 건 선수들이고, 우리는 그동안 학업에 몰두하고, 연애를 하거나, 취업을 준비하며, 각자의 삶을 살아왔다. 우리들은 단지 월드컵이라는 축제로 힘들었던 과거를 위로하고, 여전히 힘들기만 한 현재에서 도피하려 했던 것뿐인데, 그것마저 뜻대로 되지 않자 선수들을 향해 울분을 토해내고 마는 것이다.


"대한민국축구협회를 해산해주세요."


"축구선수 장현수의 국가대표 영구제명 및 축구협회 비리 전수조사 청원합니다."


월드컵 기간동안 가장 많은 비난을 받은 장현수 선수를 위로하는 손흥민 선수 (좌) 신태용 감독 (우)


24일 멕시코전에서 패하자 청와대 국민청원 게시판에 올리온 청원 글이다. 심지어 ‘장현수 가족까지 대한민국에서 추방해 달라’는 등의 극단적인 청원 글도 있었다. 장현수뿐만이 아니다. 신태용 감독은 물론 김신욱, 구자철, 이용 등 스웨덴전과 멕시코전에서 부진했던 선수들의 이름은 모두 오르내렸고, 1, 2차전의 활약으로 전국민적인 주목을 받은 골키퍼 조현우 선수의 가족마저 비난을 피하지 못했다.

"몇 사람의 아기에 대한 안 좋은 댓글들을 건너 건너 듣게 되면서, 아기가 나중에 글씨를 알게 되면 상처가 될까 봐 저의 700개 정도의 수년간 일상을 담은 일기와 같은 것들을 지우게 되었습니다... 엄마의 마음으로 선택한 것이니 너그럽게 이해해 주세요."

이는 조현우 선수의 아내가 스웨덴 전 이후 본인의 SNS 계정에 올린 게시글 중 일부다. 아내분이 언급한 안 좋은 댓글이란, 놀랍게도 사진 속 본인의 외모에 대한 지적은 물론 생후 8개월밖에 되지 않은 아이의 외모를 비하하는 글이었다고 한다.


경기를 보면서 반사적으로 나오는 비아냥거림에서부터 이러한 극단적이고 비뚤어진 분노의 표출까지, 어째서 평소에는 '힐링'과 따뜻한 격려의 말들을 애타게 갈망하는 우리들이 국가를 대표하러 타국으로 간 어린 선수들에겐 그토록 잔인하고 엄격한 잣대를 들이미는 걸까?




이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우리의 의식 구조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사실 우리 모두에겐 태어날 때부터 우리 의식 깊숙이, 두개골이라는 왕좌 중앙에 떡하니 자리 잡고 앉아 군림하는 '신'이 하나 있다. 바로 내가 이 우주의 중심이라는 '확신'이다. 내 부모. 내 기분. 내 직업. 내 친구. 내 목표. 내 인생. 이처럼 내가 보고 자각하는 모든 체험과 감정의 절대적 중심은 '나 자신'이다. 그렇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의 경험은 나에게 전달되지 않는 한 존재하지 않는 '환상'과도 같다면, 내 체험과 감정은 직접적으로 실존하는, 그래서 너무나도 생생하게 느껴지는 '현실'이다.


우리의 삶을 되돌아보면 이해가 쉽다. 연인과의 기념일 날, 식당 종업원의 실수로 오더가 안 들어가 평소보다 30분이나 더 기다려야 했을 때 깊은 한숨을 내쉬어본 적은 없었는가? 일분일초라도 더 빨리 침대에 쓰러지고 싶을 만큼 하루가 유난히 길게 느껴졌던 날, 이름 모를 행인이 사과도 없이 나의 어깨를 치고 달려 나가는 뒷모습을 보면서 격렬한 분노를 느껴본 적은 없었는가? 아마도 우리 모두가 일상 속에서 겪는 이런 시시한 원망의 순간들을 마주했던 경험이 있을 것이다. 


"왜 하필 오늘 이러지?"


"왜 나한테 이런 일들이 일어나는 거지?"


위와 같은 짜증 나는 상황을 맞이했을 때 즉각적으로 나오는 반응들이다. 내 세상의 중심은 나 자신이니, 지금 당장의 나의 욕구와 감정이 세상의 우선순위라고 느껴지기 때문이다. 그렇다 보니 나의 행복이나 평안을 방해하는 주변 상황에 짜증을 느끼는 건 어찌 보면 당연한 거고, 어쩔 때는 심지어 그들의 존재 자체마저 참으로 부당한 일이라고 생각되기까지 한다.


하지만 즉각적으로 나오는 본능이라고 해서, 그게 꼭 옳거나 자연스러운 것은 아니다. 유난히 잔실수를 연발하는 식당 종업원과 무례하게 날 밀치고 뛰어가는 행인까지, 이러한 상황들을 내가 어떻게 받아들일지 선택할 자유가 있다면, 그리고 그것을 인지하기 시작하는 순간 우리가 바라보는 세상 자체가 달라질 수 있다면, 만약 그럴 수 있다면 어떨까?

