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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민규 Dec 19. 2018

나는 어쩌다 법을 공부하게 된 걸까? (1)

1부: 유유히 흐르는 물처럼

나는 어쩌다 법을 공부하게 된 걸까?

1부: 유유히 흐르는 물처럼


법이라는 단어가 주는 무게감은 특별하다.

 

일단 어감부터 예사롭지 않다. '법'과 같은 한 음절 단어들은 대개 근본적이고, 절실하며, 원시적인 것들이다. 자아와 타인의 관계를 구분해주는 ‘나’와 ‘너,’ 태초부터 생존에 필수 불가결한 자연적 요소였던 ‘해,’ ‘달,’ ‘별,’ ‘물’과 ‘불,’ 전지전능하고 완전무결한 존재로서 모세에게 “나는 스스로 있는 자니라”라고 말씀하셨다던 ‘신’까지.


마찬가지로 ‘법’이라는 단어 역시 “스스로 있어도” 딱히 외롭거나 부족해 보이지 않는 한 음절 단어 특유의 딱 떨어지는 완전함이 느껴진다. 또 ‘법’이라는 단어는 다른 한 음절 단어들과는 다르게 말할 때 공기와 소리를 시원하게 토해내거나 내뱉는 맛이 없다. 오히려 입을 완전히 채 열기도 전에 바로 오므려 발성을 멈춰야 한다. 그래서 단어 자체가 모든 불필요한 소모를 철저히 배제하고 통제하여, 절제된 느낌을 준다.

 

어원 또한 심상치 않다. 지금 우리에게 익숙한 한자는 법(法)이 된 지 오래라 법은 물이 흐르는 것과 같이 순리적이고 공평해야 한다는 의미로 흔히들 오해한다. 하지만 이는 전형적인 수 겉핥기식의 해석이다.

원래 법(法)의 본자는 법(灋)이었다. 水+廌+去(물 수+해태 치+갈 거)를 합친 회의자이다. 파리 한 마리 꼬이지 않을 정도로 성스러운 고대 전설 속의 동물 ‘해태(廌)’가 ‘물(水)’처럼 고요하게 죄지은 사람에게 ‘가서(去)’ 그 사람을 머리의 뿔로 받아 버리거나, 그 죄가 큰 중죄인은 먹어치워 죽여버린다는 뜻이다. 물처럼 유유히 흐르는 것이 아니라, 해태처럼 강력하며 응보적이고 두려운 것이 법이라는 의미이다. 그렇기 때문에 조선시대의 경우, 관리들을 감찰하고 법을 집행하는 사헌부를 지켜주는 상징에, 그리고 사헌부의 우두머리인 대사헌이 입는 관복의 흉배에도 이 해태가 새겨져 있던 것이고, 오늘날 대한민국의 국회의사당과 대검찰청의 앞마당에도 이 해태란 동물이 떡하니 자리 잡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일까? "법대로 하자"는 말이 일상화된 요즘에도 법은 여전히 많은 이들에게 미지와 두려움의 대상으로 남아있다. 이는 변호사들과 소송의 나라라고 불리는 미국에서도 마찬가지다.


그런 법을 공부하고, 집행하고, 해석하는 법조인들은 그래서 여전히 우리 사회의 특권층이며 강자들이다. 이게 금색 체인을 주렁주렁 흔들며 꿀렁꿀렁 플로우를 타는 힙합 스타들이 아이들의 선망의 대상이 된 지 오래인 21세기에도, 아직 변호사, 판검사와 같이 딱딱하고 책 냄새가 물씬 나는 직업들이 아이들이 선망하는 직업 상위권에 남아 있는 이유다.


그런지라 나도 가족모임이나 어린아이들을 둔 학부모들이 있는 자리에 나가게 되면 어떻게 로스쿨에 입학해 법조인이 됐냐는 질문을 자주 받았고, 또 여전히 받는다. 그럴 때마다 한때 차두리가 출연했던 웅진제약의 한 광고 CM송에 맞춰 "운 때문이야~ 운 때운이야~"라고 솔직하게 대답해주고 싶지만, 돌아올 학부모들의 경멸 어린 시선을 감당할 자신도 없거니와, 또 나 스스로도 그 이유가 궁금해져 언젠가부터 내가 왜, 그리고 어떻게 법을 공부하게 된 건지에 대한 내 나름대로의 그럴싸한 답변을 찾기 시작했다.



