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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민규 Nov 09. 2018

정의의 온도

첫 사건을 통해 느낀 것

좋든 나쁘든 누구에게나 첫 경험은 기억에 남기 마련이다.


인턴 시절에도, 검사실에서 정식으로 근무를 시작 한때에도 내 첫 사건의 고소인은 공교롭게도 늘 한국인이었다. 다른 곳도 아닌 세계의 모든 문화와 인종이 한데 모여있어 지구의 축소판이라고 불리는  뉴욕에서 두 번이나 첫 사건으로 한국인이 걸린 것이다. 이것이 정말 기막힌 우연의 산물인지, 나의 열정을 고취시키려는 회사 측의 교묘한 음모인지는 모르겠으나, 피해자가 한국인이라는 사실을 안 이상 더 큰 책임감을 가지고 사건에 임하게 되었다는 것만큼은 사실인 거 같다.



그 날의 기억은 아직까지 꽤 생생하게 남아있는 편이다. 출근을 시작하고 나서 첫 주 동안은 하루도 빠짐없이 비가 내렸었는데, 고소인과의 인터뷰가 잡혀있던 그날도 창밖엔 어김없이 비가 내리고 있었다. 장마철 특유의, 바람을 동반하지 않고 곧게 내려 삽시간에 모든 것을 남김없이 적시는 그런 비였다.


약속 시간에 맞춰 접견실에 들어가 기다리자 어느새 내 첫 고소인 인터뷰를 모니터 해주기로 한 선배 검사가 들어왔고,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 고소인 전문 통역관과 함께 문을 열고 들어왔다. 고소인은 벙거지 모자를 푹 눌러쓴 할머니였는데, 할머니는 들어오시자마자 늦어서 미안하다며 고개 숙여 사과부터 하셨다. 비에 흠뻑 젖은 채 너무나도 송구스럽단 표정으로 연신 사과만 하시는 할머니가 안쓰러워 그만 반사적으로 "괜찮으니 편히 자리에 앉으시라"는 말이 한국말로 나와버렸는데, 예상치 못한 곳에서 고국의 언어를 들은 반가움 때문이었는지, 아니면 낯설고 막막했던 상황 속에서 한줄기의 익숙함이 준 안도감 때문이었는지, 할머니는 내 말을 듣자마자 창밖의 장맛비에 뒤지지 않을 기세로 왈칵 눈물을 쏟으시며 울분을 토하셨다.


"검사님, 정녕 미국에 정의가 아직 살아있긴 하답니까!"


"이럴 수는 없습니다! 그들이 나에게 이럴 수는 없는 겁니다!"


할머니의 절규는 대개 이런 식이였다. 어찌나 흥분하셨던지 준비된 의자에 앉지도 않으신 채 한참을 그렇게 울부짖으셨다. 할머니의 기세엔 나도 물론 적잖이 당황했지만, 대체 내가 무슨 말을 했길래 할머니가 저리 오열하는지 도통 알 길이 없었던 내 미국인 선배 검사는 얼굴색까지 변해버렸다. 물론 제일 당황한 사람은 예상치 못한 한국인 검사의 존재로 자신의 역할이 애매모호해져 버린 통역관이었을 것이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이런 난감한 상황을 타개할 사람은 상대적으로 제일 덜 당황한 나밖에 없어 보였다.


흔히들 난관에 부딪혔을 때 기발한 기지를 발휘해 그 상황을 극복해야 한다고 생각하기 쉽다. 하지만 사실 이럴 땐 자신이 오랜 시간 동안 검증해온 제일 자신 있는 능력을 활용하는 게 오히려 효과적일 때가 많다.


나에겐 그 능력이 상대방의 말을 인내심을 가지고 잘 들어주는 것이었다. 어쩌면 너무 시시해 보이는 능력일지도 모르겠다. 대중 미디어의 영향 때문이었는지 몰라도 나도 어렸을 때는 유능한 검사라면 셜록 홈즈처럼 '가설적 추론'을 앞세워 상대방의 옷차림만 보고 그 사람의 습관이나 출신 배경까지 알아내는 신묘한 기술을 구사하거나, 아니면 적어도 냉철한 눈빛으로 상대방을 시종일관 압박하며, 그의 말이 거짓말이나 궤변으로 일관될 시엔 매섭게 윽박지르는 스킬 정도는 보유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물론 이게 얼마나 현실적으로 어렵고, 심지어 위험한 방법인지는 일을 시작한 지 얼마 안 되어 깨닫게 되었지만 말이다.