가령 나에게는 기념일인 오늘이 유난히 실수를 많이 하는 이 종업원에게는 돌아가신 어머님의 기일일 수도 있다면, 또 나를 뒤에서 밀치고 뒤도 안 돌아보고 달려가는 저 행인의 종착지가 10살 난 아들이 교통사고로 실려간 응급실일 수도 있다면 어떨까? 물론 그럴 가능성은 희박하다 못해 없다고 볼 수도 있겠지만, 그럴 적은 가능성이라도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굉장히 의미 있는 연습이다. 이 연습을 반복하고, 그에 익숙해지다 보면, 우리가 일상에서 겪는 다양한 종류의 짜증 나는 순간들도 다르게 받아들일 수 있기 때문이다.




이제 다시 인생의 축소판이라고 볼 수 있는 축구 경기장으로 돌아가 보자. 우리가 삶이라는 길고도 긴 경기에서 실수하고, 넘어지고, 좌절하듯이, 선수들도 필드위에서 실수하고, 넘어지고, 좌절한다. 그럴 때마다 우린 별생각 없이 야유를 보내고 비난을 한다. 내 축제, 내 시간, 내 기분이 낭비되고 더럽혀졌다고 느껴지기 때문이다. 하지만 선수들에게는 선수들 본인들이 자기 인생의 주인공이다. 게다가 선수들에게 월드컵이란 선수생활, 더 크게는 일생동안 다시 오지 않을 수 있는 엄청난 중압감의 무대일 것이다.



멕시코전에서 골을 넣었고, 독일전에서도 하프라인에서부터의 전력질주로 우리에게 큰 감동을 주었던, 경기가 끝난 모든 순간마다 뜨거운 눈물을 흘렸던 손흥민 선수가 “아직도 무섭다. 진짜 잘 준비해도 부족한 게 월드컵 무대다... 아직도 겁이 난다”라고 고백했단 사실을 아는 사람은 몇이나 될까? 아직 20대에 불과한 이 젊은 선수가 국가대표팀의 에이스로서 느꼈을 중압감을 느껴본 이는 또 얼마나 될까?



멕시코전 실점을 하고 한국 수비가 급격히 흔들리자, "포기하지 마!"라고 수 차례 외치며 팀원들을 다잡았던, 그리고 위기 순간마다 번뜩이는 선방으로 대한민국 대표팀의 구세주 역할을 했던 조현우 선수에게 고향에서 한결같이 자신을 응원해주는, 그래서 늘 "고마운" 구세주 같은 와이프가 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몇이나 될까?



지난해 9월 월드컵 최종예선에서 '관중 발언'으로 축구팬들에게 '욕받이'로 전락하면서 자신감을 상실했던 김영권은 어떤가. 독일전에서 눈 부상을 당했으면서도 교체를 거부하고 뛰면서 단단한 수비력과 결국 결승골까지 성공시키며 팀을 승리로 이끈 김영권은 경기 후 인터뷰 내내 눈물을 참지 못했다. 온 국민의 비난의 대상이었던 아들이 안쓰러워 인터넷도 외면할 정도로 마음고생을 했던 모친이 올해 초 폐암 판정을 받고 지금은 성공적인 수술 뒤 휴식을 취하며 아들의 경기를 보고 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또 몇이나 될까?


이러한 사실들을 알고도 우린 그들을 쉽게 비난할 수 있는가?


위에 거론된 선수들 뿐만이 아니다. 이 세상을 살아나가는 한, 우리 모두에겐 저마다의 사정과 각각 지고 있는 삶의 무게라는 것이 있다. 이런 세상에서 그저 '나'만이 중심인 것처럼 '나' 외에 것들은 모두 거슬리고 배척해야 할 대상으로 바라본다면, 우리는 결국 자기중심적 무의식의 지배를 받아 어떠한 삶을 살지 선택할 자유를 잃어버리고 말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의식적인 선택을 할 자유를 포기하는데서 남는 에너지는 결국 남을 미워하고 자신의 신세를 한탄하는 데에나 쓰일 것이다. 그런 삶에서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 건 반복적인 짜증과 원망, 그리고 상실이다.


하지만 자기중심적 사고에서 벗어나 조금만 더 타인을 어떻게 배려할지, 상황을 어떻게 자각할지, 어떠한 반응을 보일지 고민해보고 선택한다면, 그 자체만으로도 우리는 삶에서 전에 없던 풍족함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물론 매일매일을 이렇게 산다는 건 쉽지 않은 일이다. 그렇기 때문에 무의식이 아닌 의식적인 선택을 통해 내 삶의 주인이 된다는 건 세계 최강 독일을 이기는 것보다, '죽음의 조'를 통과하는 것보다 어려운 일수도 있다. 하지만 그렇게 살 수만 있다면 이것이야 말로 우리 삶의 참된 '기적'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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