그 답의 참고자료가 될 듯싶어 지금은 대한민국의 민정수석이 된, 그 당시에는 서울대 로스쿨 교수였던 조국 수석의 『왜 나는 법을 공부하는가』라는 책을 읽어본 적이 있다. 젊은 법학도들이나 법학도를 꿈꾸는 어린 학생들을 위한 멘토링 책이었는데, 이 책에서 조국 수석은 법을 공부하는 이유 중 하나를 아래와 같이 설명한다.


존재하는 법률이나 판례가 무조건 옳은 것은 아니다. 법 자체가 잘못 만들어져 있을 수도 있고, 법을 해석하고 집행하는 기관이 편향된 사고를 가지고 있을 수도 있다. 이렇게 법과 법 관련기관에 문제가 있다면 법은 오히려 분쟁 해결의 수단이 아니라 분쟁 촉발의 원인이 된다.

나는 이런 경우를 접하면, '도대체 왜 이런 법이 존재하고 있지?'라는 의문과 호기심이 생긴다. 동의할 수 없는 법률과 판례의 문제점을 세밀하게 분석하다 보면 논문 한 편이 나오고 자연스럽게 '이러한 법률과 판례를 고치자!'라는 생각으로 이어져 사회적 행동까지 연결된다. 호기심은 문제를 바로 잡아야겠다는 사명감을 불러일으키고, 사명감은 이론적 및 사회적 실천으로 옮겨지는 것이다. 그런 노력에 의해 잘못된 법률이나 판례가 바뀌게 되면 저절로 보람을 느끼게 됨은 물론이다.

조국,『왜 나는 법을 공부하는가』 중에서, P103


조국 수석은 자신이 어린 시절부터 공부를 즐기게 된 데는 본인의 특이한 이름이 한몫했다고 설명한다. 독특하고 쉽게 기억되는 이름 탓에 학기마다 어느 수업이든 선생님들에게 호출을 당했기 때문이다.


"조국! 나와서 이 수학 문제 풀어봐!"


"조국! 다음 시간까지 이걸 준비해와!"


조국 수석은 보통 사람이라면 부담을 느껴야 할 이러한 상황도 어느덧 즐기는 법을 배웠다고 한다. "피할 수 없으면 즐겨라"라는 말의 의미를 어린 나이에 체득했다고나 할까. 그래서 그는 본인의 이름이 호명되기를 은근히 기다리며 예습을 했고, 그러면서 공부의 맛을 점차 알게 되었다고 한다.


한창 로스쿨에서 매너리즘에 허우적거리고 있었던 시절 이 책을 접했던 터라, 조국 수석의 책은 나에게 좋은 자극제가 되었다. 법에 대한 내 나름의 철학을 정립하는데도 분명 도움이 되었다. 하지만 내가 왜 법을 공부하게 되었고 왜 앞으로도 더 공부해야 하는지에 대한 부분에서는 전혀 공감이 되지 않았다. 나는 내 이름이 '조국'이 아니라 '왕국'이나 '김칫국'이었다고 하더라도 공부를 좋아하게 되진 않았을 거 같다. 끊임없이 선생님들에게 호명을 당했다면 그건 그냥 '안습'인거지 '예습'은 당치도 않다. 그리고 애초에 공부는 "피할 수 없으니 즐기는 것"이 아니라 "피할 수 없어도, 아니, 피할 수 없으니까 싫은 것"이 아니던가?


교사 집안의 아들로서, 잘생기고 키까지 큰 데다가 성격도 반듯한데 의식까지 있는 사람이 심지어 성실까지 했다니. 이렇게도 리얼리티 없이 완벽한 그가 쓴 글들은 나에게 마치 아득하고도 먼 다른 차원에서 넘어온 외계 언어 같이 느껴졌다. "왜 나는 법을 공부하는가"에 대한 해답을 찾고자 편 이 책이 나에게 되려 "왜 나는 저렇게 살지 못하나"라는 실존적 물음만 던져준 것이다.




내가 조국 수석처럼 살지 못한 데는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아무래도 가장 근본적인 이유는 내가 공부를 늘 못했다는 게 아닐까 싶다. 그리고 이 지긋지긋한 비극의 역사는 초등학교 시절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초등학교 1학년 국어시험 중 독해 문제에서 산속의 왕 호랑이가 한겨울에 산짐승들이 겨울잠을 자는 탓에 먹을 것이 없어 마을까지 내려왔다는 식의 지문이 나왔었다. 질문은 호랑이가 왜 마을까지 내려왔냐는 것이었다. 모법답안은 "산짐승들이 겨울잠을 자는 탓에 먹을 것이 없어서"였겠지만 그게 아니어도 최소한 "배가 고파서"까지는 적었어야 정답 범주에 들어갔을 것이다. 하지만 난 여기서 "가고 싶으니까"라는 지극히 포스트 모던한 답변을 적었다고 한다. 마치 한때 SNS에 떠돌았던 창의적인 '초등학생 답안지 시리즈'처럼 말이다. 그때부터 어머니는 내가 평균보다 조금 지능이 떨어지는 게 아닌가 하는 걱정을 하셨다고 한다.