그렇다고 내 경청하는 재주가 수사에 도움이 되냐고 묻는다면, 안타깝게도 그렇지만도 않다. 얼핏 들으면 이 능력은 수사에 최적화된 능력 같지만, 사실 이는 수사에 득보다는 실이 되는 경우가 더 많다. 많은 양의 정보가 늘 좋은 건 아니기 때문이다. 눈에 핏줄이 터질 때까지 5000장의 문서를 검토해봐도 정작 쓸만한 정보는 5장 분량도 못 건지는 경우도 있고, 단 50장 이내의 문건들 만으로 핵심 정보를 모두 찾아낼 수 있는 경우도 있다. 실제로도 대부분의 사건 해결에 필요한 정보는 A4용지 서너 장에 요약될 수 있을 정도다. 이렇듯 수사에서 중요한 건 정보의 양이 아니라 질인데, 나는 대화를 통해 사건의 본질과는 전혀 상관없는 정보들까지 다 들어주다 보니 효율성면에서는 떨어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 학생으로 치자면 핵심 포인트만 집어내는 노련한 우등생 스타일이라기 보단 무식하게 교과서를 통째로 암기할 작정으로 덤벼드는 낙제생 스타일이라고 보면 될 거 같다.


이렇게 모든 이야기를 다 잘 들어주며 살아오다 보니 필연적으로 따라오는 부작용이 하나 있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예를 들자면 로스쿨 입학시험성적 상담을 목적으로 학생과 1시간 넘게 대화하다 보면 어느새 그 학생이 울먹이며 자신의 은밀한 가족사를 나열하고 있다거나, 설문조사에 참여해달라는 대학생을 따라가 성실하게 답변에 응해주다가 보면 어느새 그 학생이 나에게 한숨 쉬며 진로상담을 하고 있는 식이다. 심지어 군대에서도 관심병사 전담 상담병이었다 보니 이 훈련은 이래서 못하겠고 저 훈련은 저래서 못하겠다는 온갖 창의적인 비하인드 스토리들을 진지한 표정으로 받아 적는 게 하루 일과의 중요한 한 부분이었던 적도 있다. 라디오 DJ로 일해본적도 없는 내가 어쩌다 보니 세상의 사연이란 사연은 다 접하며 살아온 것이다. 그래서인지 여전히 강남역이나 남부터미널 주변을 지나갈 일이 있으면 얼굴에 사연이 많아 보인다며 어김없이 '도팔이'들이 꼬인다. 물론 난 그들의 이야기까지 가끔 들어준다.



어찌 되었든 책상에 쓰러져 눈물로 자신의 설움을 쏟아내시는 할머니를 다그치며 멈추게 할 수는 없었기에, 그날도 난 할머니의 사연을 매우 세심하게 노트필기까지 하며 들었다. 들어보니 할머니의 사연은 대강 이랬다.


할머니는 지역 한인 사회에서 재산 꽤나 된다는 연세 지긋한 한 회장님의 가사도우미로 몇 년간 일하셨단다. 말이 가사도우미지, 오랜 지병으로 몸이 쇠약해지신 회장님의 병 수발을 드는 게 주 업무였다. 처음엔 모든 게 순조로웠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회장님은 점점 할머니에게 의지하기 시작했고, 이 의지하는 마음은 빠르게 애틋한 감정으로 커져갔다. 그러자 회장님은 할머니에게 선물 공세를 하기 시작했다. 사랑을 주는 사람은 그 사랑을 어떤 식으로든 증명하고 싶어 하는 법이다. 회장님의 마음이 커질수록, 선물들의 스케일도 커져만 갔다.


하지만 셰익스피어가 말했듯이, 진정한 사랑의 길은 평탄치 않다. 이 상황을 지켜본 회장님의 자녀들이 슬슬 불만을 가지기 시작한 것이다. 그들은 자신들이 주는 넉넉한 봉급 외에도 너무 많은 걸 가져가는 할머니가 얄밉고 괘씸했다. 언젠가는 자신들에게 돌아올 재산까지 가로챌 수도 있다는 걱정도 덜컥 들었을 것이다. 그래서 결국 회장님이 심장발작을 일으키고 중환자실에 입원하게 된 어느 날, 그들은 할머니를 집에서 쫓아냈다. 할머니는 한순간에 거처와 직장, 그리고 생활수단까지 잃게 된 것이다. 하지만 그런 상황에서도 할머니는 오로지 회장님의 빠른 쾌유만을 기원하셨다고 한다. 결국 할머니의 간절한 염원은 이루어지지 않았고, 회장님은 할머니가 쫓겨나신 지 일주일 만에 돌아가셨다. 그로써 할머니는 유일하게 붙들고 있던 사랑마저 잃게 되었다.


간병인과 회장님의 로맨스를 둘러싼 한 가족의 욕망의 민낯이라니... 할머니의 사연은 분명 드라마에서 한 번쯤은 본 것 같은 익숙한 내용이었다. 하지만 직접 들어보니 그 과정이나 결말이 썩 ‘품위 있진’ 않았다. 그리고 문제를 해결해야 할 입장으로썬 여간 곤혹스러운 것이 아니었다. 일단 치정 멜로는 내 전문 상담 분야가 아니었다. 하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건 할머니의 사정에 법적인 해결책이 전혀 없었다는 것이다. 애초에 할머니가 제보한 내용과는 달리 자녀들의 폭행이나 협박의 증거도 없었고, 임금 또한 꼬박꼬박 제때 지불되었단다. 위법 행위는 일절 없었던 것이다.

나에게 이러한 자초지종을 전해 들은 선배 검사는 굳은 표정으로 인터뷰를 마무리하자고 나지막이 속삭였다. 할머니의 사정은 딱하지만, 우리가 그녀에게 해줄 수 있는 일이라곤 아무것도 없다는 것이었다. 그 말에 동의하는 건 아니었지만, 나 역시 인터뷰는 그쯤에서 중단해야 하는 게 좋을 거 같았다. 일단 할머니의 이야기를 더 듣기엔 점심시간이 너무 훌쩍 지나있었다. 배도 고팠고, 모두가 긴 인터뷰와 격앙된 감정에 지쳐있기도 했다. 결국 모두를 위해 적당한 타이밍을 잡아 인터뷰를 끝내고, 할머니를 건물 로비 앞까지 데려다 드렸다.



사실 우리가 할머니에게 해줄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다는 선배 검사의 주장은 심각한 오류를 내포하고 있다. 이는 매우 편협된 시각이기도 하다. 법적인 해결책이 없다고 해서 문제 해결이 불가능한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사실 법적 해결이란 매우 극단적이고, 때론 폭력적인 수단이다. 상처를 치유하기는커녕, 오히려 새로운 갈등을 야기할 위험이 크다. 할머니가 자신들을 고발했다는 소식만으로 노발대발하며 무고죄로 맞불을 놓겠다던 회장님의 자식들의 반응만 봐도 알 수 있듯이, 법은 모든 분쟁의 궁극적이고 이상적인 해결책이라고 보기 힘들다. 그럼에도 사람들이 법에 의한 해결을 원하는 이유는 아마 감정의 작용이 클 것이다. 분노하고 상처 받아 곪을 대로 곪아버린 사람들의 마음은 더딘 화해와 타협의 과정보단 선명하고도 이분법적인 법의 정의에 끌리기 마련이다. 하지만 반대로 생각해보면 만약 사람들의 다친 마음을 어루만져줄 수 있다면 어쩌면 그들은 굳이 법정 싸움이라는 외나무다리 싸움까지 가지 않을 수도 있다.