웹상에서 도는 초등학생 답안지 중 하나


알고 보니 내가 이과 천재였다는 반전 역시 다. 오히려 수학은 더 못했다. 초등학교 1, 2학년 때 수학시험에서 60점을 받는 건 쉽지 않은 일이다. 하지만 난 받았다. 그것도 꾸준히. 60점을 받는 게 '일탈'이 아니라 '일상'이 되어버리자 마음이 급해지신 내 어머니는 수많은 학부모들이 흔히 빠지곤 하는 현실 부정 중에서도 대표 격이라 할 수 있는 '우리 애는 머리는 좋은데 공부를 안 한다'라는 자기 최면에 빠지셨다. 그래서 그때부턴 나의 학구열을 고취시키는데 집중하셨다. 줘도 못 받아먹는 물고기를 계속 던져주는 게 아니라 낚시하는 법을 가르치기로 결심하신 거다.


그 방법 중 하나는 내 안 깊숙이 봉인되어 있는 승부욕과 울분을 찾아 끄집어내는 것이었다.


"다른 집 아무개는 문제를 한 개만 틀려도 그게 그리 분해 화장실에 들어가 눈물을 흘린다더라. 엄마는 시험 결과를 떠나서 네가 그런 욕심이 있었으면 참 좋겠어."


이 말을 들으면서도 난 "그래, 어머니가 저렇게까지 말씀하시는데 나도 열심히 한번 해보자"라는 모범적 반응을 보이기보단 또 한 번 지극히 포스트 모던한 생각을 했었던 거 같다.


"이제부턴 울기만 하면 되겠구나."


결국 난 다음 시험에서 60점이라는 최후의 마지노선까지 벗어난 어처구니없는 점수를 받았다. 하지만 걱정이 되진 않았다. 그 당시에 난 감수성이 무척 풍부해서 몇 초만 집중하면 자유자재로 눈물을 흘릴 수 있는 신묘한 재주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현관 앞까지 경쾌하게 걸어가, 잠시 숨을 고르고, 슬픈 생각을 하기 시작했다. 경비아저씨의 뒷걸음질에 밟혀 어처구니없이 죽어버린 내 애완 달팽이, 『라이언킹』에서 무파사가 절벽에서 떨어지는 장면 등을 연달아 생각하자 곧 눈물이 왈칵 쏟아지기 시작했다. 이때다 하고 초인종을 눌렀다.


현관을 열고 나오신 어머니는 내가 너무도 서럽게 우는 모습을 보시자 걱정스러운 얼굴로 나를 품에 껴안아 주셨다. 어머니의 진심이 느껴져 순간 실제로 울컥하는 무언가가 느껴졌지만, 내게는 목숨 보존이라는 중대한 과제가 남아 있었다. 이내 평정심을 되찾고 겉은 울되 속은 웃는 후흑(厚黑)의 비기를 선보이며 내 처참한 시험지를 내밀었다. 확실한 마무리를 위해 이렇게나 많이 틀린 게 너무나도 분하고 억울하다는 절규도 덧붙였다. 그러자 어머니는 조용히 현관문을 닫으셨다.


날, 전에 느껴본 적 없는 극한의 공포와 고통을 경험한 난, 역시 세상은 호락호락하지 않으며, 우리 사회에 만연한 결과 만능주의는 결코 쉽사리 사라지지 않을 거란 비릿한 세상의 이치를 배웠다.




그 후로도 나의 체질개선을 위한 어머니의 처절한 노력은 계속되었고, 나는 결국 초등학교 3학년 때 외국인 학교에 보내졌다. 하지만 완전히 바뀌어버린 학습환경과 언어는 나의 '임독이맥(任督二脈)'을 뚫어주긴 커녕 오히려 '주화입마(走火入魔)'에 빠지게 만들었고, 그렇게 나는 좀체 공부에 흥미를 붙이지 못한 채 별다른 생각과 아무런 목표 없이, 마치 유유히 흐르는 물 같은 학창 시절을 보냈다.


<2부에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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