그 당시에 내가 이런 거창한 생각을 가지고 할머니에게 도움의 손길을 내밀었던건 아니었다. 그저 첫 사건을 이렇게 마무리하기가 영 찝찝해서였던 거 같기도 하고, 아니면 한국인들만 유별나게 강조하는 그 흔한 정이라는 것에 휘둘린 거 같기도 하다. 물론 차가운 이성에만 묶여 살지 말고 자유롭게 뜨거운 이상을 좇자는 사회초년생의 흔한 패기도 한몫했을 수 있다. 어떤 이유에서였든 난 할머니에게 내 개인 연락처를 주며 하고 싶은 말이 있으실 땐 언제든지 연락하라고 말씀드렸다. 그리고 할머니를 쫓아낸 사람들에게 법적으로 문제제기는 못하더라도, 법이 마련한 틀 내에서 할머니에게 금전적인 혜택이 돌아갈 수 있게끔 도와드릴 수는 있다고도 했다.




그 날 이후 일주일간은 모든 게 순탄했다. 할머니의 국가보조금 신청서 접수도 잘 마무리되었고, 할머니에게 종종 오는 문자와 전화도 꼬박꼬박 답해드렸다. 서류처리만 완료되면 곧 국가보조금 혜택이 나와 할머니가 겪는 생활고 문제도 좀 더 나아질 것이라고도 전해드렸다. 그렇게 할머니와의 인연은 훈훈하게 마무리되는 듯싶었다.


하지만 그 후에도 할머니의 연락은 더 잦아지고 그 시간대는 더욱 무분별해져 갔다. 출근시간, 퇴근시간을 가리지 않고 전화가 왔고, 내용 또한 점점 더 허무맹랑해졌다. 할머니는 자신을 음해하는 세력이 존재한다고 주장하셨고, 심지어 자신이 도청당하고 있다고 믿고 계셨다. 누군가 우리가 교환한 이메일이나 문자 내용을 본다면 할머니를 에드워드 스노든 (Edward Snowden: 미국 내 통화감찰 기록과  PRISM  감시 프로그램 등의 NSA의 기밀문서들을 세상에 공개한 내부고발자)으로 착각할만한 수준이었다. 그리고 언제나 마무리는 세상의 정의가 존재한다면 법이 악의 세력을 몰아내고 자신을 구원해줄 것이라는 법만능주의나 권선징악론과 같은 식의 결론이었다.


처음에는 할머니가 처한 상황이 상황이니만큼 좋게 받아들이려 했다. 하지만 사람은 지친다. 더군다나 당시에는 업무량도 점점 불어나는 상황이었다. 할머니의 사건과는 달리, 확실한 위법행위와 법적 해결책이 있는 수십, 수백 명의 피해자와 수십, 수백억 원대의 피해금액도 있는 ‘진짜’ 사건들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계속되는 황당한 내용의 전화와 문자 공세에 나는 왈칵 짜증이 났고, 그렇게 답변들은 조금씩 퉁명스러워졌다. 할머니의 마음을 치유해주기로 마음먹은 지 3주가 채 지나지 않은 시점이었다.



어느 날 밤, 어김없이 할머니에게 전화가 왔다. 그냥 무시할까도 고민했지만, 그땐 퇴근하고 침대에 누워 별 다른 할 일도 없었기에 마지못해 휴대폰을 들었다. 만나서 점심 한 끼 하자는 내용이었다. 뭔가 중요한 일인가 싶어 알겠다고 하고 주말 점심시간에 32번가에 있는 한인타운의 한 식당으로 약속을 잡았다.


약속 당일날 만나기로 한 식당에 도착하자 할머니는 우리가 처음 봤던 날과 똑같은 복장으로 식당 구석에 자리한 테이블에 앉아 기다리고 계셨다. 막상 할머니의 얼굴을 보자 오늘은 또 어떤 장르의 음모론을 듣게 될까 덜컥 겁이 났다. 그러자 전날 술을 마시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갑자기 속이 쓰려오기 시작했다. 그래서 무엇을 들겠냐는 할머니의 질문에 쓰린 속을 달래줄 해장국 한 그릇이면 될 거 같다고 했다.


펄펄 끓는 해장국이 나와 내 앞에 놓이자, 할머니는 예전의 거칠고 날 선 말투와는 사뭇 다른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씀하셨다.


“검사님, 그동안 나이 든 노인네 투정받아주시느라 힘드셨지요? 그동안 제 이야기를 늘 끝까지 들어주시고 제 편이 돼주신 건 검사님뿐이었습니다. 너무나도 큰 힘이 되었습니다. 평생 이 은혜 잊지 않겠습니다.”


뜻밖의 전개에 너무 놀라진 마시라. 우리들이 한 달간 진행한 경청 테라피가 할머니의 마음을 조금은 다독여주었을지 몰라도 완전히 치유시킨 건 아니었다. 마음의 상처는 그렇게 쉽게 치유되지 않는다. 사람도 그렇게 쉽게 변하지 않는다. 할머니도 역시 바뀌지 않으셨다. 그 날 이후에도 할머니는 짧게는 한 달, 길게는 두 달에 한 번씩 나에게 자신이 사기를 당했다거나 감시를 받고 있다는 이메일을 보내셨다. 지금도 여전히 보내신다. 하지만 굳이 바뀐 게 있다면 그런 이메일을 대하는 나의 태도랄까. 그만큼 그 날 식당에서 할머니가 한 말은 내 안 깊숙이 들어와 날 움직였다.


그 순간의 기억은 아직도 또렷하다. 할머니의 말의 무게는 너무나도 무겁게 다가와 마치 내 주변 모든 것을 잠식하는 듯했다. 바로 내 앞에서 보글거리며 끓는 해장국 소리마저 마치 옆 테이블, 아니 식당 저 반대편 끝 쪽에서 들려오는 것처럼 멀고 희미하게 들렸다.

하지만 이 와중에도 어떤 열기만은 너무도 강렬하게 느껴졌다. 펄펄 끓는 해장국에서 나온 열기였을 수도 있었겠지만, 아마도 내 얼굴이 그 보다 더 뜨겁게 화끈 달아올랐기 때문일 것이다. 그만큼 그 날 할머니가 나에게 한 말은 날 부끄럽게 만들었다.


사실 난 능력 있지만 차가운 법조인보다는 조금 느리더라도 따뜻한 법조인이 되고 싶었다. 피의자 또는 참고인, 피해자 또는 그 가족들에게 항상 친절히 대하는 자세를 견지하고 싶었다. 어떤 경우에도 친절한 태도를 흐트러뜨리지 않고, 어떤 경우에도 권력과 지식을 뽐내며 우월감을 나타내 상대방을 위축시키거나 비굴하게 만드는 일이 없길 바랐다. 하지만 할머니의 말을 듣고 보니 나는 그런 사람이 되지 못할 거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잘난척하며 중요하다고 생각하던 '진짜' 사건 파일들이 일으킨 바람에 내 초심이 깃털처럼 허무하게 날아가고, 내 편견과 조급함에 할머니의 외로움과 상처, 그리고 무엇보다 진심이 가려지는 데에는 한 달이라는 시간이 채 걸리지 않았던 것이다.


그래서 그런지 아직도 그때를 생각하면 얼굴이 화끈거린다. 초심이란 그때도 쉽게 무너졌기에 앞으로도 또 쉽게 무너지지 않으리란 보장이 없다. 다행스러운 건 초심은 쉽게 바래질지라도 첫 경험은 잘 잊히지 않는다는 거다. 어떻게 보면 내 첫 고객이었던 할머니는 나에게 일하면서 처음으로 부끄러움이란 걸 느끼게 해 준 고마운 분이다. 평생의 은혜를 입은 건 오히려 나다. 앞으로도 내가 그때의 화끈거림, 그때의 부끄러움을 간직하고 산다면, 그래서 그 부끄러움이 다른 뜨거운 무언가가 될 수 있다면, 내가 따뜻한 사람은 되지 못할지언정 차가운 사람은 되지 않을 거 같다.

할머니가 입버릇처럼 말씀하신 그 정의라는 게 이 세상에 정말 존재한다면, 그 정의는 아마 이런 온도를 갖고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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